한지은은 내년 개봉 예정인 영화 ‘리얼’에서 설리와 함께 여주인공 역을 맡은 배우다. 크게 알려지지 않은 배우가 이경영, 이성민, 김수현 등과 나란히 영화 주인공을 맡았다는 건 최소한의 성공이 보장됐다는 소리다. 영화와 드라마 제작사 사이에서 이미 어느 정도 ‘급’이 형성됐다는 말과 같다.
그런 한지은이 ‘급’을 내려놓고 ‘안투라지’의 작은 역할에 합류했다.
안투라지 합류 직전에도 한지은은 SBS 드라마 ‘엽기적인 그녀’ 주연 오디션 최종 후보까지 올랐다. 웹 드라마 ‘뷰티학개론’ 주연 배우였다. 그런 그가 카메오 김기방과 함께 ‘안투라지’ 5회에서 이광수의 소개팅녀로 나왔다. 어찌 보면 배역이 작아 거절했을 법도 한데 왜 작은 역할도 거절치 않았는지 지난 7일 오후 5시 신사동 스페인 음식점 ‘엘 쁠라또’에서 한지은을 만나 물었다.
사진=고성준 기자, 장소 협조=엘 쁠라또
“저는 단역이고 조연이고 그런 거 신경 쓰지 않아요. 새로운 역할이면 일단 흥미가 생겨요”라고 대뜸 한지은이 말했다. 그는 배우로써 자신에게 가장 중요한 요소로 ‘다양함’을 꼽았다. ”배우마다 가진 고유의 특징이 있잖아요. 섭외할 때 그런 요소를 가장 많이 생각한다는 걸 알아요. 누구는 순수한 느낌, 누구는 ‘섹시미가 부각됐다’ 등등 각 배우마다 그런 이미지가 있죠. 전 그게 없었으면 좋겠어요. 모든 역할에 잘 어울리는 진짜 배우가 되고 싶거든요.“
제작자 입장에서는 작품을 만들 때 어느 정도 배우를 머리 속에 그린 뒤 작업을 하기 마련이다. 자신의 이미지가 명확하다는 건 배우로 선택 받을 때 가장 유리한 조건이다. 기획사도 이런 점을 잘 알고 배우의 이미지 만들기에 주력한다. 하지만 한지은은 아니다. ‘다양함’에 위험 부담이 따르더라도 자기는 ‘진짜 배우’가 되고 싶단다.
사진=고성준 기자, 장소 협조=엘 쁠라또
그 이유는 제대로 배우의 꿈을 꾸게 된 대학생 시절로 돌아간다. 첫 대학 생활은 방황 그 자체였다. 방송연예과에서 다양한 사람을 만나면 더 명확해질 줄 알았던 꿈은 오히려 흔들렸다. 한지은은 “배우가 내 꿈이 맞았나? 아니면 연예인이 내 꿈이었나? 그런 가치관이 정립되지 않아 혼란스러웠어요”라고 말했다. 학교에는 ‘배우’를 지망하는 사람 숫자만큼 단순히 ‘연예인’을 꿈꾸는 사람이 많았다. 그 사이에서 오는 혼란을 이겨내기엔 그는 너무 어렸다.
혼란은 방황으로 이어졌다. 한지은은 아르바이트를 전전하다 꽤 좋은 직장도 소개 받았다. 반 년 정도 만족도도 높게 일했다. 다만 ‘배우의 꿈’이 잊혀지지 않았다는 게 문제였다. “그냥 막연히 연기가 하고 싶다는 생각을 버릴 수가 없더라고요. 내가 가장 즐거웠던 순간을 곰곰이 되짚어 보면 늘 연기할 때 가장 행복했어요. 생각만으로 뭐가 되나요. 막막하죠. 어떻게 시작해야 할지 고민하다가 그냥 무작정 배우가 되자는 마음 가지고 뭐든 했어요”라고 한지은은 말했다.
한지은은 묵묵히 나섰다. 그는 배우로 결심이 선 2011년부터 영화와 드라마 오디션 사이트를 뒤지기 시작했다. “언젠가는 좋은 기회가 오겠다고 생각했어요. 그냥 무작정 다 찾아보기 시작했어요”라는 그는 이내 작은 역 하나를 맡게 됐다.
2011년 겨울에 시작한 MBC 드라마 ‘빛과 그림자’에서 고정 단역을 맡아 가수 뒤에서 춤을 추는 무용단원 역을 해냈다. 하면 됐다. 이어 영화 ‘기술자들’, ‘상의원’ 단역 자리를 맡던 그는 ‘수상한 그녀’에서 조연 역을 꿰찼다. “힘들었어요. 오디션 자체를 볼 수가 없어요. 정보 접근도 어렵고 불러주는 데도 없었으니까요. 다만 계속 버틸 수 있었던 건 연기가 즐거웠기 때문이죠”라고 했다.
사진=고성준 기자, 장소 협조=엘 쁠라또
세상에서 가장 힘든 일 중 하나가 큰 차를 타다 작은 차로 바꾸는 일이다. 주연 좌석에 탄 배우가 입석표를 끊는 장면은 흔하지 않다. 한지은은 주연도 해본 배우지만 역할을 아무렴 좋다. ‘천의 얼굴을 가진 배우’라는 목적지까지 좋은 차를 타든 걷든 무관하다 말한다. “작품에서 단역이든 조연이든 중요하지 않은 사람은 없어요. 저는 작품 안에서 제 비중보다 작품 그 자체와 역할을 보는 배우가 되고 싶어요“라고 말하는 한지은의 목소리에서는 웃음 가득한 얼굴과 달리 진중함이 묻어났다.
”걔 배우야? 아니면 연예인이야?“ 방송계에서 흔히 하는 질문이다. 이 말은 연기를 향해 진지한 열정을 가진 사람과 유명세에 취한 사람을 나눈다. 사람을 숫자로 나타낼 수 없는 업계이기에 이 말은 단순하면서도 ‘한 사람’을 꽤 객관적으로 평가하는 지표가 된다. 한 방송계 관계자에게 한지은에 대해 물었다. 그는 ”한지은? 걔 배우야“라고 답했다.
최훈민 기자 jipchak@ilyo.co.kr
사진=고성준 기자, 장소 협조=엘 쁠라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