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장 분량으로 이뤄진 공소장은 최순실과 안종범 전 정책조정수석비서관, 정호성 전 부속비서관의 혐의가 빼곡히 적혀있었다. 28번째 장을 넘겨서야 찾을 수 있었지만 가장 눈에 들어온 건 박근혜 대통령의 이름이었다. ‘정호성 피고인, 대통령의 공모범행.’ 피고인으로 기재되진 않았으나 공모범행이라는 네 글자가 명기돼 있었다.
공소장을 두고 다양한 추측이 인구에 회자됐다. 검찰은 무슨 의도를 지녔을까, 그리고 변호인은 어떤 생각으로 ‘사상누각’이란 표현까지 써가며 입장을 내보였을까 궁금했던 <일요신문>은 사법연수원 한 자리 기수 출신의 원로 검사 출신 A 변호사와 전원책 변호사에게 공소장을 둘러싼 의견을 물었다. 다만 원로 검사 출신으로 현 상황과 검찰 내부 분위기 등에 대해 심도 깊은 얘기를 들려준 A 변호사는 익명 인터뷰를 요청했다.
전원책 변호사는 “정당한 절차로 대통령을 끌어내리는 게 성숙한 국민의 자세”라고 말했다. 사진제공=전원책
#검 “공소장 최대한 대통령 배려” 변 “악의적인 공소장으로 느꼈을 수도”
A 변호사는 공소장에 대해 “객관적이면서 대통령을 배려해 최대한 완곡하게 표현했다”고 평했다. 그는 “변호사는 의뢰인 입장에서 할 수 있는 모든 말을 다 하는 사람이다. 당장 대통령에게 유익하고 국민에게 먹힐 수 있는 이야기를 했다. 법원에서 안 받아들여지면 그만”이라며 “검사 발표 내용은 증거를 기초로 한 이야기이고 유영하 변호사가 한 말은 증거를 무시하고 정치적 수사로 몰아가는 소리”라고 말했다.
이어 “이 사건은 정치적 검찰 수사가 아니다. 공소장에서 검찰은 매우 신사적으로 에둘러 공모 사실을 썼다. 조사와 발표에서 예를 갖춘 뒤 과도하지 않은 방식을 선택했다. 증거가 확실한데 대통령을 배려했다. 시정잡배 대상 공소장이었으면 ‘공모했다’고 단정해서 표현한다”고 전했다.
이에 대해 전원책 변호사는 의뢰인 입장에서는 공소 사실을 악의적으로 받아들일 가능성도 있다고 반박했다. 그는 “공소장은 대통령을 피의자로 보고 범죄 내용 중심에 대통령이 있다고 썼다. 대통령 입장을 변호하는 사람에게는 굉장히 악의적인 공소장으로 느껴질 수 있다”며 “공소장을 보면 전직 대통령의 재단 출연 내용과 방식이 고스란히 나온다. 다른 대통령도 벌였던 일인데 박근혜 대통령만 이렇게 몰아간다면 당연히 억울하게 느낄 수 있다”고 밝혔다.
또한 전 변호사는 “기업에서 걷은 돈 대부분이 남아 있고 횡령한 사실도 없으며 사유화되지도 않았다. 설령 최순실이 재단 이사진을 마음대로 정했더라도 ‘이는 대통령과 무관하다’고 주장하는 변호인의 입장도 이해해야 한다”며 “아직 핵심적인 세력 수사가 끝나지 않았다. 차은택과 우병우 등을 수사한 뒤에도 갈 길이 멀다. 법정에서 치열하게 공방이 펼쳐지겠지만 변호사 입장에서는 대통령을 ‘피의자‘이자 ’주범‘이라고 보이도록 판단한 검찰의 중간수사에 대해 불만을 표출할 수 있다”고 했다.
하지만 A 변호사는 조직폭력배 수사를 예로 들며 철저히 사실과 증거에 기반한 검찰의 판단이 옳다고 주장했다. 그는 “유영하 변호사는 ’직접 지시하고 강요한 사실이 없다‘고 했다. 대통령을 조직폭력배에 비교한다는 건 맞지 않겠지만 조직폭력배를 예로 들자면 실제 범죄 행위를 한 사람과 지시한 사람의 처벌 수위는 명백하게 다르다”고 잘라 말했다. 그는 “제일 앞에서 치고 받는 하수인은 칼로 찌르고 상처를 가하며 살해를 하는 등 범죄 사실이 뚜렷하다. 하지만 뒤에서 일을 사주한 사람의 범죄 행위는 전혀 보이지 않는다. 이런 상황에서 하수인이 가장 큰 죄다 말할 수 있는가”라며 반문했다.
이어 “법적 평가에서는 실제 행위를 한 사람보다 뒤에서 지시한 사람의 책임이 더 크다. 눈빛 하나가 칼로 찌르는 것보다 책임과 형벌이 더 무겁다”며 “안종범과 정호성이 실제 압력을 행사했지만 압박당한 사람 입장에서는 그 둘이 두려운 게 아니다. 대통령이 무서운 거다. 안종범의 수첩만 봐도 이 사안은 명백히 대통령을 중심으로 이뤄졌다. 이미경 CJ그룹 부회장도 사퇴 압박을 받았다. 이재용 삼성 부회장도 정몽구 현대기아차 회장도 마음만 먹으면 내려오게 할 수 있는 게 바로 대통령이다. 검찰은 ’내가 압력 받아서 그랬다‘고 말하는 사람이 없더라도 정상적인 절차가 생략됐으면 압력이 있었다고 판단한다. 법이라는 건 가치와 판단의 세계”라고 주장했다.
#검 “대통령 조사 거부는 해명기회 걷어찬 것” 변 “대통령의 공-사익 혼동에 국민은 분노”
A 변호사는 검찰이 청와대에 “조사하겠다”고 말한 의도는 실제 조사 의도가 아니라 대통령의 권위를 생각해 ’해명의 기회‘를 준 것이라고 했다. 그는 “박근혜 대통령을 부르는 건 범죄 소명 때문이 아니다. 대통령에게 점잖은 해명의 기회를 주려는 의도”라며 “본인 조사도 안 하고 검찰이 중간 수사결과를 발표하며 ‘사실이 뭔지 모르겠다’고 한 걸 본 적 있는가? 사초(고려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 작성된 국정 기록문서)에는 임금이 방귀 뀐 것까지도 적는데 안종범 수첩을 보면 사초나 다름 없다. 대통령이 재단 이름에 위치, 정관까지 지시했다. 이렇게 증거가 명백할 때는 당사자를 굳이 부르지 않아도 충분히 범죄가 소명된다”고 전했다.
이어 ”누가 뭐라고 해도 지금 상황에서는 세상이 모두 다 거부라고 받아들인다. 대통령이 대통령답게 나서야 할 시간“이라며 ”대통령이 변호사를 선임해서 진술 거부권과 증거 법칙, 변호인 조력 권리를 주장하면 온 국민의 가슴이 공허해진다. ’우리가 이렇게 허약한 사람을 리더로 선출했던가‘라며 자책하고 만다. 누구나 평등하다고 말하지만 대통령은 대통령이다. 일국을 이끄는 리더가 피고인임을 인정하고 변호사를 고용한다? 이거 말이 안 된다. 있는 대로 말해야 한다. 왜 굳이 검찰이 나서서 수사까지 하게 만드나. 깨끗이 사과하고 인정한 뒤 용서를 구하는 게 리더의 품격이자 자질“이라고 했다.
전원책 변호사는 ”대통령이기 전에 개인으로서의 권리 주장은 할 수 있다“고 말하면서도 대통령의 올바른 판단을 촉구했다. 그는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니다. 법률가의 시각에서는 변호인으로 선임되면 각종 기록과 자료를 검토할 시간이 있어야 하는 게 맞다. 대통령도 국민의 한 사람이다. 스스로를 변호할 권리가 있다“며 ”무조건 비난해서는 안 된다. 법이라는 게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적용되는 게 맞다”고 일렀다.
이어 “이제까지 밝혀진 금액이 총 1000억 원도 안 된다. 이전에 대통령 가족들 부패로 벌어진 사건과 비교하면 초라한 수준”이라며 “금액이 전보다 크지 않은데 국민이 왜 이렇게 분노하는가 대통령은 고민해봐야 한다. 우리가 모두 실망한 건 단순히 부패 탓이 아니라 민주주의 체계와 근간이 무너지고 민주주의 밖의 사람이 권력을 사유화했다는 사실 때문”이라고 말했다.
전 변호사는 또한 “민주주의의 의사결정은 주권자가 한다. 주권자 공동체의 대표가 대통령이다. 이 체계가 민주주의인데 우리가 선출하지 않은 사람의 의사결정이 정국을 좌지우지했다. 최순실이 단순히 연설문을 만지고 시민의 한 명으로서 의사를 전하기만 했다면 아무도 뭐라고 안 했을 거다. 하지만 인사와 정책, 예산에도 개입했다. 대통령이 공과 사, 공익과 사익을 구분하지 못했다. 최순실 일당이 공동선을 핑계로 야심을 드러낸 사적 이익을 대통령은 아직까지도 공적 이익과 혼동하고 있다. 국민은 이 사실에 분노한다”고 했다.
#검-변 한목소리 “분노 차올라도 법과 품격으로 대응하자”
검찰이 청와대와 각을 세우고 있다. A 변호사는 검찰이 날을 가는 상황이 올 거라 예상하는 동시에 국민이 거리로 뛰쳐나와 하야를 외치는 것을 경계했다. 그는 “검사들이 분기탱천했다고 한다. 신사적으로 가려 했는데 ’사상누각‘이니 ’소설 썼다‘고 하면 검찰들도 열 받는다. 피의자들의 통화 녹음 내역을 검찰이 가지고 있다. 수사가 확대된다면 검찰 쪽에서 이 사건을 특검으로 넘기기 전에 추가적인 수사 내용을 공개할 수도 있다고 본다. 10초만 들어봐도 촛불이 횃불 된다”며 “절대 하야하지 않을 것이다. 나라라는 건 법에 따라 움직인다. 100만 명이 거리로 뛰쳐나온다고 대통령이 내려오고 의사결정을 바꾼다면 도대체 왜 법이 필요한가?”라고 반문했다.
전원책 변호사는 상황 예측을 섣불리 할 수 없다면서도 A 변호사의 의견에 힘을 실으며 민주주의와 준법의 관계를 강조했다. 그는 “재판은 살아있는 생물과 같아서 쉽게 예측할 수 없다. 법률가 일부가 TV에 나와서 이렇다 저렇다 하는 게 전부 난센스다. 검찰의 기록을 보지 않은 채 왈가왈부하는 건 법률가로서 바른 행동이 아니다”라며 “대통령이 헌정을 유린했다면 처음부터 탄핵으로 가야 했다. 탄핵 소추에서 국회의원 200명이 동의하지 않더라도 상관없다. 동의했더라도 헌법재판소에서도 탄핵이 받아들여질 확률이 적다. 문제는 절차다. 정당한 방법으로 대통령을 끌어내릴 수 있는 절차를 밟는 게 헌정유린 대통령을 대하는 성숙한 국민의 자세”라고 말했다.
이어 전 변호사는 “탄핵 소추가 통과 못해도 절차를 밟는 게 바로 우리가 말하는 정당한 방법이다. 모든 방법이 실패하면 그때부터 하야를 논해야 한다. 헌법을 파괴했다고 헌법을 무시한 채 하야를 논하는 건 헌법 밖의 힘에 기대는 것이다. 그게 이 사태를 해결하는 국민의 자세라고 생각하지 않는다”고 전했다.
전원책 변호사는 미래의 대통령과 국민의 자세에 대한 이야기도 꺼냈다. 전 변호사는 “처벌이 능사가 아니다. 우리에게 남겨진 숙제는 대통령 처벌보다는 국격”이라며 “역사는 앞으로 진전해야 한다. 여론으로 재판하면 안 된다. 국가 원수를 봐줘야 한다는 건 아니지만 이 사건은 냉정하게 대하는 게 맞다. 문재인 전 대표가 ’질서 있는 퇴진과 함께 명예를 보장하겠다‘고 했는데 난 그런 태도가 우리나라 전체를 진일보시킨다고 믿는다”고 끝맺었다.
A 변호사와 전원책 변호사의 인터뷰는 각각 따로 만나서 총 6시간 가까이 진행됐다. 두 사람 다 이순이 넘는 나이에도 거침 없는 독설을 내뱉었다. 전원책 변호사는 목 통증 완화 약까지 먹어가며 인터뷰에 응했다.
인터뷰하는 가운데 시민의 한 사람으로서 분노를 배출하면서도 법률가의 이성을 놓지 않았던 그들은 성숙한 시민의 역할과 준법의 중요성을 끊임 없이 강조했다. 두 법률가는 하나같이 인터뷰를 마치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분노 표출이 마냥 좋은 게 아니다. 분노가 차오르더라도 우리는 민주주의라는 체계를 지탱해야 한다. 그 기초에는 법이 있고 그 외에 염두에 둘 것이 있다면 품격이다. 우리의 품격이 모이면 곧 국가의 품격이 된다. 품격을 갖출 때 우리는 참된 민주주의 시민으로 성장할 수 있다.”
최훈민 기자 jipchak@ilyo.co.kr
박근혜 대통령 처벌 가능성은? 공소시효 진행과 소급입법 여부가 관건 박근혜 대통령을 둘러싼 의혹과 함께 처벌 가능 여부도 초미의 관심사로 떠올랐다. 특히 향정신성 의약품 등 사용 여부와 함께 대통령 되기 전 의혹도 연일 언론 보도의 초점이 됐다. 향정신성 의약품의 경우 소지하거나 소유, 사용하며 관리한 사람은 1년 이상 징역에 공소시효만 7년이다. 공소시효는 원론적으로 중단 혹은 중지되지 않는다. 대통령의 경우 소추받지 않는 특권을 지니기에 대통령 재임 기간 5년 사이 공소시효가 만료되면 처벌이 불가하다. 이는 헌법 원칙 가운데 소급입법 금지에 따른다. 소급입법 금지는 공소시효가 끝날 경우 피의자의 범죄 사실을 소급 적용해 처벌할 수 없도록 규정한다. 하지만 지난 1995년 12월 21일 5·18 특별법이 시행되며 공소시효가 무의미해진 바 있다. 전두환과 노태우 전 대통령을 처벌하려 대통령 재임 기간과 무관하게 공소시효를 소급입법 적용해버렸기 때문이다. 이와 관련 전원책 변호사는 “5·18 특별법은 헌법의 원칙을 거스르는 법이다. 이런 예외가 생겨난 탓에 박근혜 대통령도 임기를 마치고 어떻게 될지는 지켜봐야 할 일”이라는 한편 “국가의 품격을 생각해서 자꾸 대통령 처벌을 가지고 논하기보다는 국정을 정상화시키는 게 선행돼야 한다”고 말했다. [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