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태민 목사. 연합뉴스
그 과정에서 ‘최태민 관련 자료’가 세상 밖으로 나오게 된다. 이른바 ‘최태민 중정보고서’다. 이 자료는 1979년 10월 23일 김재규 전 중앙정보부장이 박정희 전 대통령에게 직접 올린 것으로 전해진다. 이영도 박정희 숭모회 회장도 김 부장으로부터 직접 자료를 받았는데 이를 <일요신문>에 공개했다.
여기엔 최 목사의 행적을 비롯해 비위 내용, 여자관계 등이 시간 순서에 따라 구체적으로 나열돼 있다. 황해군 봉산군 출신인 최 목사는 애초 최도원이라는 이름을 가졌으나 이후 최상훈, 최봉수, 최퇴운, 공해남, 방민, 최태민 등 7개의 이름을 사용하며 개명까지 했다. 최 목사의 딸 최순실씨와 손녀 정유연 씨 역시 각각 최서원과 정유라로 이름을 바꿨다.
최 목사는 일제 강점기 때 경찰로 근무한 경력이 있다. 1942년부터 3년간 황해도경 고등과장 추천으로 황해도경 순사로 근무하다가 1945년 9월 월남해 1946년엔 강원도경 경찰, 대전경찰서 경사, 인천경찰서 경위 등을 거쳤다. 1949년엔 육군 제1사단 헌병대 비공식 문관을 이듬해엔 해병대 비공식 문관을 지냈다.
최 목사는 1951년 사단법인 대한비누공업협회 이사장을 지내다가 1954년 여섯 번째 부인과 가정불화로 집을 나온 뒤 ‘최퇴운’이란 이름으로 삭발 승려가 된다. 이듬해인 1955년 다섯 번째 부인 임선이 씨(최순실 씨 모친)와 재결합해 비인가 학교의 장을 맡는다. 그 후 대한농민회 조사부 차장, 국민회 경남도본부 사업부장, 전국불교청년회 부회장 등을 맡다가 1963년 당시 집권 여당이었던 공화당의 중앙위원에 선임됐다. 최 목사는 1965년 2월 서울지검에서 ‘유가증권 위조혐의’로 입건되자 약 4년간 도피 생활을 하기도 했다.
1971년부터 최 목사는 불교, 기독교, 천도교를 결합한 ‘영혼합일법(일종의 최면술)’을 주장하며 ‘영세교’ 종교 활동을 본격화했다. 박 대통령과 최 목사의 인연은 1975년에 시작된다. 1975년 2월 말경 최 목사는 박근혜 대통령에게 “3차례에 걸쳐 꿈에 육영수 여사가 나타나 근혜를 도와주라”는 현몽(죽은 사람이 꿈에 나타남)이 있었다는 내용의 서신을 발송했다. 박 대통령을 만난 최 목사는 대한구국선교회(이후 구국봉사단, 새마음봉사단으로 개칭)를 설립해 총재로 취임한다.
중정보고서엔 최 목사가 박 대통령을 앞세워 이권 개입 및 불투명한 거액 금품 징수 등을 했다고 나와 있다. 보고서에 따르면 최 목사는 기업인을 구국봉사단 운영위원으로 위촉해 1인당 2000만 원에서 5000만 원의 입단 찬조비와 월 200만 원의 운영비를 받아 자금을 마련했다. 봉사단을 활용해 재산을 은닉한 의혹도 적혀 있다. 최 목사는 봉사단 공금에서 자녀 등록금 명목으로 200만 원에서 1000만 원까지 지출했다.
특히 보고서엔 최 목사의 여자관계에 대한 의혹이 적나라하게 드러나 있어 관심을 모은다. 여성의 이름, 나이, 직업 등과 함께 성행위한 날짜나 기간, 자세한 내용이 적혀 있다. 자료에 나온 여성은 총 12명으로 연령은 20대부터 50대 초반까지 다양했다. 유부녀도 포함돼 있었다.
‘김 아무개 씨(27세, 전 총재 비서) 1972년 12월 하순~1976년 4월 초순 영등포 여관 등에서 10회 성교’ ‘지 아무개 씨(40세, 전 병원 간호과장) 1976년 3월 26일 영등포 호텔 302호에서 4회에 걸쳐 키스, 포옹하고 음경을 빨게 하는 등 음란 행위’라는 식으로 적시돼 있었다. 당시 고령이었던 최 목사는 성교가 쉽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전 국회의원 A 씨도 눈에 띄었다. 자료에 따르면 ‘A 씨(43, 전 사무총장) 국회의원 공천, 박근혜 총재에게 간청 공천 따냄. 남편 장 아무개 씨가 한 대학 운영자임을 기화로 접근. 상당한 액수의 돈을 최태민에게 바쳤다고 함. 총재실 또는 지방 출장 중 호텔 등에서 통정설’이라고 나와 있다.
최 목사 일가에 대해서 잘 알고 있는 이영도 박정희 숭모회 회장은 “목사라고 부르지 말라. 이완용에게 ‘이완용 씨’라고 존칭을 붙여 부르지 않지 않냐. 최태민은 여자라면 사족을 못 쓴다”라고 말했다.
김재규 전 중앙정보부장이 박정희 전 대통령에서 올린 ‘최태민 보고서’ 사본. 일요신문이 입수한 이 보고서에는 최태민의 비위 내용, 복잡한 여자관계 등이 시간 순서에 따라 구체적으로 묘사돼 있다.
중앙보고서를 본 박정희 전 대통령은 직접 최태민과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을 한 자리에 불러 ‘친국(임금이 중죄인을 몸소 신문하던 일)’을 했다. 그러나 당시 박 대통령이 최 목사 결백을 주장해, 박정희 전 대통령은 신문을 중단하고 오히려 중앙보고서를 묵살한 것으로 전해진다.
1990년 박 대통령의 동생 박근령 씨와 박지만 EG 회장은 노태우 대통령에게 탄원서를 보내 “누나(언니)가 최태민에게 속고 있으니 구해 달라”고 호소하기도 했다. 동생들의 걱정과 달리 최 목사 망령은 아직까지 박 대통령의 주변을 맴돌고 있다. 다음은 <동아일보>가 1990년 10월 26일 보도한 박정희 정부 시절 청와대 비서실장 김계원 씨의 현장 목격담 가운데 일부다.
“(박정희 대통령이) 김재규에게 봉사단 관련 조사를 지시한 뒤 보고를 받는 자리에 근혜 양을 불러 봉사단 활동을 그만하고 시집을 가라고 했으나 근혜 양은 결혼을 안 하겠다고 했어요. 이렇게 되자 각하는 봉사단 일을 맡아보던 최태민까지 불러 문초를 하면서 봉사활동에서 손을 떼고 청와대에는 얼씬도 못하도록 엄명을 내렸습니다. 그러나 얼마 뒤에 보면 최 목사가 또 청와대를 들락날락해요.”
김경민 기자 mercury@ilyo.co.kr
10·26사건도 최태민 때문? 김재규 항소이유서 살펴 보니… 정치권 일각에선 중앙정보부가 작성했다는 ‘최태민 보고서’의 실체에 대해서 그 신빙성에 의문을 나타내는 이들이 적지 않다. 중앙정보부 후신인 국정원 또한 자료에 대해선 “모르겠다”고 밝히고 있다. 그러나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은 재판 과정에서 10·26사건의 중요한 동기로 최태민 목사를 꼽고 있다. 김 부장은 ‘항소이유서’에서 ‘1975년 5월 구국여성봉사단 총재로 있는 최태민이란 자가 사이비 목사이며 자칭 태자마마라고 하고 사기횡령 등의 비위 사실이 있는 데다 여자들과의 추문도 있는 것을 알게 됐다. 이런 일을 아무도 문제 삼는 사람이 없어서 박정희 대통령에게 보고했더니 박 대통령은 정보부에서 그런 것까지 하냐면서 반문하기에 대통령의 태도를 보고 놀랐다. 큰 영애도 구국여성봉사단에서 손떼는 게 좋다. 회계 장부도 똑똑히 하게 해야 한다란 본인의 건의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다음은 1980년 1월 28일 김 부장 측이 제출한 ‘항소이유보충서’ 가운데 ‘10·26혁명의 동기의 보충’ 일부다. ‘구국여성봉사단이라는 단체는 총재에 최태민, 명예총재에 박근혜 양이었는 바, 이 단체가 얼마나 많은 부정을 저질러 왔고 따라서 국민 특히 여성단체들의 원성의 대상이 되어 왔는지 잘 알려져 있지 아니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큰 영애가 관여하고 있다는 한 가지 이유 때문에 아무도 문제 삼는 사람이 없었고 심지어 민정수석 박승규 비서관조차도 말도 못 꺼내고 중정부장인 본인에게 호소할 정도였습니다. 본인은 백광현, 당시 안전국장을 시켜 상세한 조사를 시킨 뒤 그 결과를 대통령에게 보고하였던 것이나 박 대통령은 근혜 양의 말과 다른 이 보고를 믿지 않고 직접 친국까지 시행하였고, 그 결과 최태민의 부정행위를 정확하게 파악하였으면서도 근혜 양을 그 단체에서 손떼게 하기는커녕 오히려 근혜 양을 총재로 하고, 최태민을 명예총재로 올려놓아 결과적으로 개악을 시킨 일이 있었습니다. 중정에서 한 조사 보고서는 현재까지 안전국(6국)에 보관돼 있을 것입니다.’ [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