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경환 전 부총리가 미르·K스포츠재단 모금 과정에 관여했다는 의혹이 제기됐다. 박은숙 기자.
당시 임내현 의원이 ‘황 총리에게 수사 관련 압력을 넣었다’며 언급한 ‘정부 고위직 인사’는 최경환 전 경제부총리다. 익명을 요구한 정치권 관계자는 “철피아 수사 과정에서 현역 광역자치단체장 등 친박계 핵심 인사들이 금품을 받았다는 구체적인 진술을 검찰이 확보했고 내사를 벌였지만 수사로 이어지진 못했다”며 “이를 임내현 의원이 내부 확인하자 검찰 수뇌부가 발칵 뒤집혔다”고 말했다.
최 전 부총리는 박근혜정부 들어 김기춘 전 청와대 비서실장과 함께 ‘살아 있는 권력’으로 불렸다. 대구고·연세대·기획재정부를 축으로 한 ‘최경환 사단’은 정·관계는 물론 재계까지 포진해 있다. 대한민국 경제를 컨트롤한 수장이자 친박계 좌장으로서 최 전 부총리는 입법·행정·사법 영역에까지 그 영향력을 미쳤다. 야당 소속 한 정치권 인사는 “지금도 정부 곳곳에 ‘최경환 인맥’이 건재하다”라고 털어놨다.
최 전 부총리는 ‘최순실 게이트’의 태풍에서 한 발 비껴 서 있다. 그를 둘러싼 여러 의혹에도 불구하고 검찰은 최 전 부총리의 소환을 검토하지 않고 있다. 지난 11월 2일 김영주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최 전 부총리가 미르·K스포츠재단 모금 과정에 관여했다는 의혹을 제기했다.
김영주 의원실의 설명과 검찰의 최순실 씨에 대한 공소장 내용 등을 종합하면 박근혜 대통령은 2015년 7월 24일 청와대에서 열린 ‘창조경제혁신센터 전담기업 회장단 초청 오찬 간담회’ 직후 현대자동차·CJ·SK 회장단을 면담하고, 다음 날에는 삼성·LG·한화·한진의 총수들을 각각 독대했다.
미르재단 모금을 주도한 혐의를 받고 있는 안종범 전 청와대 정책수석 비서관은 최경환 전 부총리와 사실상 ‘한몸’으로 통하고 있다. 지난 11월 2일 안 전 비서관이 서울중앙지검에 출석하고 있다. 최준필 기자
또 대통령 독대 여부는 확인되지 않았지만 청와대 오찬 간담회에 각각 전경련 회장, 대한상의 회장 자격으로 참석한 GS, 두산은 위 7개 기업과 함께 미르재단 초기 출연 기업으로 선정됐다. 안종범 전 청와대 정책조정수석은 미르재단 설립과 관련해 최 전 부총리의 행시 후배이기도 한 최상목 기획재정부 1차관(당시 청와대 경제금융비서관)에게 모금을 지시하면서 출연 기업으로 삼성, 현대차, SK, LG, GS, 한화, 한진, 두산, CJ를 지목했다. 즉 간담회에 참석한 9개 그룹 모두 청와대로부터 모금을 종용받은 것이다.
대통령이 주재한 7월 24일 간담회에는 최 전 부총리가 참석했다. 김영주 의원실 관계자는 “당시 헤드테이블에 박 대통령과 모금에 동참한 대기업 총수들이 있었고, 정부 각료 가운데는 최 전 부총리만 유일하게 동석했다”고 상황을 설명했다. 이에 대해 최경환 의원실은 보도자료를 내고 “허위 발언에 대해 정정보도 요청과 함께 공개사과를 요구한다”고 했지만 실제 정정보도 요청은 이뤄지지 않았다.
미르재단 모금을 주도한 혐의를 받고 있는 안 전 수석은 ‘최경환 사단’의 핵심 인물로 꼽힌다. 여당 한 관계자는 “둘은 사석에서 호형호제할 정도로 가까운 사이며, 사실상 ‘한몸’”이라고 말했다. 또 다른 관계자는 “안 전 수석이 체포됐을 때 (모금의 배후로) 대통령을 언급해 놀랐다”며 “안 전 수석은 소심한 사람이다. ‘믿을 만한 사람’의 지시가 없으면 움직일 성격이 아니다”라고 했다.
최근 안 전 수석은 지난해 7월 삼성물산과 제일모직의 합병과 관련해 국민연금공단(국민연금)의 의결 과정에 개입했다는 의혹에 휩싸였다. “사실무근”이란 청와대 해명에도 불구하고 합병 전 안 전 수석이 장충기 삼성 미래전략실 차장(사장)과 수차례 접촉했다는 의혹이 추가되면서 청와대의 합병 개입 여부가 주목되는 상황이다.
<일요신문>이 심상정 정의당 의원실로부터 받은 ‘국민연금 기금운용본부 투자위원회 회의록’을 보면 당시 국민연금은 통합 삼성물산이 삼성의 새 지주사가 될 것임을 인지하고 있었다. 관련 브리핑을 주도한 채준규 국민연금 리서치팀장은 향후 합병회사의 사업 시너지 등을 긍정적으로 평가하며 사실상 ‘찬성’ 쪽으로 여론을 움직였다. 이는 2014년 11월 국민연금이 삼성중공업과 삼성엔지니어링의 합병에 대해 주식매수청구권을 신청하는 등 부정적인 전망을 내놓았던 것과 대비되는 대목이다.
특히 국민연금 기금 관리의 총책임자인 홍완선 전 국민연금 기금운용본부장은 적극적인 ‘찬성’ 의견을 개진했다. 앞서 홍 전 본부장은 삼성물산 합병 회의 3일 전인 7월 7일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과 만난 것으로 알려졌다. 당시 홍 전 본부장은 삼성물산 합병 비율이 국민연금에 불리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합병에 거부권을 행사하지 않았다.
삼성 측이 검찰 조사를 받으면서 재단 출연과 관련해 ‘최경환 전 부총리의 연락을 받았다’는 진술을 했다는 말이 나오고 있다. 서초동 삼성전자 사옥. 임준선 기자
공교롭게도 문 이사장, 홍 전 본부장은 각각 ‘최경환 사단’으로 꼽힌다. 문 이사장은 최 전 부총리의 연대 경제학과 1년 후배며, 홍 전 본부장은 대구고 동기이자 ‘절친’으로 알려졌다. 또 최 전 부총리의 아들은 삼성전자에 입사해 ‘특혜 논란’을 일으킨 바 있다.
이와 관련, 복수의 대기업 관계자는 “삼성 측이 이번 검찰 조사를 받으면서 재단 출연 등과 관련해 ‘(최순실이 아닌) 최 전 부총리의 연락을 받았다’는 취지로 진술했다는 말이 있다”고 전했다. 이에 대해 삼성 측은 “수사가 진행 중인 사안에 대해선 답할 수 없다”는 입장을 밝혔다.
면세점 로비 의혹 등으로 검찰 수사를 받고 있는 롯데는 일찍부터 최 전 부총리와 유착설이 제기됐다. 최 전 부총리와 롯데그룹 실세로 꼽히는 소진세 대외협력단장은 대구고 동문이다. 특히 이들은 대구고 동문 내 ‘아너스클럽’에서 활동하며 친분을 쌓아온 것으로 전해진다. 롯데 관계자는 “예전에는 가까웠을지 모르지만 최근에는 서로 바빠 자주 만나지 않은 것으로 알고 있다. (유착설 등은) 전혀 사실이 아니다”라고 해명했다.
그렇지만 지난해 롯데가 면세점 입찰을 앞두고 최 전 부총리와 접촉했다는 보도가 나오는 등 여론의 의심은 쉬이 가라앉지 않는 분위기다. 최 전 부총리 측은 “명백한 허위 사실”이라고 밝히고 있다.
그간 최 전 부총리의 ‘그림자’가 드리웠던 대형 수사는 그 매듭을 짓지 못한 경우가 많았다. 앞서 언급한 철피아 수사 때는 최 전 부총리의 대구고 동문인 김광재 한국철도시설공단 이사장이 목숨을 잃었으며, 최 전 부총리와 고향(경북 경산) 선후배 사이인 이인원 롯데그룹 부회장도 그룹 수사 과정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그렇지만 이번만큼은 국민적 시선이 쏠려 있어 그 결과가 다를 것이란 의견도 나온다. 검찰 관계자는 조심스레 “청와대가 수사의 최종 종착지이니만큼 향후 특검이 개시된다면 정권 실세였던 최 전 부총리와 관련한 의혹들도 들여다 볼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최순실 게이트를 수사하는 박영수 특별검사는 <일요신문>과의 통화에서 “만약 의혹이 있다면 누구라도 수사할 것”이란 입장을 전했다.
강현석 기자 angeli@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