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대 꽃다운 나이의 여성을 둔기로 무참히 살해한 20대 남성은 그녀를 ‘전 여자친구’라고 말했다. 죽은 사람은 말이 없지만, 그녀의 지인들은 입을 모아 “남자친구가 아니었다”고 맞섰다. 경찰이 발표한 남성과 숨진 여성의 관계는 지난해 잠시 동안 연인 관계로 지내다가 헤어진 ‘남남’이었다. 남성은 여성에게 다시 만나달라고 요구했지만 거절당하자 앙심을 품고 살인에 이르게 된 것이 현재까지 밝혀진 사건의 전말이다. 이에 따라 매스컴 역시 경찰이 발표한 남성의 진술에 맟춰 ‘전 애인 사이’에 초점을 두고 사건을 보도했다. 그럼에도 고인의 지인들은 하나같이 “애인 사이가 아닌 스토커였다”고 항변하고 있다.
이 씨는 세상모르고 잠든 A 씨의 얼굴과 머리 부위를 둔기로 수차례 내려쳐 살해했다. 소리를 듣고 깨어난 A 씨의 룸메이트 B 씨(여·27)에게도 흉기를 휘둘러 이마와 팔 부위에 부상을 입혔다. 재빨리 방 밖으로 빠져나간 B 씨가 경찰에 신고한 뒤 출동한 경찰에 의해 이 씨는 현행범으로 붙잡혔다.
이 씨는 경찰 조사에서 일관되게 “사귀던 사이였고, 헤어진 뒤에 만나자고 요구했지만 거절당해 화가 났었다”고 진술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 씨는 A 씨의 직장 동료였고, 사귀던 중에 몰래 알게 된 기숙사 현관 비밀번호를 이용해 손쉽게 방 안으로 침입할 수 있었다고도 진술했다.
당시 경찰로부터 사건을 전달받은 매스컴은 이 씨의 진술을 그대로 인용해 이들의 사이를 ‘전 애인 관계’로 보도했다. 그러자 일부 유족과 A 씨의 지인들이 “애인이 아닌 스토커”라며 크게 반발했다. 한 지인은 “이미 헤어진 지 오래됐었고 이후 이 씨가 심하게 집착하면서 (A 씨가) 많이 시달려 온 것으로 알고 있다”라며 “그들의 관계는 이미 ‘전 애인 관계’도 지나간 지 오래고 이제는 스토킹 범죄자와 피해자로 봐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처럼 연인 관계가 해소된 뒤에도 피해 여성에게 비정상적으로 집착해 끝내 살인에 이르는 범행에 대해서 ‘스토킹 범죄’가 아닌 ‘연인 간 치정 싸움’으로 이름 붙여지는 경우가 많다. 지난 4월 ‘송파 이별 살인사건’으로 이름 붙여진 서울 송파구 30대 여성 살인사건에서도 피의자인 한 아무개 씨(31)와 숨진 여성(31)은 이미 사건 한 달 전에 헤어진 사이였지만 한 씨는 이별을 인정할 수 없다며 일방적으로 여성을 괴롭혔다. 여성의 집과 직장 근처를 맴돌며 감시하는가 하면 빌려준 돈을 갚겠다고 불러낸 뒤 “예전에 사귀다 헤어진 여자친구는 다리를 부러뜨렸다. 죽든지 나를 다시 만나든지 선택하라”며 협박하기도 했다.
끝까지 이별을 인정하지 않고 여성을 살해한 뒤 도주한 한 씨는 경찰에 검거된 뒤에도 “스토킹을 한 사실이 없다. 관계 회복을 위한 것이었다” “돈이 없다는 이유로 여자친구가 헤어지자고 요구해서 그런(살해한) 것”이라며 책임을 숨진 여성에게 전가하는 발언을 하기도 했다.
앞선 이 씨 역시 전 여자친구였던 A 씨가 자신과 헤어지자고 했기 때문에 범행에 이른 것이라는 얘기가 자칫 범행의 책임을 A 씨에게 전가하는 듯한 측면이 있다. 이별 이후의 자신의 행동에 대해 사회적 통념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이상행동’으로 판단하기보다는 여성이 자신의 요구를 들어주지 않았기 때문에 발생한 우발적 행동으로 주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전 애인에게 스토킹 끝에 살해 또는 폭행당한 피해 여성들의 유족과 친인척들은 “이미 완전히 해소된 관계라면 사건 수사나 언론 보도에 이를 반드시 명시해야 한다”라며 “그렇지 않으면 ‘전 애인 관계’라는 말이 꼬리표처럼 붙어 강력 사건임에도 불구하고 마치 남녀 사이에서 충분히 발생할 수 있는 해프닝처럼 의미가 축소돼 버린다”라고 지적했다. 특히 피해 여성 측이 이별을 요구한 것이라면 오히려 “남성에게 이별을 충분히 이해시키고 배려한 뒤에 요구했어야 했다”라며 여성에게 책임을 전가하는 경우가 많아 피해자들을 두 번 울리고 있다는 것이 이들의 주장이다.
한편 이처럼 스토킹 범죄에 대한 이해도가 떨어지는 것에는 범죄를 축소시키는 경찰의 책임도 큰 것으로 나타났다. 한국여성의전화가 조사한 2016 데이트폭력피해 실태 조사 결과에 따르면 이별을 요구한 뒤 폭력이나 스토킹 범죄를 당한 피해 여성 가운데 53.3%가 ‘경찰이 사소한 일로 취급했다’는 응답이 하기도 했다. 심지어 피해 여성들은 경찰로부터 “헤어지자고 한 당신 잘못이 크다. 한 달 이상 다시 사귀면서 천천히 헤어져줘야 한다” “최대한이 스토커법이니까 경범죄 처리하려면 해라. 대신 내가 (가해 남성에게) 전화 걸어주겠다” 등의 답변까지 들었다고 한다.
김태원 기자 deja@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