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어디서나 요구된다는 창의성에 대한 질문을 시작으로 죽음과 행복, 사랑과 이기심 등 인간의 삶의 여정에서 중요한 주제를 다루고 있었으나, 무엇보다도 ‘위대한 질문’이 없었다.
무엇이 위대한 질문일 것인가. 위대한 질문이 따로 있는 것인가. 그 기획이 성공했다고 볼 수 없는 이유는 특별히 위대한 질문이 따로 있다고 믿어 ‘위대한’ 질문을 뽑으려 한 데 문제가 있다고 생각한다. 예를 들면 “인간은 특별한 존재인가”라는 물음을 던져놓고 인간이 특별하다고 믿는 패널과 그렇지 않다고 믿는 패널을 불러 토론을 펼쳤다. 그것이 어떻게 위대한 질문일 수 있는가.
철학적으로 이미 답이 주어져 있는 물음은 물음의 형식을 취했어도 물음이 아니다. 그것은 질문의 형식을 빌린 주장들이고, 특정한 논리로 무장한 주장들의 충돌일 뿐이다. 그러니까 인간 탐구가 정보의 나열이 되고 ‘인간 탐구, 위대한 질문’이라는 위대한 기획이 공허해지는 것이다.
하나의 사태를 설명하는 논리는 논리적으로 무한하다. 자기 생각을 전할 때 논리는 유용한 수단이지만 진짜 위대한 질문은 논리 너머 삶에서 온다. 위대한 질문이 따로 있지 않다. 삶을 내게 던진 물음, 운명이 내게 던진 화두가 나를 바꾸는 위대한 질문이다. 정보를 나열하고 나열된 정보를 외우게 하는 질문은 가짜 질문이다. 진짜 질문은 우리를 사유하게 하고 행동하게 한다.
라디오를 듣는데 진행자가 편지 한 장을 읽어준다. 중3학생의 상담편지였다. 자기는 대학 가기 위해 매일 밤 10시까지 공부해야 하는 인문계 고등학교에 가기 싫단다. 실업계 고등학교를 가서 자동차 정비 기술을 배우고자 하는데 자기 생각을 관철하려 하면 아마 엄마가 용돈도 끊고, 밥도 해주지 않을 것 같단다. 지금도 엄마는 방학 때 다닐 국영수 학원을 알아보고 있는데 지옥이 따로 없다는 것이다. 이해되지 않는가. 그 학생이 품은 질문, 왜 대학엘 가야 하는가? 나는 그것이 엄마의 세상과 대립하여 그의 의지를 세우는 위대한 질문이라고 생각한다.
위대한 질문은 위대한 삶에서 나온다. 위대한 삶은 성공한 삶이 아니라 운명이 내게 던진 질문들을 품고 그 질문의 힘으로 세상을 견디며 자기 의지를 세우는 그런 삶이다.
이주향 수원대 교수
※본 칼럼은 일요신문 편집방향과 다를 수도 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