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 6일 최순실 국정농단 청문회에 재벌 총수 9명이 증인으로 출석했다. 사진공동취재단
12월 6일 아침 국회 본관에 대기업 회장들이 속속 모습을 드러냈다. 현장엔 국회, 기업 직원들, 취재진, 시민단체 인사들이 몰려 북새통을 이뤘다. 이들은 차에서 내리자마자 별다른 발언 없이 바로 본회의장으로 들어갔다. 다만, 김승연 한화그룹 회장은 “기업 입장을 알리는 좋은 기회”라고 말했다. 반도체 노동자 인권단체 ‘반올림’ 관계자들은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이 들어서자 “이재용 구속”을 외치기도 했다.
산만한 분위기 속에 청문회가 오전 10시 시작됐다. 미르·K스포츠재단 출연에 외압이 있었는지, 또 대가를 바라지는 않았는지에 초점이 맞춰졌다. 야당 의원들은 총공세를 펼쳤지만 총수들은 “청와대 요청이 있었고 대가성은 없었다”는 취지의 발언을 되풀이했다. 난감한 질문엔 ‘모르쇠’로 일관했다.
청문회에서 이 부회장은 최순실 씨 일가 지원에 대해 “모르겠다”며 대답을 회피해 빈축을 샀다. 이에 안민석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이 부회장을 향해 “50세도 안 된 분이 동문서답하는 게 버릇이냐”며 면박을 주기도 했다. 이 부회장은 삼성물산과 제일모직 합병 당시 국민연금과 사전 공모했다는 의혹에 대해선 “양사 합병은 경영권 승계와 관계가 없다. 삼성 계열사들은 국민연금으로부터 가장 큰 투자를 받고 있고 국민연금도 이를 통해 제일 높은 수익을 올린 것으로 알고 있다”고 반박했다.
이와 관련해 주진형 전 한화투자증권 대표의 소신 발언이 화제가 됐다. 삼성물산과 제일모직 합병 당시 한화투자증권은 국내 증권사 가운데 유일하게 합병에 반대하는 보고서를 냈다. 주 전 대표는 “국내 재벌의 운영은 조직폭력배들과 똑같다. 삼성물산 합병에 대해 증권사들이 입을 다무는 것을 보고 한국인으로서 창피했다. 기업 가치 얘기하시는데 이분들은 기업 가치보다 지분과 세습에 관심이 있다”며 직격탄을 날렸다.
손경식 CJ그룹 회장은 ‘모르쇠’ 태도로 일관한 다른 총수들과 달리 ‘청와대 압박설’에 대해 일부 시인했다. 손 회장은 “조원동 전 수석이 이미경 부회장이 자리를 비켜줬으면 좋겠다고 말했고, 대통령의 말이라고 전했다. 나도 의아했고 이 부회장도 대통령이 그럴 리가 없다고 해서 다시 전화를 걸었다”고 증언했다. 조양호 한진그룹 회장 역시 최 씨 측근 인사 청탁이 있었음을 시인하고 평창동계올림픽 조직위원장 사퇴에 청와대의 압력이 있었다고 했다.
청문회장엔 한바탕 웃음이 터지기도 했다. 안 의원이 “여기 계신 증인들 중 촛불집회에 나가본 분 손을 들어 달라”고 묻자 참고인으로 참석한 이승철 전경련 상근부회장이 조심스레 손을 들었다. 이에 안 의원은 “당신은 재벌이 아니잖아”라고 소리쳤다.
재벌 회장들이 ‘눈치’를 보는 모습도 눈에 띄었다. 전경련에 관한 질의가 쏟아지자 안 의원은 “전경련 해체 반대하는 분은 손을 들어 달라”고 요청했다. 약간의 정적이 흐른 뒤 신동빈 롯데그룹 회장이 먼저 손을 들었다. 뒤이어 허창수 GS그룹 회장, 정몽구 현대자동차그룹 회장, 구본무 LG그룹 회장, 김승연 회장, 조양호 회장, 6명이 손을 들었다. 이 부회장을 포함해 정몽구 구본무 회장, 최태원 SK 회장은 전경련 탈퇴 의사를 밝히기도 했다. 구 회장은 “전경련은 헤리티지재단처럼 운영하고 친목단체로 남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한편, 청문회장이 위치한 국회 본관 2층은 취재진들로 인산인해였다. 기자들은 청문회장 근처에 자리를 잡고 휴대전화로 청문회를 지켜봤다. 본관에 위치한 대부분 사무실에서도 TV 볼륨을 한껏 높이고 청문회 방송을 시청하는 모습이었다. 야당 측 보좌진은 방송을 보면서 “(총수들) 나름대로 답변을 다 준비해왔다. 저 사람들이 살면서 언제 혼나봤겠냐. 저 정도면 잘 참으면서 대응하고 있는 것”이라고 평하기도 했다.
퇴근 시간인 6시 무렵엔 인파가 갑자기 몰리면서 다소 어수선한 분위기가 연출됐다. 본관 1층 TV 앞에서 일반 방문객들이 청문회를 시청하는 모습도 눈에 띄었다. 청문회를 시청하고 있던 한 시민은 “했던 얘기 또 하고 또 하고…뭐하느냐”며 불만을 표출했다. 여기저기서 한숨 소리가 터져 나왔다.
본관과 달리 의원회관은 한산한 모습이었다. 한 여당 의원실에선 청문회 생중계 방송 대신 박 대통령의 거취 문제에 대한 뉴스를 시청하고 있었다. 박 대통령이 이정현 새누리당 대표와 정진석 원내대표를 만나 “국회가 탄핵을 추진해 가결하면 헌재 결정이 나올 때까지 지켜보겠다”는 의사를 표명했다는 내용이었다.
청문회가 진행되는 동안 본관 주변 곳곳에서 야3당은 박 대통령의 탄핵을 촉구하는 시위를 벌였다. 국민의당은 ‘박근혜 대통령 탄핵을 위한 국민의당 촛불집회’를 열었다. 김동철 비대위원장, 박지원 원내대표를 필두로 국민의당 보좌진까지 합류해 촛불을 밝혔다. 이들은 국회 본관을 돌며 “박근혜 탄핵”을 외쳤다.
민주당과 정의당도 마찬가지였다. 민주당은 오후 6시 무렵 본청 앞 계단에서 탄핵 촛불집회를 열었다. 정의당도 같은 시간 국회 정문 앞에서 촛불집회를 진행했다. 추미애 민주당 대표는 “민주당은 대한민국의 양심 세력과 함께 야권 공조를 튼튼히 하여 반드시 탄핵을 가결시키겠다. 의연하고 당당하게 꿋꿋하게 해내겠다”고 밝혔다.
보수단체인 박사모의 박 대통령 탄핵 반대 시위 움직임도 보였다. 박사모는 이날 오후 새누리당사 앞에서 박 대통령 탄핵 반대를 주장했다. 박사모 관계자는 “아직 법적으로 잘잘못이 가려지지 않았는데 어떻게 한 나라의 대통령을 가지고 이럴 수가 있냐”고 했다.
전계완 정치평론가는 “이번 1차 청문회는 정경유착의 고리가 여전히 살아있다는 것을 확인시켜줬다. 재벌 승계자들이 나왔는데도 불구하고 실제로 기업 경영자로서 보여줘야 할 리더십이나 도덕성은 선대와 달라진 게 없다. 세대를 뛰어 넘는 기업 경영을 하고 있지만 태도는 시대 변화에 부응하지 못하고 있다. 특히 국정 운영자나 기업의 의지와 도덕성을 강요하는 방식으론 정경 유착 문제를 풀어나갈 수 없다. 전경련 해체 문제를 포함해 이제는 국민들이 합의하는 사회적 제도를 통해서 통제를 해야 하고 권한과 책임을 나눠야 할 것이다”라고 했다.
김경민 기자 mercury@ilyo.co.kr
정몽구 손경식 맨끝자리 배치 이유는? 청문회 전부터 총수들의 자리 배치는 초미의 관심사였다. 기업들은 청문회가 TV로 생중계되는 만큼 얼굴 노출이 적은 자리를 선호했다는 후문이다. 앞줄엔 왼쪽부터 손경식 CJ그룹 회장, 구본무 LG그룹 회장, 김승연 한화그룹 회장, 최태원 SK 회장, 이재용 삼성그룹 부회장, 신동빈 롯데그룹 회장, 조양호 한진그룹 회장, 정몽구 현대자동차그룹 회장 순으로 자리가 배치됐다. 뒷줄 증인석에는 최광 전 국민연금 이사장과 김신 삼성물산 사장, 김종중 삼성전자 미래전략실 전략팀장, 홍완선 전 국민연금 기금운용본부장, 이승철 전경련 부회장, 허창수 전경련 회장 등이 배치됐다. 방청석에는 이인용 삼성전자 사장과 정진행 현대차 사장 등 기업 관계자들이 자리를 잡았다. 최 회장, 이 부회장, 신 회장이 중앙에 배치된 이유에 대해서 일각에선 최근 야당이 발의한 박 대통령 탄핵소추안에서 이 기업들이 특정범죄가중처벌 등에 관한 법률상 뇌물죄가 적용된 데 따른 것으로 풀이했다. 또 가장 어린 이 부회장(48)을 중심으로 연장자 순으로 자리를 배치했다는 추측도 있다. 증인 가운데 가장 고령인 정 회장(78)과 손 회장(77)은 증인석 양쪽 맨 끝에 자리했다. 정 회장 옆 보조석엔 변호사가 앉아 진행을 도왔다. 이를 두고 “체력이 상대적으로 약한 고령자임을 감안한 것”이라고 해석했다. 일부 그룹은 고령의 총수 건강 상태를 고려해 국회에 의료진과 구급차를 대기시키기로 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 과정에서 이완영 새누리당 의원이 구설수에 올랐다. 이 의원은 김성태 위원장에게 “정몽구, 손경식, 김승연 세 분은 건강진단서 고령 병력으로 오래 계시기에 매우 힘들다고 사전 의견서를 보내왔고, 지금 앉아 계시는 분 모습을 보니 매우 걱정된다”며 조기 귀가를 요구하는 내용의 쪽지를 건네 논란에 휩싸인 것이다. 이에 대해 이 의원은 다음 날인 12월 8일 2차 청문회를 시작하며 “위원장을 보조해서 한 일”이라고 해명한 바 있다. [민] |
제2의 노무현은 없었다 재벌들이 한 자리에 모인 것은 1988년 ‘일해재단 비리 청문회’ 이후 28년 만이다. 당시 청문회는 전두환 전 대통령이 일해재단이 대기업들로부터 아웅산 테러 희생자 유가족들을 돕는다는 명목으로 모금이 이뤄진 것에 대해 강제성과 대가성이 있었는지가 핵심 쟁점이었다. 이에 국회는 전두환 정권의 비리를 파헤치기 위해 ‘제5공화국 비리 조사 특별위원회’를 구성했다. 청문회 당시 통일민주당 초선 의원이었던 고 노무현 전 대통령이 국민적 스타로 급부상했다. 노 전 대통령은 장세동 전 안기부장 등에게 날카롭고 거침없는 질문을 날렸고, 정주영 현대그룹 회장으로부턴 “칼 든 강도한테 빼앗겼다”는 답변을 받아내는 등 맹활약했다. 노 전 대통령 연설문을 맡았던 강원국 교수는 “노 전 대통령의 권위에 눌리지 않고 성역이나 금기가 없다고 생각하는 태도가 높이 평가됐다. 인신공격도 없었고 특히 논리적으로 얘기한 부분이 돋보였다”고 평가했다. 전계완 정치 평론가는 “박근혜 정부의 국정 운영 수준, 재벌 총수들의 태도와 이 문제를 해결하겠다고 칼을 빼든 청문위원들의 모습 어느 하나도 국민들의 눈높이에 만족할 만한 것이 없었다. 특히 정치인들이 질문을 할 때 사실관계를 입증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앞으로 어떻게 풀어 나갈지 대안도 물어보고 미래 계획도 자연스럽게 이끌어 내야 한다. 일방적으로 윽박지르거나 준비가 안 된 상태에서 기본적인 사실 관계조차 잘 모르고 청문회에 온 위원들이 있었다. 과거 어느 청문회와 비교해도 청문회 자체도 ‘중하’였고 위원들도 한두 사람을 제외하곤 평균적으로 ‘중하’ 수준이었다”라고 평가했다. [민] |
“이재용 흔들린 눈빛은 거짓말이라는 바디랭귀지” 이번 청문회에선 의원들의 질문 80% 이상이 이 부회장에게 쏟아졌다. 정연아 이미지테크연구소 대표는 “이 부회장은 말할 때 눈빛이 많이 흔들리고 눈을 자주 깜빡거렸다. 불안함이 그대로 노출됐다. 거짓말할 때 나타나는 ‘바디랭귀지’다. 다만 미소를 잃지 않고 여유 있는 모습을 연출하려고 노력한 부분이 보였다”고 했다. 안경으로 눈빛을 가린 최태원 SK 회장(왼쪽)과 말할 때마다 눈빛이 흔들린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가운데). 사진공동취재단 총수들의 스타일링도 관심을 끌었다. 정 대표는 “이 부회장은 회색에 보랏빛이 살짝 들어간 타이를 맸는데 회색은 권위를 떨어트리고 감성에 호소하는 듯한 인상을 주는 색깔이다. 특히 단단하게 맨 타이 매듭 부분이 돋보였는데 ‘허리띠를 졸라맨다’는 말처럼 기본자세를 갖추고 나온 것 같은 느낌을 줬다”고 평했다. 이어 정 대표는 “최태원 회장은 자세도 삐딱했고 표정과 말투에서 ‘뺀질함’이 느껴졌다. 또한 조명에 따라 안경 렌즈 때문에 눈빛이 잘 안 보이기도 했다. 의도한 것인지 궁금하다. 참고로 최 회장이 쓰고 나온 안경이 2000만 원선이라는 얘기가 있다”고 귀띔했다. [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