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일 국회에서 열린 박근혜 대통령 탄핵소추안 투표에 참여한 새누리당 이정현 대표와 정진석 원내대표. 박은숙 기자
당장 박 대통령이 직접 뽑은 황교안 국무총리 체제가 이끌게 됐지만 ‘X차 피하고 보니 쓰레기차‘라는 가혹한 평가가 뒤를 잇는다. 한동안 아바타 박근혜의 그늘 속을 견뎌야 할 상황이란 얘기다. 이처럼 탄핵이 불러온 엄청난 후폭퐁은 정치권을 미로 속으로 빠트릴 수 있다는 관측이다. 특히 여권은 탄핵정국을 딛고 정권 재창출까지 연결하는 난세의 영웅을 찾아야 할 판이다.
탄핵 표결 이후 여야는 헌법재판소 심판 과정을 지켜보면서도 한쪽에선 급한 불을 꺼야 한다. 바로 조기 대통령선거 준비다. 머릿속은 여권이 더 복잡해 보인다. 문재인 안철수 박원순 이재명 안희정 등 야권에 비해, 여권 잠룡이 가진 지지기반은 살얼음판과 같다. 살얼음판의 격랑 속에서 잠룡의 초조함은 더 크게 느껴진다. 고만고만한 후보들만 있다면 오히려 대세 주자가 뚜렷한 곳보다 경쟁과 갈등이 심화할 가능성이 크다. 탄핵정국에다 대선을 앞둔 자중지란까지, 산 너머 산인 형국이다.
그마나 정치권에서 회자되고 있는 승부수는 대권 불출마를 선언한 김무성 전 새누리당 대표가 ‘킹 메이커’ 역할을 자처하며 대선 후보의 조력자가 되는 시나리오에 있다. 부산 영도를 지역구로 둔 PK(부산경남) 의원임에도 김 전 대표 우호세력은 PK나 TK(대구경북)보다 서울·수도권에 흩어져 있다. 김성태 김학용 김영우 의원 등은 오른팔과 왼팔, 브레인으로 김 전 대표에게 확실한 충성심을 보여 왔다. 다단계처럼 그들이 가지 친 의원들도 꽤 된다는 후문이다.
친박계와 마찬가지로 비박계도 모래알 결집력이란 비판에서 그리 자유롭지 않지만 김 전 대표가 당내에서 가진 지분(세력)을 무시로 일관하기엔 꽤 묵직하다는 평가가 있다. 여권 잠룡이 각종 여론조사에서 이름을 올리지 못하거나, 이름을 올리더라도 유의미한 수치를 확보하지 못하며 고전하지만 김 전 대표의 불출마는 합종연횡의 도미노를 일으킬 대형 소재다.
김 전 대표가 유승민 전 원내대표의 대권가도를 돕는다면 정윤회 비선실세 문건파동에서 이름을 알린 ‘K-Y라인’의 재결성이 된다. 둘은 당 대표와 원내대표로 호흡을 맞췄지만 2007년 한나라당 대선 경선 캠프에서 박근혜 후보를 위해 뛴 원조친박으로 오랜 세월이 녹은 관계이기도 하다. 김 전 대표가 이끄는 국회 내 국민통합경제교실이나 근현대사역사교실이나 사단법인 공정사회연대(조전혁), 미래혁신포럼(김학용) 등이 싱크탱크의 역할을 할 수도 있다.
‘중부담-중복지’를 내세워 신보수의 기치를 든 유 의원과 정통보수를 자처하고 있는 김 전 대표의 시너지도 기대해볼만 하다는 것이 그들 주변부의 생각이기도 하다. PK와 TK를 중심으로 한 보수세력 연대는 강력한 영남권 단일 후보의 탄생을 이끌 수 있다는 얘기다. 문재인 전 더불어민주당 대표, 안철수 전 국민의당 상임대표, 박원순 서울시장이 모두 부산 출신이라는 점도 김 전 대표의 힘이 적지 않음을 시사한다. 유 의원도 김 전 대표가 대선 불출마를 선언하자 “높게 평가하며 그 의견을 존중한다”고 밝혔다.
문제는 서로를 바라보는 시각이다. 여의도 정가에선 둘의 관계를 그리 긍정적으로 보지 않는다. 김 전 대표로선 유 의원이 고분고분한 후배 정치인이 아니라 ‘호랑이 새끼’와 같다. 김 전 대표가 지인들에게 그런 감정을 표하기도 했다는 전언도 여럿이다. 반면 유 의원으로선 지난해 국회법 파동에서 박 대통령 편에 선 김 전 대표를 좋게 볼 수 없다. 김 전 대표의 불출마 선언 직후 ‘유 의원의 킹메이커 되나’라는 기사가 여럿 실렸는데 김 전 대표가 직접 전화를 걸어 불만을 강력하게 제기했다고 전해진다. 김 전 대표는 “이런 기사가 바로 저질 기사”라고 성토하기도 했다.
개헌에 대한 둘의 시각차도 극명하다. 김 전 대표는 제왕적 권력을 쥘 수밖에 없는 5년 단임 대통령제를 고쳐 의원내각제나 분권형 대통령제로 바꿔야 한다고 주장한다. 반면 유 의원은 현행 헌법을 제대로 지키지 않는 것이 더 큰 문제라 보고 있으며 권력체제를 바꾼다면 4년 중임 대통령제여야 한다는 견해를 견지하고 있다.
가장 가까이에는 탈당에 대한 의지도 다르다. 김 전 대표는 대선 불출마를 선언하기 며칠 전 지인들에게 탈당 가능성까지 염두에 두고 있다는 말을 한다. 제3지대로의 이동 가능성을 밝혔다는 것이다. 김 전 대표로선 그를 따라 나올 의원들도 다수 확보하고 있다. 하지만 일각에선 “원내교섭단체(20명)를 구성할 수준은 아니어서 일단 보류한 상태”라고 전했다. 반면 유 의원은 탈당에 부정적이다. “당에 남아 당 개혁에 최선을 다하겠다”는 것이 탈당에 대한 유 의원의 최종 입장이다.
대선 출마 의지를 접은 김 전 대표가 탈당까지도 불사한다면 1월 중순 귀국 예정인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과의 제2 ‘DJP연합’도 전혀 불가능한 시나리오가 아니라는 얘기도 나온다. 이는 김 전 대표가 개헌의 이정표로 내세운 분권형 대통령제, 즉 내치와 외치를 나눈 권력분점을 고리로 가능하다는 분석이다.
반 총장 대권 가도를 지원할 정진석 원내대표는 9일 국회에서 ‘국가 변혁을 위한 개헌 추진회의’ 가동에 나섰다. 대선 불출마만 선언했지 차기 총선 불출마 입장은 번복한 김 전 대표가 “차기 총리를 염두에 둔 것 아니냐”는 의문은 지금도 정가에 파다하다. 하지만 이같은 ‘김-반 연합’은 입지가 좁아진 새누리당에 반 총장이 둥지를 틀지 않겠다고 선언할 경우엔 새누리당 밖에서 이뤄질 가능성도 있다.
김 전 대표 주변부에서는 김 전 대표가 기득권을 박차고 당 밖으로 이동하는 것보다 당에 남아 계파 해체 후 통합을 주도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조언도 조심스럽게 이어가고 있다고 한다. 대통령 탄핵이 성사되면서 갈 곳을 잃은 친박계를 내치지 않고 안고 가자는 일종의 포용론이다.
이는 김 전 대표가 정치는 주고받는 것이라 주장하는 협상주의자라는 데에서 출발하는 시나리오다. 얼마 전 이정현 대표는 지지율을 다 합쳐 10%도 되지 않는 잠룡들은 대권주자의 꼬리표를 떼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김 전 대표와 유 의원은 그 목록에서 뺐다. 남경필 원희룡 오세훈 김문수 등은 싸잡아 비난하면서도 두 사람에겐 관대한 모습을 보였던 것이다.
김 전 대표로서도 친박계 지도부를 만든 전국 당원, 대의원 조직에 욕심이 생길 수도 있다. 다만 김 전 대표와 친박계 좌장 격인 서청원 전 최고위원 간의 껄끄러운 관계나, 아직 최순실 게이트에서 드러나지 않은 친박 핵심 인사의 연루 가능성은 김무성-친박 연합 시나리오의 한계로도 꼽힌다. 김 전 대표는 제3지대에 있는 국민의당을 두고서도 “진보좌파로 볼 수 없다”고 밝힌 바 있어 ‘김무성-안철수 연대’도 불가능한 각본은 아니다. 탄핵이라는 빅뱅 이후의 정국은 사실상 시계제로인 셈이다.
이정필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