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종범 전 청와대 정책수석 비서관이 11월2일 오후 서울중앙지검에 출석하고 있다.
지난 9월 24일 TK(대구·경북) 출신 한 정치권 관계자는 미르·케이스포츠재단과 관련해 안종범 전 청와대 경제수석이 대기업에 모금을 강요했다는 의혹에 대해 이같이 답했다. 박근혜 정부 ‘개국공신’이자 국가 경제정책의 설계자로 알려진 안 전 수석은 ‘소심한 사람’이란 평가를 비웃듯 수차례에 걸쳐 ‘대범한 범행’을 저질렀다.
지난 11월 5일 직권남용 등 혐의로 구속된 안 전 수석은 과거 박 대통령의 개인 가정교사로 불렸다. 학계에서 쌓은 명망을 바탕으로 박 대통령의 의원 시절부터 ‘경제 스터디 모임’에 참가했던 그는 2007년 박 대통령이 새누리당 대선 후보 경선에서 낙마한 뒤에도 곁을 지켰다.
안 전 수석의 ‘절친’이자 미국 위스콘신 대학 동문인 강석훈 현 청와대 경제수석도 스터디 모임의 일원이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당시 사정을 잘 아는 또 다른 정치권 관계자는 “예전부터 안 전 수석은 새누리당(옛 한나라당) 정치인과 이런저런 모임을 가졌는데 평소 친분이 있던 강 수석이 ‘형 나도 거기에 끼워줘’라고 말해 이를 들어준 것이 지금의 난맥상을 만들었다”며 “고분고분한 학자 스타일인 두 사람을 박 대통령이 무척 좋아했다. 특히 강 수석은 지난 18대 대선 직후 ‘논공행상’ 과정에서 원하는 자리를 얻지 못한 데다 지병까지 생겨 6개월 간 일을 쉬었는데 박 대통령이 늘 미안한 마음을 갖고 있던 중 지난 총선에서 강 수석이 떨어지자 청와대에 불러들인 것으로 알고 있다”고 말했다.
강 수석은 안 전 수석이 떠난 청와대에서 박 대통령의 대구 서문시장 방문에 동행하는 등 최측근으로 부상한 모습이다. 그러나 교수 출신인 두 전·현직 경제수석을 바라보는 청와대 안팎의 눈길은 싸늘하다. 금융당국 관계자는 “이명박 정부 때는 그나마 실물 경제 시스템을 이해하고 정책을 내렸는데 이번 정부는 아닌 것 같다”며 “조직에 대한 이해도가 떨어지는 사람들이 오다보니 정책 혼선이 잦을 수밖에 없었다”고 말했다.
안 전 수석과 강 수석의 청와대 입성에는 친박 실세인 최경환 전 경제부총리의 ‘입김’이 있었던 것 아니냐는 말이 있다. 이들은 모두 ▲위스콘신 대학에서 수학했고 ▲경제학을 전공했으며 ▲‘원조 친박’이라는 공통점을 갖고 있다.
2013년 대통령직인수위원회 당시 강석훈 경제수석(왼쪽) 모습.
박근혜 정부 들어 이들 ‘위스콘신 트로이카’는 경제 관련 핵심 보직을 꿰차고 국가 경제정책을 주도했다. 최 전 부총리가 행정부를 움직여 대기업 구조조정, 부동산 규제 완화 등 거시정책을 추진하면 강 수석은 국회에서 자신이 간사를 맡고 있는 기획재정위원회를 통해 관련 입법을 주도했다. 또 정책 추진 과정에서 ‘걸림돌’은 안 전 수석이 있는 청와대가 해결했다.
이 과정에서 경제수석과 경제부총리 간 ‘잡음’은 단 한 차례도 나오지 않았다. 얼핏 원만한 국정 운영을 한 것처럼 보이지만 바꿔 보면 상호 ‘견제 논리’가 작동하지 않았다는 것을 시사한다. 정부 경제팀 수장인 경제부총리와 대통령의 보좌역인 경제수석은 국가 경제정책을 컨트롤하고 결정한다는 점에서 비슷한 업무 반경을 갖고 있다. 때문에 대통령이 두 사람 중 어디를 더 선호하느냐에 따라 세부적인 정책 방향은 바뀔 수 있다. 이는 역대 정부마다 경제수석과 경제부총리 간 ‘라이벌’ 구도가 형성됐던 이유다.
그러나 박근혜 정부 들어 경제수석은 경제부총리보다 그 영향력이 약화된 대신 ‘사익’을 위해 재계에 압력을 넣는 ‘창구’로 전락했다. 검찰 공소장에 따르면 안 전 수석은 2014년 11월 27일 대통령에게 지시를 받고 최순실 씨 측근 회사에 대기업 광고 일감을 몰아주라며 지시를 이행했고, K스포츠재단 모금과 관련해선 수사를 앞둔 롯데 고위 임원과 수차례 통화하고 75억 원을 요구하는 등 압력을 행사했다.
반면 대우조선해양 부실 지원과 관련해선 이렇다 할 목소리를 내지 못했으며, 올해 들어선 무리한 해운업 구조조정으로 한진해운 사태를 초래했다. 참여정부 시절 청와대 경제수석실 행정관과 제2부속실 실장을 지낸 전재수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경제수석이 챙길 현안이 얼마나 많은데 대통령 대면보고도 못했던 것 아니겠느냐”라며 “아무래도 대면보고를 하면 서로 토론을 통해 의견을 주고받고 그 과정에서 정책의 오류 가능성이 줄어드는데 안타깝게도 박 대통령은 현안을 주고받을 능력이 안 됐던 것 같고, 결국 청와대 시스템이 ‘비선’에 의존하게 된 것”이라고 말했다.
비선에 좌우된 경제수석은 어떠한 견제장치도 없이 일반 사기업 경영진의 퇴진을 압박하는 등 구시대적인 악행을 일삼았다. 박근혜 정부 초대 경제 컨트롤타워인 조원동 전 청와대 경제수석은 2013년 말 CJ그룹에 ‘대통령의 뜻’이라며 이미경 CJ그룹 부회장이 경영 일선에서 물러날 것을 지시했다. 재계 관계자는 “원래 이 부회장은 박 대통령과 가까워지려 노력했는데 당시 한 국제행사에서 대통령보다 돋보인 게 밉보인 원인이 된 것 같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 전 의원은 “참여정부 때는 각 수석급이 기업이나 정부 부처에 직접 전화하지 않는 것이 불문율이었는데 이번 정부는 그런 기본조차 지켜지지 않았다“라며 ”결국 시대착오적인 대통령의 문제였다“고 말했다.
강현석 기자 angeli@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