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이복동생인 김평일(오른쪽)과 두 자녀 은송(가운데), 인강(왼쪽) 남매가 2007년 2월 10일 열렸던 북·폴란드친선협회 주관 행사에 참가한 모습. 사진출처= 폴란드 나레프시 홈페이지
1974년 2월 당중앙위원회 제5기 8차 전원회의가 열렸다. 김일성 정권의 사회주의 건설사업과 관련한 여러 주요 의제들을 결정하고 선포하는 중요한 자리였다. 북한 정치사의 길목에 있어서도 중요한 기점으로 회자된다. 이 회의는 김일성 주석이 자신의 후계자를 공식(여기서 공식은 전 인민이 아닌, 당 핵심부에서의 공식을 의미) 결정하는 자리이기도 했다.
알려졌다시피 이 자리에서 김정일은 당 정치위원으로 선출되며 명실상부한 공식 후계자로 점지된다. 1966년 당 업무를 시작한 김정일은 이복동생 김평일과의 후계구도 경쟁에서 본인 특유의 정치력과 술수를 동원해 김일성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특히 김평일과 그의 뒤를 봐주던 실세 김성애(김평일의 생모)의 친동생 김성갑 해군사령부 정치위원의 비리를 캐내면서 김일성으로 하여금 아예 맘을 접게 유도했다.
전원회의 이전 김일성의 마음은 이미 장남에게로 기운 상황은 확실했다. 하지만 북한 핵심 권부 안에서는 상당한 이견이 있었다. 전원회의가 공식 의제를 결정하고 선포하는 자리라면 의제 상정에 앞서 안을 논의하는 자리는 당중앙위원회 정치위원회 확대회의였다. 1973년에 있었던 회의에서는 오히려 정치위원들이 김평일을 더 높게 평가했다는 후문이다.
집행위원회 확대회의에서 있었던 일화는 잘 알려지지 않은 부분이다. 김일성은 1인 독재주의 확립을 완수한 상황이었지만 여전히 의사결정 과정에서 원로들의 입김은 남아 있었다. 국내 일부 학계에서 주장하는 김일성의 무조건적 김정일 후계자 지목과 주변의 묵과는 매우 과장된 부분이다. 당시 회의에 참석했던 최용건 상임위원장을 비롯한 집행위원들 다수는 김평일을 후계자로 지목했다.
당시 김평일은 군에서 이른바 ‘김일성사단(호위국 산하)’ 사단장(대좌계급)으로서 능력을 발휘하고 있던 상황이었다. 1976년 판문점 도끼 만행사건으로 전쟁분위기가 고조되자, 스스로 자진입대를 천명하며 청년들은 물론 원로들에게도 인정받았던 이가 바로 김평일이었다. 능력은 물론 외모 등 모든 면에서 김정일에 앞선다는 평가가 지배적이었다. 그 뒤를 봐주던 친모 김성애 여맹위원장의 위세도 무시 못했다. 김정일의 권모술수로 밝혀진 비리 행적에도 불구하고 원로들이 김평일을 선호했던 배경이다.
하지만 확대회의서 김일성은 잠시 휴회를 선언하면서 눈물을 훔쳤다고 한다. 이미 김정일을 염두에 둔 김일성은 정치위원들이 김평일을 지지하는 의견이 달갑지 않았을 것이다. 이에 김일성은 못마땅한 제스처를 노골적으로 드러냈다고 한다. 이후 개회를 선언하자 발언권조차 없었던 오진우, 최현 등 방청 인사들이 발언권을 스스로 요구하며 김정일의 후계자 세습을 강력하게 주장했다. 그러자 분위기는 순식간에 뒤집어졌다. 이는 철저하게 김일성이 준비한 시나리오였다. 결국 결정권을 받아든 김일성은 이듬해 전원회의에 상정할 후계자 안을 자신의 뜻에 따라 상정하게 된 것이다. 이렇게 김평일의 낙오는 결정됐다.
친모 김성애가 권력무대서 사라진 것과 마찬가지로 김평일 역시 권력무대서 퇴장했다. 특히 뛰어난 라이벌이자 동생인 김평일에 대해 심각한 콤플렉스를 안고 있던 김정일은 김평일을 해외대사로 파견한다. 말이 파견이지 사실상 내쫓는 것과 다름없었다.
1979년 이후 김평일은 주 유고슬라비아 주재 무관을 시작으로 헝가리, 불가리아, 핀란드, 폴란드 등 동유럽 주변국을 떠돌게 됐다. 지난해 1월엔 주 체코 대사로 임명돼 여전히 해외를 떠돌고 있다.
김평일은 외교관으로서의 삶 자체도 평탄치 못했다. 파견 국가들 자체가 북한 외교의 핵심부라 할 수 있는 중국, 러시아 등 주요국가도 아니었다. 그는 동유럽에서도 주변부에 속하는 소국들을 중심으로 떠돌았다. 북한 외교관들 사이에서도 교류와 접촉의 대상조차 되지 않았다. 김정일의 감시 속에서 굳이 대척점에 있는 김평일과 마주하는 것은 북한 외교관들에게 마이너스일 뿐이었다.
변변찮은 월급을 받고 있는 북한 대부분의 외교관들처럼 김평일 역시 생활이 녹록하지 못했다. 다른 외교관들이 별도의 비공식적인 사업을 벌인 것과 달리 이미 라인에서 고립되고 얼굴까지 알려진 김평일은 별도의 이익 관련 사업을 벌이기도 쉽지 않은 상황이었다. 이후 김평일은 철저하게 소외되고 잊힌 인물이었다.
김일성의 ‘부인’이자 김평일의 생모인 김성애도 김일성이 생전에 살았던 현재의 ‘금수산태양궁전(주석부 궁전)’에서 ‘첩’보다도 못한 인생을 살았다. 물론 외적으로는 조선여성동맹중앙위원회 위원장이었지만 정치 일선에는 절대로 나설 수 없었다. 하다 보니 주석궁 별관에서 기껏 하는 일이 자기가 거처하는 방들의 내부 가구자리를 바꾸는 소일거리가 전부였다. 그것도 주변 호위병들이나 담당 관리원들까지 김성애의 말을 제대로 듣지 않았다. 그야말로 ‘천덕꾸러기’ 신세였다.
지난해 7월 당시 김정은 국방위원회 제1위원장이 ‘대사회의’에 참석한 북한 외교관들과 함께 기념행사에 참석했다. 연합뉴스
그러던 김평일에게 다시 관심이 모아진 시기는 비교적 최근의 일이다. 무엇보다 3대 세습 시기와 맞물려 북한 체제가 불안한 상황을 오가면서 국제사회 안팎에서 대안이 모색이 시작되면서 부터다. 김 씨 일가의 적통이면서 오랜 해외체류 생활로 인해 국제적 감각까지 겸비한 김평일이 다시 주목받기 시작한 것이다.
지난 4월 29일 서울에서 개최된 ‘제1회 전세계탈북자대회’에서는 북한망명정부 수립과 함께 김평일의 수반 옹립 의제가 논의됐다. 그런가하면 지난달 중화권 유력매체인 <아주주간(亞洲週刊)>은 앞서의 탈북자 사회 분위기를 전하며 김평일의 옹립 가능성을 심도있게 보도하기도 했다. 여러모로 대안세력으로서 김평일이 스포트라이트를 받고 있는 셈이다.
필자는 이러한 분위기와 관련해 실제 북한 내부 사정을 좀 더 살펴봤다. 북한 내부 고위급 관계자 대부분은 이러한 옹립 가능성에 대해 철저하게 부정하고 있는 상황이다. 김평일은 지난해 7월 평양에서 열린 ‘대사회의’에 참석했다. 국내외 언론에서는 김평일의 고국 방문을 두고 36년 만의 방문이라며 비상한 관심을 가졌다. 하지만 내부 관계자에 따르면 김평일은 이전 두 차례 정도 고국을 방문했던 것으로 확인된다. 정확히 말하면 김일성 사망 이후 1994년과 2009년, 2015년이다. 따라서 김평일이 2015년 7월 36년 만에 고국을 방문했다는 보도는 사실이 아닌 셈이다.
일부 독자들은 눈치 챘겠지만 1994년 김평일은 아버지 김일성 주석의 장례일정에 참가하기 위해 고국을 방문했다. 또한 김평일은 2009년경 당시 북한 최고지도자이며 이복형인 김정일을 비공식적으로 예방했다. 당시 김정일은 자신의 몸 상태(이미 왼손이 반신불수)가 어려운 가운데 직접 술 한 잔을 따라 줄 정도로 김평일과 마지막 ‘정’을 나눴다는 후문이다. 무엇보다 자신으로 인해 해외를 떠도는 이복동생의 처지가 늦게서야 와 닿았던 모양이다. 이때 김평일은 사망하기 직전인 어머니 김성애와 대면하기도 했다. 김정일의 마지막 배려였다. 김성애는 사망(2010년 추정) 직전에 아들을 볼 수 있었다.
2015년 7월 대사회의에 참석한 김평일은 북한 최고지도자이자 조카인 김정은과 독대 자리를 가진 것으로 확인된다. 정확하게 말하면 당시 자리는 일종의 가족회의였다. 김평일 일가가 함께 동석했으며 이를 맞이한 김정은 역시 가족들을 대동했다. 구체적으로 가족 중 누가 동석했는지는 좀 더 살펴볼 부분이지만 처음으로 숙부와 조카의 비공식적인 접촉이 있었던 것은 확실하다.
복수의 소식통에 따르면 김정은은 당시 숙부 대접을 나름대로 극진하게 했던 것으로 보인다. 수위가 높았던 것은 아니지만 김정은은 그동안 숙부가 원치 않게 해외를 떠돌았던 부분에 대해 완곡한 사과의 마음을 전달했다는 후문이다.
북한 내부관계자들은 김정은이 숙부 김평일을 맞이했던 것을 두고 강한 ‘자신감’으로 해석한다. 권력기반이 허약한 숙부 김평일의 상황을 정확히 인지하며 권력에 대한 자신감을 표출했다는 것이다. 더불어 대외적 ‘온정주의’로 포장하려는 복심이 짙게 깔려 있었을 것으로 풀이된다.
앞서의 내부 관계자들은 이구동성으로 “김평일을 옹립한다는 것은 말도 안 된다”며 “실시간으로 보위부원 세 명이 그를 항시 감시한다. 김평일은 외부접촉 자체가 어려운 상황이다. 대안적인 세력을 마련하거나 혹은 그것을 희망하는 그 누군가와의 접촉 자체가 쉽지 않다”고 평한다.
이윤걸 북한전략정보서비스센터 대표
정리=한병관 기자 wlimodu@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