탄핵 민심이 박 대통령 부녀의 기념물을 훼손하는 지경에 이르자 기념물을 관리하는 지방자치단체들은 골머리를 앓고 있다. 이미 훼손된 기념물을 철거할 수도, 예산을 들여 복원할 수도 없는 입장이기 때문이다. 더불어 “관리를 제대로 하지 못한 지자체의 탓”이라는 지적도 제기된 만큼 각 지자체는 노심초사하며 몸을 사리는 모양새다.
서울 영등포구 문래근린공원에 설치된 박 전 대통령의 흉상을 훼손한 최황 씨(32)는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충동적 분풀이가 결코 아니다. 박근혜라는 정치인의 존재 이유는 박정희 유령이다. 박근혜는 꾸준히 아버지의 명예를 되살리는 작업을 해왔다. 지금이야말로 박정희의 아이콘을 사회에서 도려내야 할 때”라며 흉상의 철거를 촉구했다.
그러나 영등포구 관계자는 “흉상이 훼손된 이후 철거나 조치에 대한 민원은 있다. 의견이 분분한 상태라 아직 후속 조치는 결정된 바가 없다. 신중히 고려하고 다각도로 검토해서 결정하겠다는 답변밖에 드릴 수 없는 실정”이라는 입장을 밝혔다.
서울 영등포구 문래근린공원에 설치된 박정희 전 대통령의 흉상. 지난 4일 훼손됐으나 현재까지 후속조치 없이 방치된 상태다.
지난 7월 박근혜 대통령의 울산 방문 이후 적극적으로 ‘VIP 마케팅’을 벌였던 울산시도 성난 촛불민심에 난색을 표하고 있다. 울산시는 대왕암공원에 설치했던 박 대통령 방문 기념 안내판을 철거했다. 안내판에 붙었던 박 대통령의 사진이 관광객에 의해 날카로운 금속성 물질로 훼손됐기 때문이다.
울산시 관계자는 “지난 7월 박 대통령이 울산을 방문했을 때만 해도 분위기가 좋았다. 시에서는 ‘VIP 마케팅’을 적극 활용해 홍보 효과도 봤다. 그러나 기념 안내판을 설치하고 한 달 뒤 최순실 사태가 터졌다. 대통령에 대한 여론이 좋았으면 안내판을 수리해 유지할 수도 있었겠지만, 대통령에 대한 여론이 안 좋다 보니 철거하게 됐다. 현 상황에서는 수리한다 해도 비슷한 사건이 재발하지 않으리라는 보장이 없기 때문”이라고 전했다. 이어 “당시 박 대통령이 방문한 신정 시장에서는 상인들이 가게 곳곳에 대통령의 사진을 내걸었다. 박 대통령이 식사하고 간 국밥집의 경우 발 디딜 틈 없이 사람이 몰리기도 했다. 그러나 현재에는 거의 철거된 것으로 안다”고 덧붙였다.
탄핵 민심의 불똥이 튄 것은 기념물뿐만이 아니다. 내년 박 전 대통령 탄생 100주년을 맞아 경북도와 구미시 등에서 추진되고 있는 기념사업들을 비롯해 ‘박정희’ ‘박근혜’ 키워드가 어른거리는 각종 사업에도 제동이 걸리고 있다. 최근 언론보도를 통해 박근혜 정부가 지난 4년간 박 전 대통령 관련 사업에만 2600억 원의 예산을 투입했으며, 내년도 예산안에도 753억 원이 포함된 사실이 알려지자 예산 낭비라는 지적이 제기됐기 때문이다.
우정사업본부가 내년 9월 15일 발행을 목표로 제작을 진행 중인 ‘박정희 대통령 탄생 100돌 기념 우표’도 논란이 됐다. 기념우표는 ‘박정희 우상화’라는 비판을 받고 있으며, 기념 우표 발행을 위해 우정사업본부가 내부 규정을 바꿨다는 주장도 제기됐다. 기존 규정에 따르면 공공기관인 구미시가 기념 우표 발생 신청을 할 수 없으나, 지난 1월 규정이 개정돼 가능해졌다는 것이다.
이와 함께 지난 2013년 2월 25일 박 대통령 취임식에 맞춰 발행된 ‘제18대 대통령 취임 기념 우표’에 ‘비선 실세’ 최순실 씨가 관여한 것 아니냐는 의혹마저 제기돼 논란은 증폭되고 있다. JTBC의 보도에 따르면 이들이 입수한 200여 건의 ‘최순실 파일’에는 ‘우표 시안’ ‘우표 제안’ 등 우표제작과 관련된 파일이 다수 발견됐다.
해당 의혹과 관련해 우정사업본부 관계자는 “기념우표는 국감도 받고 국회 예결위까지 통과된 상태라 우리 임의대로 결정할 수 있는 사항이 아니다. 애초 구미시에서 요청해왔고, 우표발행 심의위원회에서 가부를 결정했다. 우리는 구미시에서 요청한 날짜대로 사업을 진행할 뿐”이라고 말했다. 이어 “(시국과 여론이 이렇다 할지라도) 업무적으로만 판단할 뿐, 자의적인 정치적 판단으로 변동할 수 없다. 구미시에서 취소 요청을 해야 제작을 중단할 수 있다”고 전했다.
서울 중구청은 228억 원의 예산을 투입해 박 전 대통령 신당동 가옥 주변에 역사문화공원을 만들고 공원 지하에 주차장을 조성하는 사업을 추진하고 있다. 해당 사업은 ‘박정희 공원’으로 많은 비난을 사며 2년 전 서울시와의 의견 충돌로 추진되지 못했으나, 중구청은 자체 예산을 통해 사업을 강행해 논란이 되고 있다.
중구청 관계자는 “저희는 한 번도 ‘박정희 공원’이라고 말한 적 없다. 다만 공원을 조성하는 부지 옆에 박 전 대통령의 생가가 있어서 그런 말이 나온 것 같다. 공영주차장을 늘리고 공원을 조성하는 사업이지 박 전 대통령과는 관계가 없다”고 해명했다.
지난달 18일 대구시 중구 삼덕동의 박근혜 대통령 생가터 표지판이 훼손된 모습.
앞서 구미시는 박 전 대통령 탄생 100주년 기념사업의 일환으로 30억 원의 예산을 투입해 박 전 대통령의 일생을 다룬 뮤지컬 ‘고독한 결단’의 제작을 추진했으나 시민단체의 반발로 지난 7월 취소한 바 있다.
한편 해마다 군 예산 900만 원을 들여 육영수 여사의 숭모제와 추모제를 진행해오던 충청북도 옥천군은 두 행사를 통합하거나 축소하는 방안을 검토 중이다. 옥천군 관계자는 “이번 기회로 문제점이 지적됐고, 한 분을 두 번 모시는 것에 대해 이전부터 의견이 있었다. 분위기가 가라앉으면 두 행사를 진행하는 단체와 군청, 주민들이 모여 의견수렴을 하는 자리를 만들어 방법을 찾을 것”이라며 “현재는 의견을 모을 수 있는 분위기가 아니라 지금 우리가 정확한 답을 드리기는 어렵다. 해가 바뀌면 공청회와 같은 자리를 만들 예정”이라고 전했다.
여다정 기자 yrosadj@ilyo.co.kr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