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故) 최경락 경위 유가족으로부터 입수한 변호인 의견서 일부. 당시 최 경위는 혐의 사실을 전면 부인하며 결백을 주장했다.
“정윤회라는 비선실세가 청와대 실세들과 만나며 국정에 개입하고 있다.”
2014년 11월 말, 청와대 공직기강비서관실에서 만든 ‘비선실세’ 관련 문건이 세상에 공개됐다. 논란이 불거지자 문건에 거론된 정윤회 씨와 청와대 ‘문고리 3인방’ 등은 즉각 이를 ‘찌라시’로 규정했다. 박근혜 대통령도 “문건 유출은 국기문란 행위다. 검찰이 명백히 밝혀야 한다”고 강조했다.
검찰은 대통령의 ‘주문’대로 즉각 수사에 나섰지만, 초점은 문건의 진위 여부보다 유출 경로 파악에 집중됐다. ‘대통령 하명 수사’라는 거센 비판 속에서 검찰은 수사에 착수한 지 단 일주일 만에 유출 가담자를 전부 찾아냈고, 이 과정에서 서울지방경찰청 정보과 소속이었던 고(故) 최경락 경위가 ‘정윤회 문건’의 최종 유출자로 지목됐다. 조응천 전 청와대 공직기강비서관실 비서관 ‘주도’-박관천 전 청와대 공직기강비서관실 행정관 ‘작성’-한일 전 서울청 정보과 경위 ‘복사‧공유’-같은과 소속 최 경위 ‘외부 유출’ 순이었다.
최 경위는 앞서의 ‘유출 가담자’들과 함께 검찰 수사를 받다 2014년 12월 13일, 자신의 차 안에서 스스로 극단적인 선택을 내렸다. 최 경위가 숨지면서 더 이상 조사가 불가능해지자 검찰은 ‘공소권 없음’ 처분을 내리면서도, 그를 문건의 ‘최종 유출자’로 결론 내렸다.
# 정윤회 문건, 최 경위가 유출했나
최근 ‘박근혜-최순실 게이트’로 정윤회 문건에 대한 의혹은 대부분 사실로 드러났다. 그러나 최 경위의 문건 유출 여부부터 극단적인 선택의 이유, 당시부터 불거진 ‘청와대 회유설’ 등 최 경위의 죽음을 둘러싼 의문과 의혹은 2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풀리지 않고 있다.
최 경위는 정윤회 문건 유출 사건과 관련, 앞서의 한일 전 경위와 함께 처음으로 검찰에 긴급체포된 핵심 관계자였다. 당시 최 경위는 체포된 순간부터 유출 혐의에 대해 완강히 부인했다.
<일요신문>이 최 경위 유가족으로부터 단독 입수한 의견서에 그의 주장이 고스란히 나타난다. 검찰 수사 과정에서 최 경위가 변호인과 함께 작성한 이 의견서를 보면, 그는 박관천 경정, 한일 경위, 세계일보 기자와의 관계를 구체적으로 설명하면서 “문건을 유출할 수도 없었고 유출할 이유도 없었다”며 강력하게 결백을 주장했다.
의견서에 따르면 최 경위는 2013년 초부터 1년간 서울경찰청 정보과에 소속돼 정보 수집 업무를 담당하고 있었다. 먼저 그는 박관천 전 행정관에 대해 “박 경정이 경찰로 복귀하기 전까지 그가 누구인지 전혀 알지 못했다”며 “정보과 업무 특성상 외근이 잦아 박 경정이 사무실에 문건이 들어있는 박스를 보관한 사실도 전혀 알 수 없었다”고 주장했다.
앞서 박 전 행정관은 2014년 2월 청와대 파견근무가 해제돼 서울청 정보과로 복귀했다. 그는 ‘정윤회 문건’ 등 청와대 근무 당시 자신이 작성한 문건과 짐 등을 정보과 사무실에 6일간 보관했다. 최 경위는 “만약 문건의 존재를 알았더라도 계급과 서열을 중시하는 경찰 조직에서 상사의 물건을 몰래 살펴보거나 복사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덧붙였다.
최 경위는 또 자신에게 몰래 복사한 문건을 넘겨준 혐의를 받았던 한일 경위와도 깊은 관계가 아니었다고 주장했다. 의견서에 따르면 한 경위는 다른 부서에서 근무해오다 2014년 2월, 최 경위와 같은 부서로 발령이 내려져 함께 근무했다.
최 경위는 “문서가 유출된 것으로 지목된 시점은 한 경위가 정보과로 발령 받은 지 고작 3~4일이 지난 시점”이라며 “특별한 신뢰관계도 없었기 때문에 나를 믿고 그런 ‘고급정보’를 넘겨 줄 상황이 아니었다”고 주장했다. 이어 “새로 부서를 옮긴 한 경위는 자신(한 경위)이 동료를 돕거나 정보를 건네줄 상황도 아니었다. 매월 여러 건의 정보를 생산‧보고해야 하는 정보과 특성상 오히려 동료로부터 도움을 받아야 할 입장이었다”고 주장했다.
최 경위는 ‘정윤회 문건’을 처음 보도한 세계일보 기자에 대해서도 자신이 정보를 넘겨 줄 이유가 없었다고 주장했다. 당시 검찰은 수사과정에서 최 경위와 세계일보 기자가 빈번하게 통화하고 만나온 것으로 파악하고 있었다.
최 경위는 “세계일보의 ‘청와대 행정관 비리 면책특권’ 관련 보도 이후 이를 보도한 기자와 박 경정의 접촉 여부 및 동향이 정보계통의 관심사였다”며 “이를 파악하기 위해 전화하거나 만난 것일 뿐, 문건을 유출한 적은 없다”고 주장했다. 그는 또 “정보과 근무를 하면서 앞서의 기자에게 늘 정보를 받는 입장이었지 주지는 않았다”고 덧붙였다.
# 문건 유출, 진실공방으로
반면 지난 12월 13일 <일요신문>과 만난 최 경위의 당시 변호인은 다른 이야기를 했다. 그는 “한 경위가 문건을 복사하고 최 경위가 유출했다는 검찰의 수사가 맞다”고 주장했다. 이 변호인은 한 경위가 검찰 수사 과정에서 갑작스레 변호인을 교체하기 전까지 최 경위와 한 경위를 대리했다.
변호인은 “내가 알고 있는 이야기는 모두 한 경위와 최 경위 상담 과정에서 본인들에게 직접 들은 내용”이라며 “한 경위는 문건을 복사했고, 최 경위에게 넘겨줬다. 이 가운데 최 경위가 14건의 문건을 유출했다고 들었다”고 주장했다.
다만 그는 최 경위가 어떤 문건을 누구에게, 어떻게 넘겨줬는지는 확인하지 못했다고 말했다. 변호인은 최 경위가 극단적인 선택을 한 뒤에 수사가 이뤄지지 못하게 되면서, 검찰 수사 기록을 살펴보지 않았다고 했다. 그는 “최 경위는 정윤회 문건의 경우, 사안의 중대성과 파급력을 봤을 때 조직 내에서 혼자 확인하고 감당하기가 어려울 것이라고 판단했던 것 같다. 그래서 기자에게 넘긴 것으로 추정된다”고 주장했다.
혐의 사실을 모두 부인한 앞서의 의견서에 대해 변호인은 “먼저 구속을 피하기 위해 주장했던 것”이라며 “문건 핵심 내용이 국가적으로 논란을 불러 왔는데 정말 중요한 게 유출인지, 문건의 진위는 왜 따지지 않는지, 구속까지 시킬 정도로 유출자를 찾아내야 하는지 등에 대해 강력히 주장했다”고 말했다.
하지만 현재로선 변호인의 주장이 모두 사실이라고 볼 수 없다. 변호인은 “최 경위의 문건 유출이 ‘증거’로 확인된 사실이냐”는 기자의 질문에 “그건 아니다”라고 말했다. 또한 당시 검찰은 최 경위에 대해 공무상기밀누설 혐의로 구속영장을 청구했지만 기각됐다. 문건 유출과 관련해 함께 조사를 받은 한 경위가 “문건을 복사해 최 경위와 공유했다”고 ‘자백’까지 한 데다, 한 경위가 한화그룹 직원과 ‘청와대 문건’에 대한 이야기를 나눈 정황이 압수된 휴대전화, USB 등에서 발견됐지만 법원은 “검찰이 확보한 물증만으로는 최 경위의 문건 유출을 입증할 수 없다”고 판단했다.
당시 검찰 수사 자체가 의문스러운 점이 많아 신뢰할 수 없다는 시각도 있다. 검찰은 ‘정윤회 문건’ 중간수사 결과 발표에서 “비선 실세의 만남이나 국정 개입은 사실무근”이라고 밝혔다. 문건이 허위라는 대통령 발언 그대로였다. 그러나 당시 문건에서 ‘십상시의 모임 장소’로 지목된 강남 중식당은 이번 최순실 게이트에서 최 씨 일가의 주요 만남 장소로 드러난 곳이다. 검찰이 압수했던 한 전 경위의 휴대전화와 USB 등에선 최순실 씨와 그의 딸 정유라 씨가 연루된 승마협회 비리 정보가 포함돼 있었지만 검찰은 이 내용을 수사에서 배제했다. 이 때문에 최근 법조계 일각에선 당시 검찰 수사를 두고 “철저한 하명에 따른 묵인‧방조‧부실 수사였다. ‘범죄적 수사’에 가깝다”는 강도 높은 비난도 나오고 있다. 특검에서 이 사건 재조사는 물론, 당시 검찰 관계자들과 서울지검장이었던 김수남 검찰총장, 법무부 장관이었던 황교안 국무총리를 비롯해 강신명 전 경찰청장 등 경찰 수뇌부까지도 조사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지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지난 10일 최 경위 유가족과 지인들은 서울시청 광장에 최 경위 명예회복 서명운동을 벌였다. 이날 박원순 서울시장과 송영길 의원 등을 비롯해 시민 1만 여명이 서명 운동에 참여했다.
한편, 최경락 경위의 유가족들과 장신중 전 총경은 최근 ‘고(故) 최경락 경위 명예회복 서명 운동’에 나섰다. 이들은 지난 12월 10일 지인들과 함께 서울 광화문, 대학로, 시청 등에서 시민들을 향해 “서명해 주십시오”라고 외쳤다. 이날 박원순 서울 시장과 송영길 의원을 비롯한 시민 1만여 명이 서명을 했다. 최 경위 유가족은 온‧오프라인에서 진행되는 서명운동이 마무리되는 대로 특검에 ‘정윤회 문건 유출 재수사 촉구’ 서명을 전달할 계획이다.
장신중 전 총경은 <일요신문>과의 전화통화에서 “최 경위는 정윤회 문건을 덮으려 한 정부의 희생양이다. 특검이 이 부분에 대한 재수사를 진행해 최 경위의 명예를 회복해야 한다”고 말했다. 최 경위의 형은 “고맙게도 최 경위 사건에 대해 알고 있는 시민들이 먼저 다가와 위로와 함께 서명을 해줬다. 지난 2년 동안 말을 꺼내기 어려울 정도로 힘든 시간을 보냈지만 그래도 최근에는 희망이 있다는 생각이 든다”고 말했다.
문상현 기자 moon@ilyo.co.kr
한일 전 경위 ‘자백’ 청와대 회유설…“우병우·김기춘 특검에서 수사해야” 최 경위의 극단적인 선택 이유도 풀어야 할 의혹 중 하나다. 구속을 피하기 어려울 것이라는 당초 예상과는 달리 구속영장이 기각된 데다, 재판 과정에서 법리적으로 다툴 여지가 충분했는데도 다음날 스스로 세상을 떠났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 최 경위 유가족과 지인들은 ‘청와대 민정비서관실 회유설’을 가장 큰 이유 중 하나로 보고 있다. 가족들은 이를 토대로 최 경위의 죽음에 대해 “타살과 다름없다”고 주장하고 있다. 최 경위는 유서에서 “민정비서관실에서 너(한 경위)에게 그런 제의가 들어오면 흔들리는 것은 나도 마찬가지일 것”이라며 청와대에서 한 경위에게 회유를 시도했다는 내용을 남겼다. 최 경위 유가족들은 “청와대에서 하지도 않은 범행을 인정하면 선처해주겠다는 회유가 들어온 점을 보고, 더 힘들어 했던 것 같다”고 말했다. 한일 전 경위가 ‘청와대의 회유’를 받았음을 암시하는 최 경위의 유서 일부. 여기에 한 경위의 석연치 않은 행적도 최 경위에게 부담이었을 것이라는 시각도 있다. 앞서 최 경위는 구속 전 피의자심문을 받으며 판사 앞에서 “한 경위가 회유를 받았다”는 돌발 발언을 했다. 그런데 다음에 열린 한 경위 심문에서 한 경위는 전혀 다른 얘기를 했다. 최 경위의 얘기를 들었던 영장전담 부장판사는 한 경위에게 “체포되기 전 외부 압력이 있었느냐”고 물었는데, 한 경위는 “그런 적 없다”고 답했던 것이다. 앞서 ‘자백을 하면 선처를 받는다’는 제의를 받았다던 한 경위는 “상자에서 청와대 문건을 꺼내 복사했다”는 자백을 했지만 구속영장이 청구돼버렸고, 문건을 ‘세계일보’ 기자에게 건넨 혐의를 끝까지 부인하던 최 경위만 ‘한 경위에 대한 청와대 회유’를 주장하는 이상한 모양새가 됐다. 억울하면 한 경위가 더 억울한 상황인데 정작 한 경위는 회유설을 부인하고 나선 것이다. 최 경위가 숨진 이후 한 경위는 JTBC와의 인터뷰에서 회유 사실을 인정했다가 또 다시 부인하는 것을 반복했다. 한 경위는 최근에도 언론사 인터뷰를 통해 “청와대 회유가 있었다”고 주장했다. 현재 한 경위는 이 인터뷰 이후로 언론사와의 접촉은 피하고 있다. 지난 15일 국정조사에 증인으로 참석할 예정이었지만 전날(14일) 불출석 사유서를 내고 출석하지 않았다. 여기에 가족들은 검찰이 최 경위에 대한 구속영장 청구가 기각된 지 하루도 채 지나지 않아 이례적으로 재소환했던 점도 부담을 가중시킨 것으로 보고 있다. 앞서의 변호인도 “검찰에서 나(변호인)에게 따로 전화를 걸어 일정을 잡아 달라고 했다. 구속영장 기각으로 보강 수사가 필요하다는 것은 이해할 수 있었지만 이렇게 급하게 재소환하는 것은 받아들일 수 없다고 거절했다”고 말했다. 변호인에게 검찰 재소환 설명을 듣고 난 이후 최 경위는 가족들에게 전화를 걸어 상당히 괴로운 심정을 토로했다. 청와대는 당시와 마찬가지로 현재까지도 한 경위에 대한 민정수석실의 접촉은 사실무근이라는 입장이다. 하지만 뒤늦게 정윤회 씨의 아내이던 최순실 씨가 박근혜 대통령과 국정을 농단한 것으로 드러나면서 당시 청와대가 한 전 경위를 회유했는지 여부, 나아가 회유한 이유까지 조사가 불가피해졌다. 이 분야의 조사 대상은 당시 민정비서관이었던 우병우 전 청와대 민정수석과 김기춘 전 청와대 비서실장 등이 언급된다. 우 전 수석은 비선실세 국정농단을 눈감았다는 직무유기 의혹을 거세게 받고 있다. 김 전 실장의 경우 서울중앙지검에 정윤회 문건 조기 종결을 외압했다는 의혹에도 휩싸여 있다. ‘최순실-박근혜 게이트’ 수사를 앞두고 있는 박영수 특검도 임명 당시부터 최근까지 “정윤회 문건을 수사 대상으로 삼고 있다”는 입장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