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데 최근 러시아인들이 사랑해 마지않는 이 보드카 때문에 무려 58명(12월 21일 기준)이 집단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해서 충격을 던져주고 있다. 시베리아의 이르쿠츠크시에서 발생한 이번 집단 사망 사건은 다름 아닌 ‘가짜 보드카’ 때문이었다. 다시 말해 ‘가짜 보드카’에 섞여있던 공업용 알코올인 메탄올이 비극을 불러온 것. 값이 싸다는 이유로 저소득층 서민들 사이에서 중독자가 늘고 있는 ‘가짜 보드카’는 사실 러시아에서는 오래전부터 골칫거리였다.
러시아 정부가 대대적인 단속을 벌이고 있지만 쉽게 뿌리가 뽑히지 않고 있는 ‘가짜 보드카’는 주로 암시장을 통해 거래되고 있으며, 버젓이 거리 매점에서 목욕용 오일이나 스킨 토너와 같은 화장품으로도 판매되고 있어 더욱 단속이 어려운 상태다. ‘가짜 보드카’의 심각성과 함께 러시아 국민들의 신체, 정신 그리고 사회를 피폐하게 만들고 있는 알코올 중독의 문제를 살펴봤다.
가짜 보드카를 마신 주민 수십 명이 집단사망한 러시아 이르쿠츠크에 비상사태가 선포됐다. 사진은 집단사망의 원인으로 지목된 목욕용 오일 ‘보야리쉬닉’. 타스/연합뉴스
러시아에서 여섯 번째로 큰 도시인 인구 110만 명의 이르쿠츠크의 주민 수십 명이 집단 알코올 중독 증상을 보인 것은 지난 12월 17일이었다. 이틀 동안 단체로 급성 알코올 중독 증상을 보인 사람은 100여 명. 이 가운데 21일 기준으로 사망한 사람은 58명을 넘어선 상태다. 사인은 가짜 보드카에 함유된 메탄올 중독이었다.
이에 이르쿠츠크 시당국은 비상사태를 선포했으며, 문제가 된 제품을 압수하는 한편 모든 알코올 함유 제품의 판매를 즉각 중단했다. 지금까지 러시아에서는 알코올 중독으로 사망하는 사건이 심심찮게 벌어져 왔었지만 이번 사건은 규모가 크다는 점에서 상당히 이례적인 사건으로 꼽히고 있다.
이번 집단 사망의 원인으로 지목된 제품은 목욕물에 첨가해서 사용하는 목욕용 오일인 ‘보야리쉬닉’이었다. 저소득층 사이에서 보드카 대용품으로 널리 알려진 이 제품은 가장 가격이 저렴한 보드카보다도 더 저렴하다는 이유로 많은 사람들이 즐겨 마시고 있었다. 가격은 한 병에 최대 40루블(약 780원)인 것으로 알려졌으며, 심지어 2016년 초에는 자판기를 통해 대규모 세일까지 했었다. 반면 500ml 보드카 한 병의 경우 3달러(약 4000원) 정도다.
가장 큰 문제는 ‘보야리쉬닉’에 함유된 유독성 메탄올 성분이었다. 제품 용기에는 에탄올 93%, 산사나무 추출액, 레몬 오일 등의 성분이 표시되어 있었지만, 성분 검사 결과 공업용 알코올인 메탄올 성분이 다량 함유되어 있었다. 메탄올은 독성이 강한 위험물질로 보통 부동액 등에 사용되는 물질이다. 또한 제품 용기에는 ‘음용 금지’라는 경고 문구가 뚜렷이 표시되어 있었지만 많은 사람들은 이를 무시하고 마시다가 변을 당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번 사건의 희생자는 25~50세의 저소득층 서민들이 주를 이루었다.
러시아 경찰은 가짜 보드카를 유통한 일당을 체포하는 한편, 이르쿠츠크 시내 상점과 거리 매점에서 판매되고 있던 ‘보야리쉬닉’ 2000병을 압수했다.
러시아에서 가짜 보드카로 인해 발생하는 문제는 사실 어제 오늘의 일은 아니다. 러시아의 경기 불황이 지속되자 보드카 대신 값싼 알코올 대용품을 찾는 서민들이 늘어난 지는 이미 오래. 서민들이 알코올을 섭취하기 위해 보드카 대신 즐겨 마시는 제품으로는 싸구려 향수, 스킨 토너, 창문 세척제, 부동액, 의료용 알코올, 애프터셰이브 로션, 세척액 등이 있으며, 보통 이 원액을 물에 타서 마시는 방법으로 음용하고 있다.
이렇게 제조한 가짜 보드카를 주기적으로 마시는 러시아인들은 연간 1000만~1200만 명에 달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올해 초에는 러시아 보건부가 모스크바 인근의 마을을 조사한 결과 주민의 13%가 가짜 보드카를 마시고 있는 것으로 밝혀지기도 했었다.
러시아 서민들이 이처럼 가짜 보드카를 마시는 이유에 대해 독극물학 전문가인 올레그 쿠츠네초프는 “러시아 사람들은 점점 가난해지고 있다. 특히 술을 많이 마시는 사람들일수록 더 그렇다. 이들은 형편은 힘들어졌지만 알코올에 대한 욕구는 여전히 남아있다. 알코올 의존도가 높은 사람은 가게에 가서 저렴한 보드카를 사기보다는 창문 세척액 같은 대체용품을 사러 간다”라고 말했다.
러시아인들이 가짜 보드카를 마시기 시작한 것은 미하일 고르바초프 전 대통령이 집권하던 1980년대 중반부터였다. 고르바초프 정부가 러시아인들의 건강 증진 및 수명 연장을 위해 보드카 판매를 전면 금지하는 특단의 조치를 내리자 보드카를 구매할 수 없었던 러시아인들이 급기야 애프터셰이브 로션, 창문 세척액, 부동액 등을 물에 섞어 마시기 시작했던 것이다.
사정이 이러니 가짜 보드카 중독으로 인한 사망률도 심각한 수준에 이르렀다. 2013년 발간된 <알코올과 알코올 중독> 저널에 따르면, 구소련 체제 이후 알코올 중독으로 사망하는 사람들 수는 급격히 늘어났으며, 이는 에탄올과 기타 독성 물질이 다량 함유된 공업용 알코올을 마시는 사람이 늘어나면서인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주기적으로 발표되는 러시아 언론의 발표에 따르면, 의료용 살균제, 애프셰셰이브 로션 등 기타 유독성 액체를 마시고 사망하는 사람들은 매년 4만 명 이상에 달하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가짜 보드카의 문제는 사실 알코올 중독과도 맞물려 있다. 알코올 중독 문제가 해결되면 가짜 술로 인한 문제도 자연히 해결될 것이기 때문이다. 영국 <BBC>에 따르면 여섯 명 가운데 한 명이 알코올 중독에 시달리고 있을 정도로 러시아는 세계에서 가장 음주량이 많은 나라 가운데 하나다. 2011년 세계보건기구(WHO)의 보고서는 러시아 인구 1인당 연간 알코올 소비량이 15.76리터라고 밝힌 바 있다. 이는 유럽에서 네 번째로 많은 양이다.
러시아 사람들의 음주습관이 다른 나라보다 특히 위험한 이유는 유독 알코올 도수가 높은 술을 즐겨 마신다는 데 있다. 가령 러시아인들의 국민술인 보드카의 경우 알코올 도수는 무려 40도 정도다. 사정이 이러니 각종 폐해도 끊이지 않고 있는 게 현실. 가령 신경계, 심혈관계, 정신질병, 간질환 등 알코올 관련 질병 발병률이 가장 높은 나라가 러시아다.
러시아인들의 알코올 중독과 과도한 알코올 소비량은 사회, 정치, 경제, 공중보건 등 여러 면에서 러시아 사회에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다. 오죽하면 ‘푸틴의 가장 강력한 적은 보드카’라는 말까지 있을까.
러시아의 <가정폭력저널>에 따르면 배우자를 살해한 남성의 60~75%가 범행을 저지르기 전 만취 상태였던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WHO와 모스크바 연구소가 조사한 바에 의하면 폭음하는 젊은 남성들의 경우 자살할 위험은 일반인들보다 다섯 배, 그리고 알코올 중독자의 경우에는 아홉 배 더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사정이 이러니 기대 수명도 짧긴 마찬가지다. ‘유엔경제사회국’에 따르면 러시아 남성의 기대수명은 61.56세, 여성은 74.03세로, 이는 서구 유럽 국가에 비해 17년가량 낮은 것이다. 또한 러시아 정부 소속의 소비자권익감시기구는 지난 1월 알코올 중독으로 사망하는 남성은 전체 사망자수의 30%, 그리고 여성은 15%라고 발표했다.
그런가 하면 2014년 의학저널 <란셋>에 발표된 한 연구에 따르면 전체 러시아 남성의 25%가 55세 이전에 사망하는 것으로 조사됐다. 15만 명의 러시아인들을 10년 동안 추적 관찰하는 동안 8000명이 사망했으며, 매주 보드카 세 병 이상을 마신 남성의 경우, 매주 한 병 이하를 마신 남성보다 조기사망할 확률이 두 배가량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연구를 공동 진행한 옥스퍼드대학의 리처드 페토 경은 “러시아인들의 사망률은 지난 30년 동안 크게 요동쳤다. 고르바초프, 옐친, 푸틴 대통령을 거치면서 알코올 규제 방침이 끊임없이 변해왔고, 이로 인해 사회가 불안정해졌기 때문이다. 높아진 사망률의 주요 원인은 바로 보드카였다”라고 말했다.
지금까지 러시아 정부가 알코올 중독에 대해 마냥 손을 놓고 있었던 것은 아니다. 증류주 및 맥주의 심야 판매 금지, 주류세 인상 등 다양한 방법을 모색해왔으며, 이로 인해 잠시나마 상당한 효과를 보기도 했었다. 2013년에는 1인당 알코올 소비량이 13.5리터로 감소했으며, 와인과 맥주 소비량이 보드카 소비량을 앞지르기도 했다. 하지만 동시에 문제도 발생했다. 바로 합법적인 주류 판매가 줄어들자 불법적인 주류, 즉 가짜 보드카 판매량이 증가한 것이다.
이에 푸틴 정부는 알코올 소비량을 줄이는 동시에 가짜 보드카 판매를 금지하기 위한 다양한 규제책을 마련하고 있는 상태. 가령 2020년까지 연간 알코올 소비량을 8리터로 줄일 목표를 세우고, 이를 위해 보드카 가격을 세 배로 올린다거나 암시장에서 거래되는 밀주를 구매 및 판매할 경우 어마어마한 벌금을 부과하는 식으로 대책을 마련하고 있다.
이르쿠츠크 집단 사망 사건이 발생하자 드미트리 메드베데프 총리는 긴급 소집한 각료 회의에서 “더 이상 이 문제를 두고 볼 수 없다. 가짜 보드카를 시장에서 몰아내거나 판매로를 적극 통제하는 방법을 강구해야 한다”고 말했다. 또한 야당 정치인인 알렉세이 나발니는 “러시아 역사를 통털어 매년 보야리쉬닉으로 사망하는 사람은 테러 공격으로 사망하는 사람보다 더 많다”고 비난했다. 그러면서 그는 “사람들은 가난 때문에 가짜 보드카를 마실 수밖에 없다. 가난을 해결하는 것이야말로 이 상황을 해결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다”라고 강조했다.
김민주 해외정보작가 world@ilyo.co.kr
러시아의 보드카 사랑은 어디에서 비롯된 걸까 주류세 확보 위해…앞에선 규제 뒤에선 장려? 러시아 사람들은 왜 유독 보드카에 중독되는 걸까. 이에 많은 사람들은 추운 날씨와 장기 불황으로 인한 무력한 일상의 유일한 탈출구가 바로 보드카이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많은 전문가들은 근본적인 원인이 다른 데 있다고 주장한다. 바로 러시아 정부의 책임이 크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주류세를 통한 세수 확보를 위해 알코올 소비를 암암리에 촉진하고 있다는 것. 그런가 하면 구소련 전문 역사가들은 시민들로 하여금 정부에 대항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알코올 소비를 장려하고 있다고도 말한다. 사실 알코올 중독의 문제는 러시아의 역사와 맥을 같이 한다. 수백 년 동안 주류세는 러시아 정부의 주된 수익원이었다. 1860년 무렵만 해도 보드카는 정부 재원의 40%를 차지하고 있었다. 20세기 볼셰비키당이 보드카 소비량을 줄이기 위해서 노력했지만 그것도 잠시, 1925년 무렵에는 다시 보드카가 국영 상점에서 팔리기 시작했다. 스탈린은 정부 세입을 마련하기 위해 국가 독점 형태로 보드카를 생산하기도 했다. 급기야 1985년 보드카 중독을 심각하게 여긴 고르바초프 전 대통령이 알코올에 관한 규제를 엄격하게 시행했다. 음주 반대 캠페인을 대대적으로 벌였는가 하면 공공장소에서 술을 마시거나 취할 경우 높은 벌금을 부과하는 강력한 정책을 폈다. 도수 높은 증류주 판매를 금지했던 것 또한 물론이다. 이런 캠페인은 한시적으로 성공을 거두는 듯했다. 1인당 술 소비량도 감소했고, 삶의 질도 높아졌으며, 범죄율은 낮아진 반면, 기대 수명은 증가했다. 하지만 이는 오래 가지 못했다. 대다수 러시아인들 사이에서 환영을 받지 못했던 이런 강압 정책은 곧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오히려 가짜 보드카의 판매량이 급증하는 풍선 효과까지 나타나면서 비난을 받았던 것이다. [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