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의원실의 성차별을 문제제기한 글. ‘국회 대나무숲’ 페이스북 페이지 캡처.
대나무숲은 국회사무처 직원, 국회의원 보좌진 등이 글을 올릴 수 있는 익명 게시판으로, 당나귀 귀를 지닌 임금님의 비밀을 털어놓는 대나무숲 이야기에서 따온 이름이다. 12월 28일 현재 617명의 회원들이 국회 대나무숲 페이스북에 ‘좋아요’를 누른 상태다.
대나무숲 운영자는 기자와의 통화에서 “대나무숲은 20대 국회에 가장 필요한 곳이다. 언론의 스포트라이트를 가장 많이 받는 공간인 국회의 이면은 늘 어두웠고 약자에게 한없이 가혹했다. 국회의 어두운 면에 대해 침묵하고 싶지 않았다. 최대한 공감대를 형성해 고질적인 문제들을 근본적으로 해결하고 싶었다. 묵묵히 일해 온 수많은 사람들의 목소리를 대변할 것”이라고 밝혔다. 국회 직원들이 겪는 불합리한 문제들을 바로잡겠다는 의지였다.
대나무숲은 회원들의 익명을 철저히 보장하고 있다. 글 내용에 대한 진위를 확인할 수 있는 방법은 없다. 하지만 여의도 주변에선 “글 내용이 너무 구체적이라서 믿을 수밖에 없다. 저격당한 의원들이 누군지 알 만한 사람들은 알고 있다”는 목소리가 적지 않다. 대나무숲 운영자는 “익명이라서 글쓴이들의 정체를 자체적으로 확인할 수 없지만 분명 국회 직원이 아니고선 할 수 없는 이야기들을 풀어 놓고 있다”고 했다.
12월 16일 대나무숲 게시판에는 충격적인 내용의 글이 올라왔다. 한 회원은 “의원이 툭하면 직원들 손찌검은 물론이고 술 마시면 은근슬쩍 여비서를 터치하면서 밖에선 정의로운 듯이 행세하는 것을 보면, 대한민국은 절대로 바뀌지 않을 것 같다”고 밝혔다. 다른 회원은 “수행원인지 보좌관인지 모르겠지만 지하 엘리베이터 앞에 있는 방호과 여직원들을 좀 터치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딸처럼 보이는 여직원을 아무렇지도 않게 터치하는데… 오히려 팔짱끼고, 음담패설을 안 하는 것이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너무 어처구니없고 당황스럽다”고 했다.
그동안 국회의 일부 여성 직원들은 성희롱과 성추행 등으로 속앓이를 해왔다고 한다. 전직 인턴 비서는 “친했던 비서가 최근에 그만뒀다. 방문이 닫혀 있을 때마다 보좌관이 그 비서의 몸을 향해 자신의 몸을 가까이 대거나 껴안아서 수개월간 시달렸다. 비서를 성추행한 보좌관은 일을 잘한다고 소문이 나서 다른 의원실로 영입됐는데 비서는 결국 여의도를 떠났다. 지금껏 피해자만 7~8명이 넘는데 가해자인 보좌관은 일만 잘한다. 수년 동안 들키지 않고 있는데 생각할수록 화가 난다”고 토로했다.
여성 보좌진이 겪고 있는 성차별적인 피해에 관한 글도 곳곳에서 보였다. 12월 26일 한 회원은 “여자 보좌진도 다 고학력자이고 집에서 귀하게 자랐는데. 왜 심부름을 여자만 시키나. 남자가 힘이 더 좋으니 남자가 택배를 받아와야 하는 것 아닌가. 탕비실 심부름도 여자고 택배 배달도 여자가 하고 있다. 후생관 심부름도 여자다. 이제 곧 2017년인데 자꾸 조선시대, X팔년도에 하던 짓을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밝혔다. 다른 회원은 “제발, ‘우리 여비서가, 아가씨가’ 같은 단어 사용은 지양해줬으면 한다. 성별을 암시하는 단어가 아니어도 서로 소통할 수 있지 않나. 우리는 전부 같은 직원”이라고 보탰다.
몇몇 보좌진들은 열악한 노동 환경에 대해서도 억울한 심정을 털어놨다. 12월 12일 한 회원은 “연가보상비를 챙겨주지 않는 것이 원칙이라면 야간수당이라도 제대로 챙겨줬으면 좋겠다”고 밝혔다. 다른 회원은 “의원들은 자신들의 직원 월급은 최저시급도 안 되게 주고 있다. 심지어 야근에 주말 출근까지 당연하게 여기는 의원들이 최저임금을 인상하고 비정규직 차별을 철폐하라고 주장하는 것을 보면 참 웃긴다. 당을 떠나 근로자를 위한 진짜 국회의원이 한 분이라도 계셨다면…”이라고 말끝을 흐렸다.
대나무숲에선 대체로 성폭력이나 열악한 노동환경에 관한 글들이 공감을 얻고 있다. 국회의원들이 인사권을 쥐고 있기 때문에 보좌진들은 불합리한 처우들에 대해 쉬쉬하고 넘어갈 수 밖에 없다. 현행 국회법은 보좌진의 해임 절차를 명시하고 있지 않다. 의원이 보좌진에 대해 면직요청서를 제출하면 보좌진은 즉각 해임된다. 국회 관계자는 “갑자기 영감(의원)이 ‘너, 내일부터 그만 나와’하면 끝이다. 이토록 불안정한 직업도 없다. 대나무숲에 앞으로 열악한 노동환경에 관한 글들은 더욱 늘어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일부 의원들의 ‘갑질’을 암시하는 글들도 엿보였다. 12월 12일 한 회원은 “국회에 미친XX들이 많다는 것은 익히 들어서 알고 있었지만 국회 복도에서 90도로 인사시키는 미친X도 있다. 여기 군대 아니다”라고 직격탄을 날렸다. 다른 회원은 “보좌진들이 며칠씩 밤새서 만든 질의서는 읽어보라고 주면 읽지도 않고, 의원이 질의 코앞에 와서 ‘이건 뭐고 저건 뭐냐’고 물어보는데 읽어보지도 않고 어렵다고 화를 낸다. 금배지가 아깝다”고 덧붙였다.
전문가들은 다른 일반적인 집단에 비해 국회 직원들의 심리적인 불만족이 훨씬 높을 수 있다고 분석했다. 황상민 연세대 전 심리학과 교수는 “대나무숲의 내용 중에 사실이 아닌 부분도 있을 것이지만 비슷한 글들이 반복적으로 올라왔다면 국회 내의 만연한 문제다. 특히 외부에서 인정받는 힘과 현실적으로 스스로 지각된 힘 사이에 차이가 큰 조직일수록, 이 같은 불일치에서 오는 심리적인 불만족이 강하게 나타난다. 국회의원이나 보좌진들이 다른 이들을 향해 비정상적거나 돌출적인 행동을 하는 원인이 여기에 있다. 외부에서 인정받는 만큼 내부에서 서로를 인정해주거나 대우를 해주는 방안이 필요하다”고 조언했다.
대나무숲 게시판엔 흥미로운 글도 지속적으로 올라오고 있다. 특히 국회 보좌진들 간 사내 연애에 관한 내용이 폭발적인 인기를 끌고 있다. 12월 15일 게시판엔 “사내 연애 커플이 왜 이렇게 많은지 모르겠다. ‘국회는 사랑을 싣고’도 아니고…”는 푸념 섞인 글이 올라왔다. 다른 회원 역시 “계단실에서 애정 행각 좀 하지 마라. 안 들릴 것 같지. 다 들려. 제발 애정행각은 모텔에 가서 했으면 좋겠다”고 밝혔다.
최근에는 작은 소동도 일어났다. 한 회원은 “의원회관 5층에 있는 어떤 의원실 비서가 진짜 너무너무 예쁜데 말을 못 걸어서 안타까웠다. 마주칠 때마다 얼음이 되는 느낌이었다. 지난 1년간 출근이 설렜던 것은 모두 비서님 덕분”이라는 글을 올렸다. 하지만 다른 회원은 “그 비서가 이 글을 보고 얼마나 불편해 할까. 글에 대해서 어떤 이야기들을 주고받을까. 제 염려가 사실이 됐다. 보좌관들 사이에 ‘대나무숲 봤냐, 누가 예쁜 비서냐’라며 형편없는 사람들의 쓸모없는 줄 세우기가 시작됐다. 예쁘다고 평가받는 비서들의 사진이 돌았으며, 심지어는 업무 망으로 비서들의 사진을 보며 키득거리는 사람들도 있었다”고 불편한 심기를 드러냈다. 결국 앞서 글을 올린 회원의 사과로 소동은 일단락됐다.
대나무숲 운영자의 정체에도 이목이 쏠린다. 최근 회원들 사이에선 ‘국회사무처가 대나무숲을 만들었다’는 음모론이 퍼졌다. 하지만 대나무숲 운영자는 “대나무숲은 국회사무처와 정세균 의장, 우윤근 사무총장과는 전혀 관련이 없다. 저는 20대 국회의원 중 어느 분의 의원실에 소속되어 있는 일개 보좌진일 뿐”이라고 부인했다.
그런데 12월 29일 대나무숲은 돌연 운영을 중단했다. 운영자는 “국회 대나무숲에 대한 운영 중단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있었다. 이들에 대한 요구에 대해 언제까지 소모적인 논쟁을 계속해야 하는지에 대한 회의감이 들었다. 짧은 시간동안 여러 부조리하고 부도덕한 문제에 대해 공론화를 할 수 있어 행복했다. 국회 대나무숲의 운영을 중단하겠다”고 밝혔다.
최선재 기자 sun@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