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재인 전 대표가 섀도캐비닛 구성을 시사했다. 일요신문 DB
섀도 캐비닛(Shadow cabinet)은 야당이 정권 획득을 대비해 미리 구상해둔 내각이다. 양당제가 발달한 영국에선 총리 이하의 각료로 예정된 멤버가 정권교체시 그대로 내각의 장관이 되는 경우가 많은데 이를 섀도 캐비닛이라고 한다. 섀도캐비닛이 발족한 것은 1876년이었고 1907년 보수당의 N. 체임벌린이 이 말을 최초로 사용했다.
12월 20일 문재인 더불어민주당 전 대표는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당선증을 교부 받으면 곧바로 직무수행을 해야 하는 만큼, 후보와 정당 간 협의를 거쳐 어떤 내각을 구성할지에 대한 로드맵을 사전에 협의할 필요가 있다. 완전한 형태는 아니더라도 적어도 어떤 분들이 함께 국정을 수행할지에 대한 부분을 보여줄 여지도 있다”고 강조했다. 19대 대통령 선거 이전에 경제·외교·국방 등 주요 부처 장관 명단을 미리 발표하고 당선 즉시 그대로 내각을 꾸린다는 복안이다.
정치권 일각에선 “헌법재판소가 박근혜 대통령을 탄핵하면 섀도 캐비닛은 좋은 아이디어가 될 수 있다”는 긍정적인 반응이다. 윤태곤 더모아 정치분석실장은 “헌재가 탄핵을 인용하면 두 달 뒤 대선을 치러야 한다. 내각을 구성할 인수위 기간도 없기 때문에 섀도캐비닛은 괜찮은 방법이다. 섀도캐비닛을 도입하면 대통령 후보와 내각을 구성할 멤버들이 팀으로 국민들에게 검증을 받을 수 있는 기회가 생긴다”고 설명했다.
다른 대권 잠룡들은 신중한 태도를 보이고 있다. 안철수 국민의당 전 상임대표는 “인수위 없는 정권의 섀도캐비닛은 장점이 많지만 법률적 기반 없이 구성하면 선거법상 자칫 매수죄가 될 우려가 있어 대비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손학규 민주당 전 고문은 “인수위 없이 대통령이 될 경우를 생각해 섀도캐비닛을 준비한다고 하는데 자칫 대선이 끝나면 공수표가 되는 일이 없어야 한다. 현재 상황에서 섀도캐비닛을 제대로 내놓을지 의문”이라고 밝혔다. 영국 의회의 섀도 캐비닛이 우리나라 실정과는 맞지 않는다는 점을 강조한 것이다.
국민의당은 문 전 대표의 섀도캐비닛을 향해 융단폭격을 가하고 있다. 국민의당 이용주 대변인은 “제1야당의 유력한 대선주자 처신치고는 가볍기 그지없다. 떡 줄 사람은 생각도 않는데 김칫국부터 마시는 격”이라고 직격탄을 날렸다. 국민의당 관계자 역시 “마치 대통령이 된 것 같다. 문 전 대표가 섀도캐비닛으로 독재, 독단, 독선의 극치를 보여주고 있다. 지금 시국에서 내각이라니…”라고 보탰다.
실제로 문 전 대표는 최근 자신감 있는 행보를 이어가고 있다. 그는 한 인터넷 팟캐스트에서 대권 출마가 유력한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에 대해 “내가 이기지 않겠느냐”고 밝혔다. 전날 열린 ‘책임안보, 강한 대한민국’을 주제로 한 포럼에선 “준비된 사람이란 것이 제 브랜드다. 국민 편을 가르는 가짜 보수가 종북”이라고 말했다.
18대 대선 당시 문재인 캠프에 참여했던 한 인사는 “야권 1등 주자의 여유 아니겠나. 지금 바로 대선을 하면 문 전 대표가 당선된다. 과거에 우유부단한 태도들 때문에 선거에서 졌다는 지적이 많았는데 지금은 확실히 달라졌다”고 평가했다.
하지만 비문 진영은 문 전 대표의 이 같은 태도가 대권가도를 가로막을 수 있다고 우려한다. 일각에선 “벌써부터 친문 의원들 사이에 A 의원은 보건복지부 장관, B 의원은 외교부 장관”이라는 소문이 돌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비문 성향의 한 보좌관은 “소문이 과장된 측면이 있지만 친문 인사들은 발 빠르게 움직이고 있다. 캠프의 주축이 50대 의원들인데 최근 이들의 태도가 더욱 오만해지고 있다. 마치 정권을 잡은 것처럼 분란을 일으키고 있는데 섀도 캐비닛도 그 연장선이다”고 귀띔했다.
친문진영은 안팎으로 들리는 비판에 대해 펄쩍뛰는 모습이다. 문 전 대표 측 김경수 의원은 기자와의 통화에서 “다분히 정략적이고 정치적인 비난이다. 섀도 캐비닛은 우리나라에만 있는 제도는 아니다. 우리가 내각 명단을 발표하겠다는 것도 아니다. 문 전 대표가 보궐선거 특성에 맞춰 국민들에게 선거 직후에도 안정적으로 국정을 운영할 수 있다는 사실을 원론적인 의미에서 강조한 것”이라고 반박했다.
비문 진영에서는 여전히 섀도캐비닛을 향해 회의적인 시선을 거두지 않고 있다. 대권 잠룡에 불과한 문 전 대표가 벌써부터 ‘조각권’을 행사하는 모습으로 비춰질 우려가 있다는 견해다. 익명을 요구한 민주당의 한 비서는 “문 전 대표의 대권 욕심이 뻔히 보인다. 헌법에 규정된 대통령의 조각권을 자신 마음대로 행사하려는 이유를 모르겠다. 차라리 ‘정파와 이념을 떠나서 합리적인 인사로 구성할 섀도캐비닛을 함께 논의하자’고 말했다면 국민들도 다른 정당들도 수긍할 여지가 있다. 하지만 섀도 캐비닛 발언을 뜯어보면 민주당을 친문으로 사당화해놓고 쉽게 본선 가려고 하는 모습이 보인다. 자신감이 이젠 독선으로 보일 지경”이라고 비판했다.
친문 측은 이러한 비판이 ‘1등 주자, 문재인 때리기’에 불과하다는 입장이다. 김경수 의원은 “괜히 섀도캐비닛을 붙잡고 늘어지는 것은 꼬투리 잡기다. 문 전 대표가 1등이기 때문에 당연히 어느 정도 비판은 감수해야 한다. 하지만 정략적인 행태는 국민들도 원하는 모습은 아니다. 대한민국을 어떻게 개혁해 나갈 것인지에 대해 비판하고 토론해야 하는데 이전투구식으로 섀도캐비닛을 비판하는 행태를 보여서는 안 된다”고 잘라 말했다.
전문가들은 섀도캐비닛 구상에 대해 조심스러운 전망을 내놓고 있다. 윤태곤 실장은 “가진 것이 많은 사람이 오만할 수 있는 반면 가진 것이 없는 사람은 오만해 질 수 없다. 대권 주자가 강한 면모를 보일수록 비판론도 함께 올라간다는 뜻이다. 물리적인 법칙과 비슷하다. 섀도 캐비닛에 대한 비판이 지나친 감이 있다. 다만 대통령 후보와 철학을 같이한 사람으로 섀도캐비닛을 꾸리면 캠프에 기여도에 따라 줄세우기식의 내각이 출범할 수 있다. 중립적 인사들은 이름을 올리기부터 부담스럽다. 그 나물에 그 밥인 내각이 될 우려를 차단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조언했다.
최선재 기자 sun@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