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언이라 정확한 표현이 아닐 수도 있지만 반기문 유엔 전 사무총장의 비(非)새누리당 정서는 그만큼 강하다고 한다. 박근혜 대통령이 2015년 미국 순방길에서 시간을 쪼개 3박4일간 그를 7차례나 만나고, 친박계 핵심인 최경환 의원은 2016년 초 스위스 다보스포럼에서 거의 5시간이나 기다려 불과 20분 영접(?)하는 공을 들였지만, 결론은 허사였던 것 같다.
게다가 반 총장이 직접 밝힌 입장도 미국의 외교 전문지 포린폴리시(FP)와의 인터뷰를 통해 등장했다. 신당을 통한 독자세력화, 일명 독자 창당은 “극히 어렵다”며 제3당(third party)을 발판으로 대권에 도전할 것을 시사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 인터뷰는 지난 16일, 즉 새누리당에서 혁신보수신당(가칭)이 떨어져 나오기 전에 진행돼 3당이 개혁보수신당을 뜻하는 것인지, 제3지대를 말하는 것인지는 명확치 않다.
반 총장은 “일련의 위기를 맞은 한국을 이끌어가야 한다는 책무를 느끼고 출마를 심각하게 고려하고 있다” “많은 사람이 대선 출마를 긍정적으로 고려하라고 말하고 있다”는 등의 표현으로 사실상 출마를 기정사실화했다.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은 1월 중순 귀국 후 곧바로 제3당으로 들어가 대선 가도를 향할지, 독자 행보를 이어가다 막판 극적 합류할지 등 선택지를 두고 고민 중이라고 전해졌다. 연합뉴스
국내에서 정치적 기반이 전무한 반 총장이 기존의 정당으로 들어가 본인은 이름값으로, 정당은 당원조직과 자금으로 시너지 효과를 낸다는 시나리오는 어찌 보면 상식적이기도 하다. 문제는 합류의 시기다. 1월 중순 귀국 후 곧바로 그가 말한 3당으로 들어가 대선 가도를 향해갈지, 아니면 독자 행보를 이어가다 막판 극적인 합류나 연대로 깜짝 효과를 도모할지의 선택지를 두고 고민 중이라고 한다.
그리고 그 고민은 ‘아이젠하워 모델’로 좁혀졌다는 후문이다. 제2차 세계대전을 승리로 이끈 미국의 전쟁영웅 드와이트 아이젠하워는 1952년 11월 대선을 앞두고 공화당과 민주당 모두로부터 영입 제의를 받았지만 홀로 행보를 이어갔고, 막판 공화당 경선에 뛰어들면서 당선된 바 있다. 기존 정당 후보와 차별화하면서 몸집을 키운 뒤 노선과 정서에 맞는 곳을 선택하는 방법이었다.
반 총장의 국내 정치 자문그룹에 속한 한 인사는 “한국의 정치지형상 기존 정당에 속하지 않을 수 없다. 지난 18대 대선에서 새 정치를 내걸었던 안철수 후보도 결국 문재인 후보와 단일화하지 않았는가”라며 “대신 시기는 조정될 수 있을 것으로 본다”고 했다.
그러면서 반 총장 측에서는 향후 대권 행로에서 발생할 사안별로 과거의 사건에 비추어 반면교사로 삼을 부분과 반대로 모방하고 표절해야 할 부분을 연구·조사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일례로, 반 총장 측은 2014년 전국동시지방선거 서울시장 새누리당 경선에 뛰어든 김황식 전 국무총리 모델은 답습하지 않는 것으로 정리했다고 한다.
이는 당시 미국에 체류 중인 김 전 총리가 새누리당 친박계의 러브콜에 부랴부랴 귀국해 조직과 자금을 들인 거대 캠프를 구성한 것을 뜻한다. 마치 세 과시를 하듯 인(人)의 병풍을 쳤지만 정몽준 후보 앞에서 무릎을 꿇은 바 있다. 당시 친박계는 새누리당의 주류였지만 소용없었다.
반대로 반 총장 측에서는 역대 대통령 경선 과정과 본선에서 가장 성공적이었던 대선전을 2007년 17대 대선으로 보고 있다. 한나라당 이명박 박근혜 손학규 후보의 경선은 본선보다 치열했고, 이명박 대통령은 숱한 의혹과 잡음 속에서도 큰 표차로 당선됐다. 전국의 인재를 모았고, 핵심 그룹의 대선 스케줄도 시의적절해 ‘경제 대통령’ 이미지를 공고히 한 결과였던 것으로 보고 있다.
그래서 반 총장 측에서도 외교·안보·통일의 이미지를 각인시킬 수 있는 방법으로 대선전을 기획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김황식 모델에는 X표를, 이명박 모델에는 O표를, 하는 식으로 추구하는 모델을 좁혀가는 작업인 것이다.
문제는 현재 반 총장 의중이 수직적으로 분할되고 있다는 점이다. 반 총장을 돕는 자발적 자문그룹은 현재 서울에서만 여러 개가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친이계 인사가 중심이 되는 ‘광화문팀’, 지난 총선 당시 새누리당으로부터 버림받은 낙천 후보들이 중심이 된 ‘여의도팀’, 과거 각 매체 워싱턴 특파원 그룹의 정보제공그룹, 외교부 출신 가신그룹, 청명회 등 충청 출신 고위공직자 그룹 등등이다.
하지만 이들 간에는 소통이 없고, 반 총장은 각각에 의사를 핫라인을 통해 전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현재 반 총장을 둘러싼 여러 관련 보도가 일체감이 없이 산발적이고 중구난방인 것이다. 한 관계자는 “우리는 소통하는 것이 분명하지만 저쪽 팀은 솔직히 모르겠다”고 했고, 반대로 다른 인사는 “우리가 핵심이 될 것”이라고 자신했다.
새누리당을 벗어나 국회의원 30명의 교섭단체를 만든 개혁보수신당은 반 총장 영입에 사활을 걸고 있다. 반 총장과의 교감이 있는지 없는지 불분명하지만 최근 반 총장과의 관련 보도 빈도가 가장 잦은 곳이 신당이다. 황영철 의원이 “내밀한 소통을 이어가고 있다”거나, 김무성 의원 측이 오래전부터 교감해 왔다는 보도에 “개인적으로 연락한 것은 없다”는 식의 해명자료를 내는 등으로 아리송한 양측 관계가 거의 매일 보도되는 식이다.
신임 원내대표로 추대된 주호영 의원은 최근 손학규 전 민주당 대표에게도 러브콜을 보내면서 신당의 덩치를 키우는 데 열심이다. 대선을 겪었던 인물들 중 친박과 친문을 뺀 모든 스펙트럼의 인사를 영입해 반 총장과의 ‘경선 흥행’을 도모하겠다는 플랜으로 읽힌다.
특히나 신당으로서는 신당행을 결정하지 못한 새누리당 중립지대 의원, 특히 충청권 의원들의 영입을 위해선 반 총장을 불러들여야만 하는 절대 과제를 풀어야 한다. 이미 정진석 의원은 “반 총장 귀국 후 거취를 정하겠다”고 밝힌 바 있고, 경대수 박덕흠 이종배 의원은 미국 뉴욕으로 날아가 반 총장에게 “길을 함께 하겠다”고 약속하기도 했다. 새누리당의 초·재선 의원들 사이에서도 대선 후보를 내지 못할 수도 있는 새누리당 잔류보다, 반 총장 등 거물급을 잉태할 수 있는 신당행을 고민하고 있다.
문제는 반 총장이 중립지대에서 얼마만큼 지지율을 이어갈 수 있을지 여부다. 귀국을 전후로 해서는 일부 컨벤션 효과(큰 이벤트 후 지지율이 반짝 상승하는 현상)의 덕을 보겠지만 반기문만의 메시지나 행보가 없다면 지지율을 깎아먹을 수도 있다는 얘기다. 그 사이 양강구도를 형성한 문재인 민주당 전 대표가 적극적인 행보를 이어간다면 밴드왜건 효과(대세를 따라가는 현상)로 허우적댈 가능성도 크다.
가장 측근으로 분류되는 외교가(街) 그룹 중에서 정무적 판단을 적절하게 내려 큰 판을 성공적으로 이끈 인물이 없다는 점도 약점으로 꼽힌다. 지난 5월 말 반 총장이 국내에 체류하며 경북 안동 등을 방문했을 당시 지나친 정치적 행보로 구설에 휩싸였던 것도 같은 맥락의 지적이다. 대권 후보로서는 일거수일투족에 정치적 해석이 가미돼 가뜩이나 신비감에 휩싸인 반 총장의 작은 구설은 큰 실망으로 다가올 수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이정필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