따라서 승선근무예비역이 가장 두려워하는 상황은 ‘배를 탈 수 없을 때’가 된다. 최근 이런 상황을 이용한 해운·수산업체의 ‘갑질’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항해 도중 다친 승선근무예비역에게 “치료한다면서 복무 시간 다 때울 거냐?”고 압박해 제대로 된 치료 없이 승선을 종용하는 사례가 발생했다. 일부 해운·수산업체 인사팀은 “치료를 이유로 승선을 거부하는 승선근무예비역은 차라리 받지 말고 군대로 보내 버리자”며 담합했다는 의혹까지 제기됐다. 한 승선근무예비역은 제때 치료를 받지 못해 평생 후유증까지 얻었다.
승선근무예비역은 전시나 사변, 혹은 이에 준하는 비상 상황 시, 긴급 물자 및 군수물자 수송을 담당하는 대체 군복무요원이다. 현역 대상자 가운데 해양계 대학교, 전문대학 또는 고등학교 등 해양수산부 장관이 지정하는 교육기관에서 정규교육과정을 마치고 항해사·기관사의 면허를 소지한 사람이면 지원 가능하다. 첫 승선 뒤 5년 이내에 해운·수산업체 소속으로 3년을 배 위에서 근무하면 해군 병장으로 제대한다. 2008년 1월부터 시행돼 2016년에는 해운·수산업체 130곳에서 1000명을 선발했다.
문제는 일부 해운·수산업체가 운항 중 발생한 사고를 적절하게 처리하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2011년 1월부터 2013년 12월까지 A 해운 등에서 승선근무예비역으로 근무한 B 씨(25)는 지난 11월 발목 등 부위의 5차 수술을 5일 앞두고 수술을 진행할 수 없다는 병원의 연락을 받았다. 근무 중 부상으로 4차까지 수술비를 대던 회사가 수술비 지급을 거부한 탓이다. B 씨는 2013년 12월 운항 중 선체 계단에서 2.5m 아래로 떨어지며 발목이 부러졌다. 회사의 늑장 대처로 B 씨는 평생 3년마다 수술이 필요하다는 진단서를 받았다. 4차 수술까지 치료를 지원하던 회사는 B 씨의 진단서를 받아 든 뒤 “선원법에 따라 일시 보상금 외엔 줄 수 없다”고 입장을 바꿨다.
회사의 제안을 받아 든 B 씨는 분노할 수밖에 없었다. 회사가 이제까지 선원법을 안 지킨 탓에 상황이 이렇게 악화됐기 때문이었다. B 씨는 2012년 8월 항해 도중 유류청정기 작업을 하다 흘러내린 기름에 미끄러져 1차 발목 인대 부상을 당했다. 하지만 회사는 두 달이 지난 그 해 10월에야 B 씨를 배에서 내려줬다. 선원법에 따라 병원비와 치료기간 중 월급을 줘야 했던 회사는 치료비와 급여는커녕 치료조차 끝내지 못한 B 씨에게 “특례생은 회사 계획대로 움직여야 한다. 왈가왈부하지 말고 배에 타라”며 12월에 승선을 종용했다. 게다가 회사는 선원법을 어기고 사고 내용을 항만청에 보고하지도 않았다.
배에서 그물에 싸인 채 하선 중인 B 씨. 사진=B 씨 제공
발목이 부러진 B 씨는 회사에 하선을 요구했다. 회사는 인력 부족 등의 이유로 이를 거부했다. B 씨는 부러진 발목을 파스 3장으로 버티며 10일 뒤 울산항에 도착했다. 회사는 “119나 해양경찰의 도움을 받아 들것에 실리고 싶다”고 피력한 B 씨를 화물 하역용 그물에 실어 뭍으로 옮겼다. 이 과정에서 B 씨의 발목은 또 다시 꺾였다.
B 씨는 “119나 해양경찰을 불러 사고 발생이 알려질 경우 회사 입장에서는 처리할 일이 많아지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선원법에 따르면 사고가 발생했을 때 관련 회사는 해양수산부의 사고 조사를 받아야 한다. 하지만 업체 대부분은 관공서의 조사를 꺼리는 탓에 사고 발생을 신고하지 않고 있다. 게다가 회사는 B 씨에게 “일반 의료보험으로 치료하라. 치료비는 나중에 정산해주겠다”고 말한 것으로 드러났다. 선원은 바다 위에서 부상당할 경우 일반 의료보험이 아닌 선주상호보험 처리가 필수다.
B 씨는 이런 내용을 근거로 병무청과 해양수산부, 선주협회 등에 회사를 신고했다. 병무청은 수시평가에서 A 해운에 부당한 선원 대우로 벌점 25점을 부과했다. 건강보험공단은 선주상호보험으로 처리할 선원의 사고를 일반 의료보험으로 처리했다며 부당이익금을 환수했다. 부산해양수산청 근로감독관에게 낸 진정에 회사는 “취하하면 지급 안 한 급여 입금해주겠다”며 취하를 종용하기까지 했다. B 씨가 거절하자 회사는 조사 하루 전에 가까스로 급여를 입금했다.
A 해운 해무팀 관계자는 “B 씨의 1차 부상 때 일반보험으로 처리하라고 한 이유는 계단에서 미끄러졌기에 직무 외 부상이라 그랬다. 급여를 주지 않은 부분은 나중에 알고 나서 지급했다. 2차 부상 때 그물로 옮긴 이유는 배 안에 들것이 없었다. 게다가 B 씨가 119나 해양경찰을 적극적으로 불러달라 요청하지 않았기 때문”이라며 “선원법에 따라 적절한 보상을 해주려고 준비 중”이라고 말했다.
선원에게 손가락은 가장 빈번한 부상 부위다. 하지만 제대로 된 치료나 보상은 어렵다는 게 선원 대부분의 설명이다. 사진=제보
이와 관련 병무청 관계자는 “처음 듣는 이야기이다. 부상 시 부당한 대우를 받은 사람은 업체의 할당과 관계 없이 이동 근무할 수 있도록 최근 법을 개정했다”며 “담합 등의 문제는 처음 들었다. 심각한 상황일 경우 사실 조사에 들어갈 것”이라고 밝혔다.
요양보상과 일시보상 사이…‘불구자 됐는데 먹고 떨어져라?’ A 해운은 법무법인의 문을 두들겨 선원법의 요양보상과 일시보상 사이의 맹점을 파고들었다. 선원법 보상 방법 가운데 하나인 요양보상은 “회사가 부상 선원의 완치까지 요양 비용을 지급해야 한다”고 명시하지만 또 다른 방법인 일시보상은 “2년이 지나도 치유가 안 되면 산재법에 따라 일시 보상만 하면 책임을 면할 수 있다”고 한다. 회사는 선원법의 이런 맹점을 찾아 B 씨에게 “약 4년치 연봉을 일시급으로 지급하겠다”고 말했다. B 씨는 수술 1회에 1년치 연봉이 필요한 상황이다. 평생 3년마다 받아야 할 수술을 회사는 “4회분만 지급하겠다”고 공언한 상태다. 한 편에서는 치유될 때까지 비용을 지급하라면서 한 쪽은 2년으로 한정해 선원법의 보상 조건은 양립하고 있다. 회사 입장에서는 장기간 요양이 필요한 부상자에게 장해보상 일시금을 쥐어주는 게 비용을 절감할 수 있다. 결국 선원법의 요양보상은 의미가 없다는 해석에 무게가 실린다. 한 승선근무예비역은 “불구의 몸이 되는 사람들이 제대로 치료와 보상을 받을 수 있도록 하루 빨리 선원법이 개정돼야 한다”며 “업계는 근무할 사람이 없다고 매번 아우성이지만 정작 사고가 발생하면 자신에게 유리한 법안만 뽑아 쓴다. 기업부터 각성하고 제대로 된 안전장치를 마련해야 배로 향하는 선원이 늘어날 것”이라고 말했다. [최] |
해고당한 한진해운 승선근무예비역 탈 배 없어 발 동동 한진해운에 따르면 한진해운 전체 한국인 해상직원 500명 가운데 승선근무예비역은 163명이다. 한진해운은 청산 절차에 들어가며 모든 해상직원에게 해고를 통보한 상태다. 직장을 잃은 승선예비근무역 가운데 일부는 채워야 할 승선 근무가 얼마 남지 않은 상황에서 새로운 회사를 찾아야 할 상황에 놓였다. 하지만 회사 대부분은 3년 만기 근무할 직원을 원할 뿐 단기간 근무 직원에 대한 관심은 적은 상태다. 얼마 근무하지 않을 승선근무예비역을 고용해 봐야 인수인계 등 적응만 하다가 제대로 활용할 수 없는 탓이다. 한 승선근무예비역은 “사실 그냥 배만 타면 바로 일을 시작할 수 있는데 업체에서는 관리가 쉽다는 이유로 3년 만기 일할 근무자만 찾아서 일 자리를 알아보는 게 쉽지 않다”고 토로했다. 일부 승선근무예비역은 최악의 상황에는 근무한 기간 4분의 1만 인정받은 뒤 현역으로 가야 할 상황에 놓였다. 병무청은 한국선주협회와 한국선박관리협회 소속 회사가 업체에게 한진해운 해고 인력을 우선 채용하도록 요청하고 승선 기한을 6년으로 연장할 계획이다. 하지만 그 어떤 기약도 없는 상태라 승선근무예비역의 가슴은 타들어 간다. 이와 관련 병무청 관계자는 “해고 통보를 받은 한진해운 승선근무예비역이 이동할 수 있는 회사는 꽤 있다”며 “사실 한진해운은 업계 최고 대우로 유명하다. 이동하려는 회사에서 그 정도 수준을 맞춰줄 수 없다는 이유로 문제가 생긴 부분도 있다. 승선근무예비역의 피해를 최소화할 수 있게 최선을 다 하겠다”고 했다. [최] |
최훈민 기자 jipchak@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