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수서경찰서는 계원의 곗돈을 빼돌려 가로챈 혐의 등으로 강남의 한 낙찰계 계주 윤 아무개 씨(여·60)를 입건했다고 지난 2일 밝혔다. 경찰에 따르면 윤 씨는 계원 5명의 곗돈 12억 원을 지급하지 않았으며 계원 5명 가운데 한 명에게는 10억 원을 빌린 뒤 갚지 않은 혐의도 받고 있다.
강남 귀족계 ‘다복회’ 계주로 300억 넘는 돈을 가로챈 뒤 3년 넘게 징역살이를 했던 윤 아무개 씨가 또다시 곗돈을 가로챈 혐의로 입건됐다. 2008년 ‘다복회’ 사건으로 체포 당시 모습. 연합뉴스
번호계는 계에서 가장 빈번하게 사용되는 방식이다. 목돈이 급하게 필요한 사람과 금전적으로 여유가 있지만 은행 등 금리가 성에 차지 않는 사람이 모였을 때 비로소 시장이 형성된다. 가장 먼저 곗돈을 타가는 사람이 계에서 정해진 이자를 납부하게 된다. 총 10명이 모여 월 1000만 원씩 납부하는 월 이자 1% 계의 경우, 가장 먼저 1억 원을 타가는 사람은 곗돈 1000만 원에 먼저 가져간 1억 원의 이자 1%인 100만 원을 합친 1100만 원을 달마다 곗돈으로 낸다. 두 번째로 곗돈 1억 원을 받는 사람은 첫 번째로 곗돈 가져간 사람이 낸 이자 100만 원도 함께 가져가는 식으로 이뤄진다. 10명이 차례대로 돈을 가져가면 마지막에 타는 사람은 결국 1억 1000만 원을 얻는다. 10개월의 이자가 10%에 달한다.
낙찰계 역시 번호계처럼 순서에 따라 일정 금액을 납입하는 구조다. 계원끼리 친목을 기초한 번호계와 달리 서로 누가 참여하는지 모른다는 특징을 가진다. 게다가 받을 수 있는 금액이 번호계에 비해 큰 편이다.
10명이 달마다 1000만 원씩 내 1억 원을 조성하는 낙찰계의 경우 먼저 자신이 타고 싶은 금액을 적게 된다. 낮은 금액을 적어낸 순서대로 곗돈이 지급되는데 첫 번째 계원이 5000만 원을 적어 낙찰될 경우 첫 달 10명이 모은 1억 원 가운데 첫 번째 계원에게 5000만 원을 지급하면 5000만 원이 남는다. 남은 5000만 원은 돈을 가져가지 않은 9명이 각각 약 555만 원씩 나눠서 갖는다. 다음으로 낮은 가격을 쓴 사람은 다음달 첫 달과 같은 방식으로 적어낸 돈을 지급받은 뒤 남은 돈을 9명이 다시 나눠 갖게 된다. 계 경험자에 따르면 마지막에 돈을 가져가는 사람의 수익률은 늘 번호계에 수익을 훌쩍 뛰어넘는다.
경찰은 “윤 씨가 조사에서 ‘돈을 빼돌린 게 아니라 상황이 좋지 않아 주지 못한 것’이라고 진술했다. ‘돌려막기’ 식으로 곗돈을 지급해 곗돈 타는 순서가 뒤쪽인 계원들이 피해를 봤다”고 밝혔다. 따라서 추가 피해 신고가 접수되면 피해 금액은 더 커질 것으로 예상했다. 손해를 보고 신고를 꺼리는 이들도 있다. 이와 비슷한 유형으로 사기를 당했던 한 가수는 “유명세를 타는 사람일수록 이런 사건이 발생하면 혼자 가슴 앓이만 한다. 그 어떠한 대응도 하지 못한다. 고소를 하는 순간 언론에 노출되는데 돈 조금 잃는 게 이미지를 구기는 것보다 낫기 때문”이라며 “사기 칠 생각을 하는 사람은 이런 유명인의 속사정을 아주 명확히 잘 알고 있다. 늘 경계해야 하는데 ‘인기가 언제 없어질지 모른다’는 압박감에 돈을 조금 더 벌 수 있다는 소리만 들리면 많은 유명인은 그냥 훅 넘어가기 마련”이라고 말했다.
실제로 지난 2008년 윤 씨가 도화선이 돼 무더기로 공개된 강남 부유층 계원 가운데 상당수가 유명인으로 채워졌었다. 2008년 11월 17일 공개된 다복회 계원에는 공기업 전 사장의 부인과 외교통상부 간부급 인사의 부인, 국정원 간부급 인사의 부인, 정보통신부 옛 장관 부인 포함돼 있었다. 다선 국회의원의 사돈, 국회의원의 부인 등 정치권 인사 측근과 기업 대표의 가족, 옛 경찰청장의 부인 등도 있었다. 여기에 가수와 코미디언 등 연예인도 포함됐다는 증언까지 쏟아져 나왔다.
1990년대 후반부터 강남에서 유명한 인테리어 사업자였던 윤 씨는 호쾌한 성격과 정확한 일처리로 강남 일대에서 인맥을 늘렸다. 그는 사업을 벌리며 알게 된 부유층과 유명인을 계원으로 영입해 2001년 계 모임 다복회를 설립한 뒤 그는 ‘아무나 가입할 수 없는 계’로 다복회를 성장시켰다. 당시 금색 다복회 글씨가 새겨진 빨간 수첩은 강남 부유층 사이에서 ‘신분의 상징’으로 유명세를 탔다.
윤 씨는 2006년 4월부터 2008년 10월까지 강남 부유층을 상대로 “세금도 내지 않고 이만한 돈벌이가 없다”며 계원 148명을 모집해 374억 1368만 원을 받았다. 문제는 받은 돈을 다른 명목으로 사용하며 생겨났다. 사업자금 등 용도로 돈을 사용하다 돈이 막혔던 윤 씨는 사채를 끌어 ‘돌려막기’를 하다 결국 사채 200억 원에 이자만 10억 원을 넘기는 상황에 처했다. 2008년 10월 27일 윤 씨가 잠적하자 계원의 신고로 강남 귀족계의 민낯은 세상에 알려졌다. 윤 씨는 그 해 11월 12일 언론이 자신을 뒤쫓기 시작하자 경찰에 자수했다.
해당 사건 피해자는 133명에 피해금액은 최종 55억 749만 원으로 밝혀졌다. 2010년 1월까지 끌고 간 3심에서 대법원은 윤 씨에게 징역 1년 6월이 확정됐다. 검찰은 수사를 멈추지 않았다. 이후 윤 씨의 추가 범행도 밝혀냈다. 검찰은 또 다른 계원 15명에게 21억 8154만 원을 받는 등 총 67억여 원을 추가로 가로챈 혐의로 윤 씨를 기소했고 대법원은 2011년 3월 징역 2년을 선고한 원심을 확정했다. 윤 씨는 총 3년 6월을 감옥에서 보냈다.
계는 늘 위험 요소를 가지고 있다. 그런데도 또 다시 대형 사기 사건이 발생한 이유는 계의 특성 탓이다. 위험하더라도 시중에서 얻을 수 없는 고수익에 이자세 15.4%를 내지 않아 큰 규모의 자산가 사이에서는 늘 인기가 많다는 후문이다. 게다가 낙찰계는 익명성까지 보장되니 ‘누군가’에게는 고수익에 탈세까지 보이지 않게 재산을 증식하는 가장 좋은 길이다. 윤 씨는 이런 강남 부유층의 이면을 읽었다. 이들 사이에서 ‘계 시장’이 절대 사라질 수 없다는 점을 간파했다. 강남 부유층의 기억은 5년도 채 되지 않아 재부팅 된 셈이다.
최훈민 기자 jipchak@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