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화 의지를 드러낸 리카르도 라틀리프. 사진=서울삼성썬더스 공식 홈페이지.
2012년부터 한국프로농구연맹 리그(KBL)에서 활약하고 있는 리카르도 라틀리프가 지난 1일 경기를 마치고 갑작스레 꺼낸 말이다. 우리나라와 국제대회에서 경쟁하는 일본, 대만, 이라크 등 아시아 국가가 귀화선수 합류로 전력 상승효과를 보고 있는 상황에서 라틀리프의 발언은 많은 이들의 이목을 집중시키기에 충분했다. 농구계에서는 수년 전부터 귀화 선수의 필요성에 대해 갑론을박이 벌어져 왔고 혼혈선수의 특별귀화 등 다양한 시도도 있었다. 시선을 다른 종목으로 돌리면 외국인 선수가 대한민국 국적을 취득하고 활약하는 것은 더 이상 새삼스러운 일이 아니다.
라틀리프의 귀화가 실제 추진된다면 특별귀화 절차에 따라 진행될 것으로 보인다. 외국인이 우리나라에서 국적을 취득하는 절차로는 일반귀화와 특별귀화로 나뉜다. 라틀리프는 5년 이상 대한민국에 거주해야 한다는 일반귀화 조건에 부합하지 않는다. 따라서 라틀리프는 특별귀화 절차를 밟아야 한다. 지난 2010년 문화, 예술, 체육 분야에서 우수한 외국 인재는 국적심의위원회 심의를 거쳐 복수국적을 취득할 수 있도록 국적법이 개정됐다.
이전에도 농구계의 귀화 논의는 있었다. 문태영·태종 형제, 이승준·동준 형제, 전태풍 등 일부 한국계 혼혈 선수들이 귀화해 리그에서 활약하기도 했다. 이승준과 문태종은 각각 광저우아시안게임과 인천아시안게임에 대한민국 국가대표로 출전해 은메달과 금메달을 목에 건 바 있다.
라틀리프의 경우는 그가 혼혈이 아닌 순수 미국인이라는 점에서 문태종, 이승준 등과 차이를 보인다. 이 같은 순수 외국인의 귀화 논의가 농구계에서 처음 있는 일은 아니다. 수년 전부터 귀화선수의 필요성에 대한 논의는 있었고 2014년 아시안게임을 앞두고 실제 추진되기도 했다. KBL과 대한농구협회가 포워드 애런 헤인즈의 귀화 절차를 밟은 것. 하지만 협회와 KBL이 국제 규정을 숙지하지 못해 헤인즈의 국가대표 합류는 허무하게 무산됐다.
라틀리프가 귀화 의지를 내비치며 농구계는 대체적으로 이를 환영하는 분위기다. 라틀리프는 농구계에서 애타게 찾던 센터이며 대학 졸업 후 곧장 한국행을 결정, 프로 데뷔 이후 줄곧 한국에서만 활약한 ‘한국형 빅맨’으로 불린다. 종종 외국인 선수들에게서 일어나는 사생활 문제나 팀내 불화 등도 일으키지 않아 지도자들로부터 긍정적인 평가를 받고 있다.
라틀리프와 같은팀서 뛰는 혼혈귀화선수 문태영. 사진=서울삼성썬더스 공식 페이스북.
# 다른 종목의 귀화 선수들
농구에선 순수 외국인 선수의 귀화 사례가 없지만 다른 종목으로 눈길을 돌리면 드문 일은 아니다. 프로 축구에서는 일부 외국인 선수들이 일반귀화를 통해 한국인 선수와 같은 대우를 받으며 활약했다.
일반귀화의 길을 개척한 축구선수는 타지키스탄 출신 골키퍼 신의손이다. 그는 1992년 K리그에 데뷔해 단숨에 최고의 골키퍼로 군림하며 리그 내 ‘외국인 골키퍼 열풍’을 이끌었다. 그의 활약에 많은 팀이 골키퍼 자리에 외국인을 영입하자 리그에서 외국인 골키퍼 금지 조항이 생기기도 했다. 이 같은 조항으로 국내에서 더 이상 뛸 수 없게 된 신의손은 이후 귀화 자격을 갖추고 시험을 통과해 리그로 복귀했다. 구리 신씨 시조가 된 그는 귀화 이후로도 5년간 리그에서 활약했다. 은퇴 이후에도 현재까지 한국에서 지내며 여자축구팀 이천현대의 골키퍼 코치를 맡고 있다.
이성남이라는 이름을 달고 뛰던 데니스. 일요신문DB
하지만 리그에서 뛰어난 활약을 펼치고 한국인 신분을 취득한 선수가 있지만 축구 국가대표에서만큼은 귀화선수가 활약한 경우는 없었다. 세계적으로도 많은 선수들이 자신이 태어나고 자라지 않은 국가의 대표로 활약했지만 대한민국만큼은 예외다. 브라질 출신 에닝요는 대한축구협회에서 나서 특별귀화를 추진해 대표팀 전력강화를 노렸지만 법무부에서 불가 판정을 내려 무산되기도 했다. 당시 여론 또한 찬반 의견이 팽팽히 나눠졌다.
농구와 축구 등 프로스포츠 외의 종목에서는 귀화선수가 국가대표로도 활약한 사례가 적지 않다. 대표적인 종목은 세계적으로 ‘중국 천하’를 이루고 있는 탁구다. 지난 2016 리우올림픽 탁구에 출전한 선수 172명 가운데 44명이 중국 출신일 정도로 중국 선수들의 귀화가 보편화돼 있다. 우리나라에서도 전지희가 중국 출신 귀화선수로 대회에 참가했다. 이전에도 당예서, 석하정 등이 한국 국적을 취득, 국가대표로 아시안게임, 세계선수권 등에서 메달을 땄다.
# 평창 성공 위한 ‘귀화 러시’
평창 올림픽을 1년여 앞둔 동계 종목에서는 외국인들의 ‘귀화 러시’가 한창이다. 한국은 쇼트트랙 등 일부 빙상 종목을 제외하면 동계 스포츠에서 약세를 보여 왔기에 안방에서 치르는 올림픽만큼은 좋은 성적을 위해 귀화를 적극 활용하고 있다.
귀화선수로 전력상승 효과를 본 아이스하키대표팀. 사진=대한아이스하키협회 홈페이지.
국가 간 전력차가 두드러지는 아이스하키는 귀화가 줄을 잇고 있다. 남자팀에 브락 라던스키, 마이클 스위프트, 맷 달튼을 비롯해 6명의 선수가 미국·캐나다 출신이며 수비 보강을 위해 1명 추가를 추진하고 있다. 여자팀에도 캐나다 출신의 캐롤라인 박이 뛰고 있다. 바이애슬론 팀에는 러시아 출신의 안나 플로리나와 스타로두베치가 합류했으며 루지에서는 독일 출신 아일렌 프리쉐가 한국 국적을 취득해 대회에 나서고 있다. 또한 피겨스케이팅에서도 아이스댄스, 페어 종목에 나설 선수들의 귀화가 추진되고 있다.
김상래 scourge@ilyo.co.kr
경기 후 기자회견장에서 통역 직원에 안긴 라틀리프 딸 레아 라틀리프는 안정적 생활, 한국에 대한 애착 등도 있지만 한국 여권을 갖고 싶은 이유 중 하나로 딸을 꼽았다. 라틀리프의 딸 레아는 2015년 수원에서 태어났다. 무뚝뚝한 성격과 코트에선 괴력을 뽐내는 라틀리프지만 레아 앞에서만큼은 부드러운 아빠가 된다. 구단 홈페이지 선수 소개에 취미로 딸과 놀아주기가 적혀있을 정도다. 지난 10일 라틀리프가 32득점 16리바운드로 괴력을 뽐낸 SK 나이츠와의 경기에도 레아가 함께했다. 라틀리프는 이날 팀을 승리로 이끌어 경기수훈선수로 기자회견장에 나타날 때도 딸과 함께였다. “딸이 자신을 한국인이라 생각하는지 미국인을 보면 수줍어하면서도 한국인에게는 잘 안긴다”는 라틀리프의 말처럼 양팔을 벌린 구단 통역 직원 품에 달려가 안기기도 했다. 삼성 구단 관계자는 “라틀리프는 홈경기 외에 수도권에서 열리는 원정경기에도 거의 빠지지 않고 딸과 함께 한다”고 말했다. [상]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