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남 진주경찰서는 지난해 11월 말쯤 사기 혐의로 박 아무개 씨(여·39)를 구속했다. 경찰 등에 따르면 박 씨는 지난 2014년 4월 30일부터 2016년 11월 21일까지 고객 118명에게 ”확정 수익을 주겠다“고 속여 차명계좌로 약 376억 원을 투자 받은 뒤 66명에게 116억 원가량 손해를 입힌 혐의를 받고 있다.
NH투자증권에서 근무하던 박 씨는 지난 2014년 4월쯤 초등학교부터 대학교까지 같이 다닌 친구 A 씨(여·39)에게 ”네 명의로 은행 계좌를 만들어 달라“고 부탁했다. 으레 지인 상대로 벌어지는 금융권의 계좌 영업인 줄 알았던 A 씨는 선뜻 자신의 계좌 2개와 남편의 계좌 등 증권사 계좌와 연동한 계좌 총 3개를 2년에 걸쳐 박 씨에게 만들어줬다. 그 사이 박 씨는 지난해 2월 NH투자증권에서 현대증권으로 자리를 옮겼다. 현재 현대증권은 KB증권으로 인수됐다.
A 씨의 계좌를 받아 든 박 씨는 2014년부터 자신의 주변 사람과 소개 받은 사람 118명에게 ”난 고액 투자자 등 VIP 위주로 돈을 관리하는 증권사 간부 직원이다. 증권사 소속으로 팀원 5~6명이 팀을 이뤄 100억~200억 원 정도를 운용한다. 자신은 적은 돈을 투자를 받을 수 없으니 다른 사람과 돈을 한 계좌로 모아 고액 투자하겠다. 원금 보장, 확정금리, 단기 만기일 역시 확정해주겠다“고 현혹했다.
고객들은 박 씨를 신뢰했다. 박 씨의 화려한 이력이 믿을 만했기 때문이었다. 1999년 업무직군으로 NH투자증권에 입사했다고 알려진 박 씨는 지난 2009년 영업직군으로 전환된 뒤부터 승승장구했다. 2009년 NH투자증권에서 펀드 실적 전국 우수직원에 뽑혔으며 2014년과 2015년에는 전국 우수직원에 선정됐다. 게다가 부산대구본부 주식매매 오프수익 연속 우수직원 포상까지 받자 경쟁사에서 러브 콜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이런 그를 의심한 고객은 거의 없었다.
잘 굴러갈 땐 하루에도 수익률이 20% 넘게 나는 등 박 씨는 차명계좌를 순조롭게 운용했다. 하지만 NH투자증권은 지난 2014년 2월부터 박 씨의 관리 계좌가 지나치게 거래가 많다는 점을 수상하게 여겨 관리유의계좌로 지정한 뒤 수차례 특별 점검을 시행했다. 이런 관리 압박에 상사와의 불화까지 겹쳐진 박 씨는 이직을 결심하게 됐다. NH투자증권 관계자는 “박 씨가 ‘회사 차원의 통제가 너무 심해 부담을 느낀다’며 지난해 2월 퇴사했다”고 밝혔다. 박 씨가 피해자에게 선처를 구하며 구치소에서 쓴 편지에도 “힘든 조직 생활과 상사와의 불화까지 겹쳐 이직을 결심했다”고 적혀있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아무런 문제가 드러나지 않았다.
차명계좌를 이용해 400억 원에 육박하는 고객들의 돈을 몰래 운용하다 날린 박 씨가 피해자에게 보낸 편지.
이런 박 씨에게 위기가 찾아온 건 지난해 3월 현대증권으로 자리를 옮긴 뒤부터였다. 운영하던 펀드의 수익률이 크게 악화되기 시작한 것. 기껏해야 한 자릿수 마이너스 수익을 기록하던 박 씨는 4월 말부터 두 자릿수 마이너스 수익을 자주 냈다. 한번 고꾸라진 수익은 일어설 줄 몰랐다. 확정 금리를 지급해 왔기에 계좌의 잔고는 급격하게 줄어갔다. 박 씨가 차명계좌로 펀드를 운영하며 경찰에 구속되기 직전까지 모집했던 약 376억 원은 887만 원이 돼 버렸다.
확정 수익이 들어오지 않자 이를 의심한 고객은 박 씨를 경찰에 고소하며 현대증권에 손해배상 청구소송을 제기했다. NH투자증권은 다행히 소송전에 비켜갈 수 있었다. 피해가 고스란히 박 씨의 현대증권 이직 뒤 발생했기 때문이다. NH투자증권은 박 씨가 회사를 떠난 뒤 박 씨의 고객에게 연락해 직원 퇴직 사실 및 최종거래 내역 등을 확인하였으나 별 다른 문제가 발견되지 않았다. 이의제기 역시 없었다. 이런 과정을 통해 NH투자증권은 금융감독원으로부터 “내부통제 잘 했다”는 평가까지 받았다.
현대증권은 ‘직원 개인의 사금융 사건’으로 선을 그으면서도 책임 소재가 있을 경우 적극적으로 대처하겠다고 밝혔다. 현대증권 관계자는 “개인적으로 불법적인 사금융 행위를 벌인 것으로 보이지만 귀책 사유가 있다고 판단되면 고객의 피해를 구제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다. 수사 결과가 나오면 그에 따라 대응할 수 있도록 하겠다”고 말했다.
경남 진주경찰서는 이 사건을 ‘박 씨의 단독범행’으로 판단해 검찰에 송치했다. 반면 피해자들의 일부는 이런 경찰의 조사가 확대돼야 한다는 입장을 내보였다. 피해자 측은 “애초에 투자 상담할 때 박 씨는 ‘팀 단위로 거액의 펀드를 조성해 운용한다’고 우리를 설득했다. 현대증권이라는 이름 아래 거대 펀드 조성 팀이라는 박 씨의 말을 믿고 투자했다. 또 다른 피해자가 있을지 모르니 개인의 행위에만 집중할 게 아니라 현대증권의 조직 구조를 전체적으로 수사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에 대해 경남 진주경찰서 관계자는 “박 씨와 관련된 사람 수 명을 참고인으로 불러 조사했지만 특별한 의혹점은 찾지 못했다”고 밝혔다.
피해자 측이 수사 확대를 요청하고 나선 가운데 박 씨의 직속상사인 임원 B 씨와 관련된 의혹도 제기됐다. 피해자 측에 따르면 B 씨는 박 씨가 속해있던 팀의 수장으로 박 씨를 현대증권으로 영입한 사람이다. B 씨의 최측근인 김 아무개 씨와 이 아무개 씨는 대부분의 피해자가 크게 손해를 본 즈음에 각각 23억 원, 21억 원가량의 수익을 기록했다. 게다가 해당 펀드의 돈이 말라가기 시작한 지난해 6월부터 9월까지 이 둘은 집중적으로 박 씨의 차명계좌 잔액을 뽑아갔다.
피해자 측은 ”투자자 몇 명이 비정상적으로 높은 수익을 올렸다. 게다가 시기도 박 씨가 현대증권으로 옮긴 뒤 집중해서 돈을 찾아간 게 이상하다“며 ”막대한 이익을 올린 사람이 박 씨의 직속상사이자 박 씨를 영입한 B 씨의 최측근이다. 어쩌면 B 씨와 측근 등이 ’큰 그림‘을 그린 뒤 박 씨를 현대증권으로 영입했을 수도 있다“고 주장했다. <일요신문>은 이런 주장에 대해 정 상무의 입장을 듣기 위해 수차례 연락했지만 임원 B 씨는 아무런 대응을 하지 않았다.
최훈민 기자 jipchak@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