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1일 서울중앙지방법원 형사합의22부 심리로 최순실, 안종범 등 ‘국정농단’ 관련자들에 대한 2차 공판이 열렸다. 최준필 기자
‘국정농단’ 관련자들의 재판 2라운드가 지난 11일 서울중앙지법에서 형사22부의 심리로 열렸다. 최 씨는 안 전 수석과 함께 53개 기업들을 압박해 미르·케이스포츠재단 출연금 774억 원을 강제 모금한 혐의(직권남용권리행사방해·강요)를 받고 있다. 공무상 비밀누설 혐의로 함께 재판에 넘겨진 정호성 전 청와대 대통령 부속비서관은 재판부가 미르‧케이스포츠재단 강제모금 혐의에 대한 증거조사를 먼저 진행하기로 결정하면서, 사건이 분리돼 이날 재판에 출석하지 않았다.
2차 공판은 지난 5일 열린 1차 공판에 이어 서류증거 조사 절차만 진행됐다. 증거조사는 검찰이 증거로 신청한 서류 중 피고인들의 동의를 얻어 증거로 채택된 것들을 법정에서 공개하고, 이를 통해 입증하려는 취지가 무엇인지 설명하는 절차다. 피고인들이 동의하지 않은 증거에 대해서는 검찰이 직접 증인을 신청해 법정에서 신문하게 된다.
이날 오전 10시 10분부터 시작된 증거조사는 12시간가량 이어졌지만, 앞서 검찰이 재판부에 제출한 증거가 2만 7000여 쪽에 달하는 방대한 분량이라 설명을 모두 마치지 못했다. 남은 증거조사는 다음 기일까지 이어지고 변호인 측은 이날 증거에 대한 의견을 별도로 밝힐 예정이다.
# 최 씨 등 재단 설립‧해산 주도
2차 공판에서 검찰은 최 씨 등의 혐의를 입증할 증거를 무더기로 제시했다. 미르‧케이스포츠재단 설립‧운영 과정에서의 비리와 최 씨의 ‘국정농단’ 의혹들을 입증하는 내용들이다. 앞서의 두 재단의 설립 과정에서 거액의 기금을 출연한 대기업의 관계자들과 재단 임직원, 전경련 직원들의 진술조서와 압수수색을 통해 확보한 문서 등이 공개됐다. 검찰은 “미르·K스포츠재단이 최 씨 지배 아래 사실상 동일 조직처럼 움직인 한편, 최 씨와 청와대가 두 재단의 설립과 강제 모금, 해산까지 주도했다”고 밝혔다.
실제로 미르‧케이스포츠재단 설립 기금을 모으는 과정에 대해 검찰이 제시한 증거를 보면, 청와대가 두 재단 설립에 깊숙이 개입한 정황이 드러난다. 검찰은 “청와대에서 총 4차례 미르재단 설립 관련 회의를 했다”는 이 아무개 전경련 사회공헌팀장의 진술을 공개하면서 “최상목 당시 경제금융비서관은 회의에서 기업들의 출연 약정서를 다 받지 못했다는 말에 질책하기도 했다”고 밝혔다. 이어 “안 전 수석은 이승철 전경련 상근부회장에게 직접 4개 기업을 찍어주며 출연금을 받으라고 한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최 씨와 안 전 수석은 지난해 미르‧케이스포츠재단 설립‧운영 관련 의혹 보도가 나온 이후 두 재단의 해산까지 주도했다. 검찰은 안 전 수석과 정동춘 케이스포츠재단 이사장과의 지난해 10월 13일 통화녹음 내용을 공개하면서 “안 전 수석은 정 이사장에게 ‘미르·K스포츠재단의 효율적 운영과 야당의 문제제기 때문에 두 재단을 해산하고 통폐합할 것’이라고 말했다”며 “안 전 수석은 ‘통합 후 안정되면 정 이사장을 포함한 다른 직원들의 고용 승계도 할 것’이라며 ‘이런 내용은 대통령에게 보고해 진행하고 있고 대통령도 최 여사(최순실)에게 이미 말했을 것’이라고 덧붙였다”고 설명했다.
검찰은 “재단 설립에 일부 관여는 했지만 사익은 추구하지 않았다”는 최 씨 측의 주장을 정면으로 반박하는 증거도 공개했다. 검찰은 차은택 씨가 운영하는 아프리카픽처스 직원의 노트북에서 발견한 사진을 제시하며 “사진에는 미르와 플레이그라운드(최 씨가 운영한 것으로 지목된 광고대행사)라는 단어와 함께 다양한 해외사업계획을 확인할 수 있었다”고 밝혔다. 이어 “미르재단은 각종 문화·의류·음식 관련 사업을 하고 플레이그라운드는 K푸드·K뷰티·K패션 등 각종 이권 사업을 동반해 추진한다는 내용이 기재돼 있다”면서 “이는 미르재단과 K스포츠재단이 순수 문화 재단이고 사익을 추구한 사실이 전혀 없다는 최 씨 측 주장과 정면으로 반대되는 내용”이라고 지적했다. 그밖에 포레카 강탈 시도 의혹에 대한 증거와 권오준 회장과 공모해 포스코 인사에도 개입한 통화, 문자내역 증거도 공개됐다.
# 안 전 수석 ‘대통령 보호’ 나서나
검찰이 ‘최 씨 및 청와대 주도’를 강조하는 이유는 이번 재판의 쟁점이 최 씨와 안 전 수석, 그리고 박근혜 대통령으로 이어지는 ‘삼각 공모관계’에 맞춰져 있기 때문이다. 최 씨 등에게 적용된 공소사실에는 “대통령과 공모하여”라는 표현이 9차례나 나온다. 대통령이 끼어 있어야 대부분의 혐의가 완성된다.
여기에 ‘삼각 공모관계’는 이번 재판뿐만 아니라 헌법재판소에서 동시에 진행 중인 대통령 탄핵심판, 조사가 한창 이뤄지고 있는 특검과 유기적으로 연결된다. 특히 최 씨와 안 전 수석 재판에서 증거능력을 얻는 자료들은 헌법재판소에서도 사실로 인정해 증거기록으로 검토할 수 있다. 대통령이 공모했다는 내용이 최 씨 등 재판에서 입증되면 탄핵심판에서도 영향이 불가피하다.
2차 공판에서 검찰과 최 씨 등 피고인 측과 벌어진 새로운 공방이 주목되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그동안 “대통령 지시 대로 따랐다”는 입장을 고수해온 안 전 수석이 이날 갑작스럽게 자신이 청와대 근무 당시 작성한 업무수첩 사본을 증거로 채택하는 데 동의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청와대 재임시절 안 전 수석은 박근혜 대통령의 지시사항을 자신의 업무수첩에 꼼꼼하게 기록했다. 검찰은 총 17권(510쪽) 분량의 수첩을 확보했으며 ‘삼각 공모관계’를 밝힐 구체적인 증거로 보고 있었다.
이에 대해 검찰은 “안 전 수석 자신이 직접 펜을 들고 대통령 지시사항을 받아적었다고 진술했던 수첩을 법정에선 받아들이지 못한다고 한다”며 “안 전 수석 측의 주장의 목적은 하나로 보인다. 대통령에게 불리한 증거가 제출되는 걸 막고, 동시에 열리고 있는 탄핵심판을 지연하겠다는 의도”라고 주장했다. 이어 “최 씨 변호인이 수첩감정을 주장하더니, 안 전 수석은 수첩의 증거 채택을 부동의한다. 이런 조직적인 대응의 배후에는 대통령이 있다고 볼 수 있다. 무엇이 두렵냐”고 목소리를 높였다.
법조계에서도 비슷한 의견이 나온다. 한 부장판사 출신 변호사는 “최 씨 등의 재판은 탄핵심판 제2의 변론장과 다름없다”며 “여기서 나오는 증거와 진술 등은 탄핵심판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다. 대통령 지시사항이 빼곡이 적힌 업무수첩 내용이 증거로 채택되고 내용이 공개되면 그만큼 대통령에게 불리해질 수 있다”고 말했다. 앞서 검찰의 ‘조직적 대응’이라는 주장과 비슷한 맥락이다.
반면 특검을 의식한 안 전 수석의 ‘전략’이라는 분석도 있다. 최근 특검이 박 대통령의 뇌물 혐의 입증에 집중하면서 안 전 수석이 태도를 바꿨다는 얘기다. 특검이 미르‧케이스포츠재단 강제모금과 삼성전자의 최 씨 모녀 지원, SK 회장 사면 등을 뇌물로 보고 박 대통령에게 뇌물 혐의를 적용하면, 대통령의 지시를 기업에 전달한 안 전 수석도 공범으로 처벌받을 가능성이 크다. 서초동의 한 변호사는 “뇌물죄는 최고 형량이 무기징역”이라며 “특검 진행 상황을 볼 때 본인에게 불리한 내용이 상당하니 업무수첩의 증거능력을 문제 삼고 나선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하지만 안 전 수석이 동의하지 않더라도 재판부는 직권으로 수첩을 증거로 채택할 수 있다. 형사소송법 315조에서는 ‘상업 장부, 항해 일지 기타 업무상 필요로 작성한 통상문서’와 ‘기타 특히 신용할 만한 정황에 의해 작성된 문서’를 당연히 증거능력이 있는 서류로 인정하고 있다.
한편, 특검은 최근 대기업의 미르‧케이스포츠 재단 출연금에 대해 제3자 뇌물 혐의 적용을 검토하고 있다. 특검에 앞서 검찰 특별수사단은 최 씨와 안 전 수석이 대통령과 공모, 대기업을 압박해 출연을 강요했다는 결론을 내렸고 제3자 뇌물수수와 관련해선 증거가 명확하지 않아 공소 유지의 어려움 등을 고려해 일단 직권남용 혐의만 적용했다.
이후 검찰 수사 단계에서 기업들의 주장해온 것처럼 단순 피해자가 아니라 대통령의 지위와 권한을 이용해 향후 어떤 형태로든 이익을 기대하고 출연금을 냈을 가능성이 충분한 만큼 이 돈을 대통령에 대한 ‘뇌물’로 봐야 한다는 지적이 나왔다. 실제 특검 수사 과정에서 대통령과 대기업 총수들이 독대를 하며 기업 현안에 대한 대화를 나눈 정황도 다수 발견됐다. 특검이 재단 출연금에 제3자 뇌물 혐의를 적용해 대기업 총수 등을 기소할 경우 현재 진행 중인 최 씨 등 재판의 공소장 변경 절차가 진행될 전망이다. 이 경우 역시 대통령 탄핵심판에도 영향이 미칠 가능성이 크다는 게 최근 법조계의 시각이다.
문상현 기자 moon@ilyo.co.kr
재판에 등장한 최순실, 변호인단에 ‘미소’ 인사 2차 공판에서 최 씨는 흰색 계열의 상아색 수의, 안 전 수석은 녹색 수의를 입고 나타났다. 최 씨는 이날 오전 법정에 들어오면서 손으로 입을 가리고 종종 걸음으로 피고인석에 앉았다. 안 전 수석은 피곤한 표정이 역력했고, 다리를 약간 절기도 했다. 각자 변호인을 사이에 두고 자리에 앉은 두 사람은 별다른 인사는 나누지 않았다. 이날 재판은 오후 10시를 넘어서 끝이 났는데, 그동안 두 사람은 자세를 흐트러뜨리지 않고 검찰의 증거조사에 집중했다. 최 씨와 그의 변호인은 증거조사 과정에서 별다른 대화를 나누지는 않았지만, 안 전 수석은 자신과 미르‧케이스포츠 재단, 대기업 임직원 등의 통화내역, 문자메시지가 공개될 때 변호인과 귓속말을 나누기도 했다. 일부 증거를 보면서는 고개를 저으며 답답한 표정을 보이기도 했다. 점심과 저녁 식사 시간, 오후 휴정 시간마다 최 씨는 빠르게 법정을 나섰다. 방청석을 보거나 다른 곳에 시선을 두지는 않았다. 반면 안 전 수석은 입장 때와 마찬가지로 느릿한 걸음으로 법정을 나섰다. 2차 공판이 마무리되자 최 씨는 자리에서 일어나 재판부와 변호인 측에 목례를 했다. 특히 변호인단과 인사를 나눌 때는 작은 미소를 보이기도 했다. [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