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말을 들은 재판장이 잠시 침묵하다가 대답했다.
“판사는 기록을 보고 논리로 추론합니다. 하나님같이 절대적인 진실을 파악하는 게 아닙니다.”
범죄는 논리나 상식을 벗어난 예외적 현상이었다. 기록 역시 ‘너는 범인이어야 해’라는 편견을 가진 수사관의 창작물일 수 있다. 판사가 찍은 살인범은 진범이 아니었다. 석방된 진범은 내게 찾아와 “사실은 내가 죽였는데”하면서 악마의 웃음을 흘렸다.
변호사를 하면서 직접 체험한 일이다. 한 서민 아파트 단지에서의 일이다. 수리업체 등에서 뒷돈을 받고 부실공사를 하는 걸 보고 입주민 노인이 분노했다. 노인은 주민들에게 호소하며 다니다 명예훼손으로 고소를 당했다. 담당수사관은 그에게 “증거 대봐요?”라고 다그쳤다. 당연히 국가가 불법을 수사할 줄 알았던 노인은 당황했다. 게으른 수사관은 노인의 진실을 허위로 몰아버렸다. 법원에서도 기계적으로 유죄판결이 나왔다. 후일 노인의 외침이 맞다는 진상이 밝혀졌다. 게으른 판검사에 의해 진실이 거짓이 됐다.
미국산 소고기만 먹으면 90% 이상이 광우병에 걸린다는 거짓방송이 보도되자 백만 명의 군중이 촛불을 들고 광장으로 나왔다. 거짓에 대해 검찰은 압수수색도 소환도 하지 못했다. 법정에서도 거짓말을 한 사람들을 추궁하지 못했다. 거짓이 무죄판결을 선고받고 이겼다. 그 이후 미국산 소고기를 먹고 광우병에 걸려 죽은 사람은 없었다. 거짓말도 대중의 힘만 얻으면 이겼다.
그럴듯한 거짓말이 이기는 사회다. 국정 조사장에서 한때 세상을 흔들던 사람들이 거짓말을 한다.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거짓과 부조리가 뼛속까지 배어 있다. 변호사 생활을 30년 해오면서 끊임없이 거짓말을 해 달라는 부탁을 받았다. 법정은 거짓말이 넘쳐흐르는 시궁창이었다. 시궁창 속에서 법조인들은 세월이 갈수록 그 냄새에 익숙해졌다. 법원장을 지낸 한 법관은 “법정은 거짓말 경연장이지. 선악의 다툼이 아니라 악과 악의 대결이야. 그런 속에서 오랫동안 재판을 하다 보니까 인간은 거짓말을 할 권리가 있는 것 같이 느껴져”라고 자조적인 결론을 내렸다. 공기 중에 꽉 차있는 거짓 속에서 진실은 피를 흘리며 희생되고 있다.
진실불감증과 불신병에 걸린 판사들이 어눌해 보이는 정직한 사람 속에서 과연 진실을 걸러낼 수 있는 능력이 있는지 의문일 때가 많았다. 거짓말을 해도 위증죄로 처벌되지 않았다. 결백이 판정된 뇌물사건에서 거짓 진술한 사람이 위증죄로 처벌되는 경우를 거의 보지 못했다. 국회에서의 위증죄 경고도 그냥 엄포로 보인다. 한 초등학교 1학년 학생이 선생님한테 “정말과 거짓말이 싸우면 누가 이겨요?”라고 물었다. 아이는 또 “정말이 이기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요?”라고 했다. 선생님은 대답하기가 난감했다. 그런 선생님을 보면서 아이는 “정말이 샘물같이 자꾸자꾸 솟아나서 많아지면 더러운 거짓말을 이겨요. 그렇죠?”라고 했다. 교사를 지낸 도종환 시인이 내게 해 준 얘기였다. 정직이 넘쳐흐르는 건강한 사회가 됐으면 좋겠다.
엄상익 변호사
※본 칼럼은 일요신문 편집방향과 다를 수도 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