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원의 판단은 결국 ‘기각’이었다. 서울중앙지법 영장전담재판부(조의연 부장판사)는 19일 새벽 4시가 넘은 시각,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에 대한 구속영장을 기각했다. 통상 늦어도 새벽 1시에는 영장 결과가 나오는 것에 비해 ‘신중하게 판단했다’는 점을 강조한 것인데, 현재까지 수사만으론 뇌물의 대가성이 입증되지 않았고 부정한 청탁이라고도 볼 수 없다는 게 법원의 설명이었다.
집으로. 430억 원대 뇌물공여와 횡령·위증 등 혐의에 대한 구속영장이 기각된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이 19일 오전 의왕시 서울구치소 밖으로 걸어 나오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자연스레 법원이 여론에 맞춰 빠른 속도로 진행되던 특검팀의 수사에 제동을 건 것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특히 ‘경제 기여도’라는 면에서 의미가 있는 이재용 부회장 영장 기각을 계기로, 무차별적으로 영장을 내주지 않을 것이라는 전망도 나온다.
특검이 법원 영장실질심사 때 주장한 것은 430억 원대 뇌물 공여 혐의와 특경가법상 횡령, 그리고 위증. 삼성그룹이 최순실 측에 제공한 433억 원을 모두 제일모직과 삼성물산 합병 성사를 위한 뇌물이라고 판단했다. 박 대통령 수사에 앞서 유리한 진술을 받아내기 위해서라도 이재용 부회장에 대한 구속영장이 절실했던 특검이다.
특검팀 관계자는 4시간 넘게 진행된 영장실질심사에서 “모든 과정을 이 부회장이 챙겼다”고 주장하며 이 부회장의 구속 필요성을 강조했는데, 특검팀 내에서는 “앞선 뇌물은 다툼의 소지가 있다고 쳐도, 위증만으로도 구속영장 발부 사유가 된다”고 할 정도로 구속을 자신하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법원은 15시간의 심리 끝에 이 부회장의 구속영장 청구를 기각했다. 심리를 맡은 조의연 부장판사는 “법률적 평가를 둘러싼 다툼의 여지가 있다“고 영장 기각 사유를 설명했다. 뇌물 범죄의 요건이 되는 대가 관계와 부정한 청탁 등에 대한 특검팀의 소명 정도, 각종 지원 경위에 관한 구체적 사실관계와 범죄 혐의에 대한 평가가 다르다는 것.
특히 조 부장판사는 “현 수사 단계에서 부정한 청탁이나 대가성을 입증할 만한 사유가 충분치 않다”고 덧붙이며, 특검팀의 범죄 혐의 입증에 다소 부족한 면이 있음을 지적했다.
서울구치소에 대기하던 이 부회장은 영장이 기각된 후 구치소를 나왔고, 이 부회장은 취재진의 질문에 아무런 대답 없이 곧장 삼성 서초사옥으로 향했다. 자유로운 몸이 된 이 부회장과 달리 특검팀은 암초를 만나 수사에 비상이 걸렸다. 이 부회장의 신병을 확보한 뒤 박 대통령의 뇌물수수 혐의를 정조준 한다는 계획이었기 때문.
박영수 특검과 이규철 특검보 등은 평소보다 2시간 일찍 특검 사무실에 출근해 대책 회의에 나섰다. 특검팀은 “영장기각에 대한 공식입장을 별도로 표명할 예정”이라며 이 부회장의 영장 재청구 가능성은 일절 언급하지 않고 있다.
법조계에서는 이번 영장 기각은 ‘법리’로 특검 수사 방식에 제동을 걸었다는 분석이 나온다. 법조계 관계자는 “박영수 특검팀이 박근혜 대통령 뇌물수수 의혹 수사 등의 1차 관문 돌파에 실패한 셈”이라며 “특검은 이 부회장이 삼성물산 합병에 박 대통령의 도움을 받는 대가로 최순실 씨 측에 433억 원대 뇌물을 공여한 것으로 판단했지만, 법원이 ‘더 소명이 필요하다’고 지적한 것 아니냐. 특검은 당초 이 부회장의 영장이 발부된다는 전제 하에, 2월 초 박 대통령 대면조사를 하겠다는 것이었는데 이렇게 되면 박 대통령 소환도 미뤄질 수밖에 없다”고 내다봤다.
법무부 관계자는 “당초 이재용 부회장의 경우 구속영장 발부 가능성이 낮다고 다들 점치지 않았느냐”고 반문하며 “법원이 성난 여론에 눈치를 보고 한 번 꼬리를 내릴지(영장을 발부할지)가 관건이었는데 결국 법리로 판단해 기각한 것”이라고 풀이했다. 영장실질심사에 밝은 부장판사는 “이미 특검이 자료를 다 확보한 점, 신분이 확실해 도주의 우려가 없고 증거 인멸 시도가 없었던 점 등을 감안할 때 기각 분위기가 우세했던 상황”이었다고 귀띔했다.
특검의 다른 대기업 수사도 차질이 불가피 해졌다. 대검찰청 관계자는 “원래 결정적인 한 명이 영장이 기각되면, 사건과 관련된 다른 피의자들도 앞선 케이스와 비교해 수사에 대응하는 태도를 결정한다”며 “삼성그룹 외 SK, 롯데 등 다른 대기업의 뇌물죄 수사에도 차질이 불가피해지고, 두 개의 대기업 정도를 더 수사한 뒤 박 대통령을 2월 초 소환하려던 특검의 계획은 미뤄질 수밖에 없다”고 설명했다.
그는 “결과론적이지만, 이 부회장 외에 밑에 사장단 중 한 명 정도를 더 영장을 청구했다면 법원이 이 부회장을 기각하고 한 명은 발부를 해줬을 것”이라며 “그랬으면 영장 기각의 후폭풍이 이리 크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아쉬워했다.
남윤하 저널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