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월 2일 아키히토 일왕의 신년인사. 왼쪽부터 마사코 왕세자비, 나루히토 왕세자, 아키히토 일왕, 미치코 왕비. EPA연합
1월 6일, 도쿄 총리관저에 아베 신조 총리와 스가 요시히데 관방장관, 스기타 가즈히로 관방부장관이 극비리에 회동했다. 아키히토 일왕의 생전 퇴위에 대한 협의를 진행하기 위함이었다. 그 자리에서 “헤이세이 30년(헤이세이는 아키히토 일왕 시대의 연호), 즉 2018년 12월 31일에 퇴위하는 것이 타당하지 않겠느냐”는 얘기가 나왔고, 세 사람은 이 일정에 고개를 끄덕였다.
회담 정보를 입수한 <산케이신문>은 “2019년 첫날 왕세자가 새 일왕으로 즉위하면서 동시에 일본의 연호도 바뀔 것”이라고 보도했다. 일본은 아직도 왕의 연호를 사용하고 있어 일왕이 새로 취임할 경우 연호부터 달라진다. 참고로 올해는 헤이세이 29년이다.
아베 총리로서는 현 정권에 영향을 주지 않도록 가능한 날짜를 미루고 싶었을 터. 덧붙여 “연호 변경 등으로 인해 국민생활에 미칠 영향을 최소화하기 위해 1월 1일을 양위일로 정한 것으로 보인다”고 신문은 전했다.
일본에서 왕은 군국주의 시절 신격화돼 ‘절대적인 존재’로 군림했었다. 지금은 ‘상징적 존재’에 그치고 있으나 여전히 국민통합의 구심점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새로운 일왕이 즉위하면, 연호가 바뀌고 민심 또한 움직이는 게 당연지사. 일왕의 성격, 행동 등을 국민이 어떻게 받아들이느냐에 따라 나라 분위기도 확 달라질 전망이다.
올해 57세인 나루히토 왕세자는 소탈한 성격으로 알려졌다. 일본 왕실가족들이 다니는 학습원(學習院) 관계자에 의하면 “왕세자는 고등과 재학 당시, 쉬는 시간에도 혼자 의자에 앉아 있을 만큼 조용한 편이었다”고 한다. 또 영국에서 유학을 같이 한 지인은 “20대 때 함께 등산을 종종 했는데, 그때마다 왕세자가 부모님을 매우 존경하고 있다는 인상을 받았다”고 밝혔다.
<주간겐다이>는 “나루히토 왕세자가 부친 아키히토 일왕처럼 평화주의자”라고 평가했다. 그동안 아키히토 일왕은 아베 총리와 달리 전쟁을 반대하고, 평화헌법을 수호해야 한다는 입장을 고수해 왔다. 특히 중국, 필리핀, 팔라우 등 태평양전쟁 격전지를 방문해 희생자를 추모하는 여정을 이어온 것으로 유명하다.
또 아키히토 일왕은 한국과도 인연이 깊다. 2005년 사이판을 방문했을 때는 “예고 없이 한국인 희생자 추도 평화탑에 들러 묵념을 했다”는 소식이 전해지는가 하면, 자신을 백제의 후손이라는 취지의 발언을 해 일본 우익들의 반발을 사기도 했다. 부친인 히로히토 일왕이 2차대전 당시 전쟁을 묵인하고 한국과 악연을 쌓았던 것과 비교하면 사뭇 대조적인 행보다.
<주간겐다이>에 따르면, 나루히토 왕세자 역시 아키히토 일왕의 뒤를 이어 평화적 활동을 펼칠 가능성이 높다. 그의 평화주의에 대한 신념은 이미 여러 차례 인터뷰를 통해 드러난 바 있다. 가령 2014년 2월, 자신의 생일을 앞두고 진행한 기자회견에서 “지금의 일본은 전후 평화헌법을 기초로 쌓아올려졌고, 우리는 평화와 번영을 향유하고 있다”고 말했다. 요컨대 부왕과 마찬가지로 아베 정권이 추진하는 평화헌법 개정에 반대의 뜻을 밝힌 셈이다.
다만 “아키히토 일왕이 워낙 일본인들에게 존경을 받고 있기 때문에 늘 비교대상으로 거론될 것”이라는 우려도 있다. 이에 대해 메이지가쿠인대학의 하라 다케시 명예교수는 “전대의 일왕과 비교 평가되는 것은 어쩔 수 없다. 다이쇼 일왕은 물론 아키히토 일왕 역시 초창기엔 선왕보다 미덥지 못하다는 비판을 받았다”고 말했다.
양위가 추진될 경우 2019년 1월 1일 왕위에 오르게 되는 나루히토 왕세자(오른쪽)와 마사코 왕세자비. 나루히토는 아베정권의 헌법 개정에 반대를 표명한 평화주의자로 알려져 있다. EPA연합
한편, 마사코 왕세자비가 왕비 역할을 제대로 수행할 수 있을지도 관심의 대상이다. 알려진 대로 마사코 왕세자비는 왕자를 낳지 못해 극심한 우울증에 시달리다 2004년 ‘스트레스성 적응장애’ 진단을 받았다. 10년 넘게 요양생활을 지속해왔으나 현재는 회복 중인 것으로 전해진다.
미국 하버드대학을 나온 마사코 왕세자비는 결혼 전 외교관으로 활동하던 재원이었다. 성격도 매우 활달하고 자유분방했다. 남자보다 일을 사랑하는 그녀에게 나루히토 왕세자가 “나를 도와 왕실 외교를 할 수 없을까요?”라며 청혼했다는 일화는 익히 유명하다.
일각에서는 ‘마사코 왕세자비가 예전의 의욕을 찾아 외교에 적극적이 되지 않을까’ 내심 기대하는 눈치다. 이들은 ‘5개국어에 능통한 왕세자비가 해외 왕실과의 교류는 물론, 2020년 도쿄올림픽에서도 국빈을 대접할 때 활약’하길 바라고 있다. 이에 대해 <주간겐다이>는 “지난 13년은 마사코 왕세자비에게 다시는 돌아보고 싶지 않을 과거일 것”이라며 “왕비의 자리는 그 시간을 만회할 수 있는 기회”라고 전했다.
예정대로 양위가 추진될 경우 일본은 2019년 1월 1일부터 새 연호를 쓰게 된다. 연호에 이목이 집중되는 이유는 국민정서에도 영향을 끼치기 때문이다. 1989년 1월 7일 히로히토 일왕이 숨지고, 현 아키히토 일왕이 왕위를 계승하면서 발표한 연호는 ‘헤이세이’였다. 공교롭게도 헤이세이가 된 직후 일본의 거품경제가 붕괴했으며 ‘잃어버린 20년’으로 불리는 불황이 찾아왔다. 또 고베대지진, 도쿄 지하철 독가스테러사건 등 재난과 사건도 적지 않았다.
왕실 저널리스트인 구노 야스시는 “연호가 바뀌면 국민들의 기분이 전환되는 장점이 있다”고 분석했다. “낡은 것을 정리하고, 마치 재앙을 끊어내는 듯한 기분이 들어 나라 전체가 활기를 띨 것”이라는 설명이다. 게다가 이번 개원(改元·연호를 바꿈)은 지금까지와 차이가 있다. 원래대로라면 승하와 동시에 즉위가 이뤄지므로 축하와 더불어 거의 1년 동안 장례 행사를 치러야 한다. 이에 반해 2019년 양위는 축하 일색이라는 점이 다르다.
저널리스트 야마시타 신지는 “새해 첫날 즉위식 축하퍼레이드가 개최되고, 전국 각지에서 기념세일이 진행될 것이다. 경제적으로 개원 특수도 기대해볼 만하다”고 전했다. 덧붙여 그는 “새로운 일왕과 왕비가 나라 전체의 분위기를 고조시키는 역할을 할 테고, 그 분위기 그대로 2020년 도쿄올림픽을 맞이한다면 긍정적인 변화를 끌어낼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했다.
일본 왕실 역사상 200여 년 만에 이뤄지는 ‘생전퇴위’. 과연 일본 언론들의 기대처럼 새로운 왕의 즉위가 ‘일본을 바꾸는 계기’가 될 것인지 지켜볼 일이다.
강윤화 해외정보작가 world@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