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일 오후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이 구속영장 실질심사를 마치고 굳은 표정으로 법원에서 나오고 있다. 임준선 기자
특검은 이 부회장이 삼성물산 합병을 통한 경영권 승계의 대가로 최순실 일가에 400억 원대 뇌물을 제공한 것으로 보고 수사를 벌여왔다. 특검 사정에 밝은 관계자들의 설명을 종합하면 삼성은 삼성물산과 제일모직 합병의 ‘키’를 쥐고 있던 국민연금을 움직이기 위해 박근혜 정부 ‘비선 실세’로 불린 최순실과 접촉했으며, 최순실은 다시 박근혜 대통령을 통해 삼성물산 합병에 도움을 주도록 국민연금에 압력을 가했다.
이 과정에서 이 부회장과 박 대통령은 2015년 7월 25일 독대했고, 대한승마협회를 비롯한 삼성 측 실무진들은 삼성물산 합병을 전후해 최순실 또는 최순실 측근 등과 수차례 접촉했다. 특검은 박상진 삼성전자 사장이 회장을 맡고 있는 대한승마협회가 삼성물산 합병 전인 2015년 6월께 정유라를 위해 ‘중장기 로드맵’을 작성한 것과 최순실 개인회사인 코레스포츠에 돈을 보낸 내역 등을 결정적인 증거로 제시했다.
이 부회장은 지난 12일 특검에 소환돼 피의자 신분으로 조사를 받았다. 당시 이 부회장은 ‘박근혜 대통령의 강요에 따라 최순실 일가를 지원했고, 삼성물산 합병 등과 관련한 부정한 청탁은 없었다’는 취지로 진술했다. 반면 특검은 삼성 일부 임원들이 정유라 승마 지원과 관련한 사전 보고를 한 메시지 등을 토대로 이 부회장을 압박했다. 또 특검은 “이 부회장에 대한 증거가 차고 넘친다. 영장을 보면 사람들이 기절할 수준”이라고 영장 발부에 자신감을 드러낸 것으로 알려졌다.
그런데 정작 이 부회장에 대한 영장은 피의자의 범죄를 입증할 구체적인 증거가 부족하다는 이유로 기각됐다. 피의자의 방어권을 보장하기 위한 ‘배려’지만 향후 재판에서 이번 기각이 판결에 상당한 영향을 미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특수부 출신 검찰 관계자는 “특검 입장에서 보면 천재일우의 기회를 놓친 것”이라며 “핵심 피의자가 구속이 되고 안 되고는 진술하는 태도부터 다르다. 법원이 ‘면죄부’를 준 이상 앞으로 이 부회장에 대한 추가적인 수사는 사실상 어려울 것”이라고 설명했다.
지난 19일 이재용 부회장의 영장이 기각된 이후 서울 대치동 특별검사 사무실로 국민들의 응원 메시지가 담긴 꽃다발이 배달되고 있다. 박정훈 기자
법조계와 재계는 상반된 반응을 나타냈다. 한 대기업 법무팀 소속 변호사는 “솔직히 사안이 사안인지라 영장이 발부될 걸로 생각했는데 ‘기각’이란 말을 듣고 무척 놀랐다”고 한 반면 삼성 출신의 재계 인사는 “SK와 롯데 등 다른 대기업 수사의 가이드라인이 될 텐데 처음부터 법원의 문턱을 쉽게 넘을 수 없을 거라 생각했다”고 말했다. 수사 착수 20여 일 만에 삼성의 심장부를 파고들었던 특검은 전체 수사 전략을 원점에서 재검토해야 하는 중대 기로에 직면했다.
특검의 선택지는 많지 않다. 특검에 앞서 ‘최순실 사건’을 수사한 검찰 특별수사본부는 이미 공소장에서 삼성을 대통령의 강요에 따른 ‘피해자’로 적시했다. 이 부회장에 대한 구속영장을 받아내기 위해선 ‘삼성=피해자’라는 논리부터 깨야 한다. 특검 사정에 정통한 관계자는 “특검의 배수진이 오히려 독이 됐다”며 “설사 영장을 재청구하더라도 이 부회장이 구속될 가능성은 낮을 것”이란 견해를 밝혔다. 만약 이 부회장에 대한 영장이 재청구됐다가 또 다시 기각된다면 특검이 계획한 다른 대기업 수사의 동력 또한 상실될 가능성이 높다.
지난 20일 특검은 기존 입장을 바꿔 삼성 2인자인 최지성 미래전략실장(부회장)에 대한 구속수사 가능성을 열었다. 이날 이규철 특검보는 “추후 수사 과정에 따라 (불구속 수사 원칙이) 변동될 여지는 있다”고 밝혔다.
최지성 삼성 미래전략실 실장(부회장)이 지난 9일 오전 특검사무실에 소환되고 있다. 고성준 기자.
실제 영장 기각 직후 재계와 법조계 등에선 확인되지 않은 특검 내부 불화설이 돌았다. 특검 고위 관계자가 영장이 기각될 것을 알면서도 이 부회장에 대한 구속수사를 고집해 마찰을 빚었다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특검 수뇌부와 야당 정치인 간의 확인되지 않은 밀약설이 공공연하게 퍼지는 등 ‘특검 흔들기’가 본격화된 모습이다. 일부에선 이 같은 흔들기의 배후에 ‘삼성이 있는 것 아니냐’는 주장까지 제기되면서 특검과 삼성 간의 장외 신경전이 예고된다.
삼성이 위기를 온전히 탈출한 것은 아니다. 그룹 총수 가운데 불구속 상태에서 재판을 받고 실형을 선고받은 사례는 얼마든지 있다. 2013년 계열사 자금 횡령 등 혐의로 징역형을 선고받은 최태원 SK그룹 회장, 2011년 배임 및 세금 포탈 혐의로 실형을 받은 김승연 한화그룹 회장이 대표적이다. 법조계 일각에선 삼성이 계열사 자금으로 최순실 일가에 수백억 원을 지원한 데 대해 횡령죄를 물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당장 수의는 벗었지만 이 부회장이 벗어야 할 혐의는 많아 보인다.
강현석 기자 angeli@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