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시가 MC 송해의 이미지를 차용해 꾸린 작은 무대 앞에는 오토바이들이 즐비했다. 고성준 기자
서울시 측은 지난해 11월 30일 “탑골공원 일대는 공원 실버영화관 등 이용시설이 풍부하지만 안전하지 못한 보행 공간, 지저분한 거리환경 등에 대한 배려가 없어 개선이 필요했다. 탑골공원 인근을 젊은 시절을 추억할 만한 친숙한 환경을 조성해 ‘마음껏 누벼서 즐겁게 이해받고 안심이 되는 기쁜’ 락희거리로 변신시켰다”고 밝혔다.
서울시가 락희거리에 적용한 ‘고령화 서비스 디자인’ 중 대표적인 아이템은 ‘상냥한 가게’다. 상냥한 가게는 노인들을 위한 서비스를 제공하는 상점이다. 서울시는 락희거리 내의 11개 상점을 상냥한 가게로 선정했다. 상냥한 가게 마크가 있는 식당은 서울시와 협의해 노인들을 위해 흰 쌀밥 대신 현미밥을 주고 큰 글자 메뉴판도 설치했다.
서울시는 상냥한 가게의 테이블과 화장실에 ‘지팡이 거치대’와 변기일체형 세면대가 있는 ‘어르신 우선 화장실’도 설치했다. 락희거리 건물 벽엔 60~70년대 유명했던 영화 장면들을 그린 락희 벽화와 KBS 장수 프로그램 <전국노래자랑>의 MC 송해의 이미지를 그린 작은 공연무대도 마련됐다. 락희거리의 노인들은 황태해장국 등의 식사를 약 2000원 안팎의 저렴한 값으로 한 끼를 해결할 수 있다.
사업 추진 초기 당시 변태순 서울시 디자인정책과장은 “물리적인 환경개선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주민 스스로 운영하는 프로그램을 통해 지속적인 시민 참여형 서비스디자인의 모범사례가 되도록 노력하겠다”고 설명했다.
서울시가 락희거리를 만든 뒤 약 한 달이 넘게 흘렀지만 실상은 달랐다. 1월 20일 오후 기자가 탑골공원 인근을 찾았을 당시 탑골공원의 노인들 대부분은 락희거리를 알지 못했다. 박승희 씨(75)는 “노인들을 위한 거리가 있는지도 몰랐다. 송해길은 알고 있지만 탑골공원 북문 쪽은 자주 가지 않는다”고 말했다.
서울시 홍보도 미흡한 수준이었다. 탑골공원 주변 인도에 락희거리를 홍보하는 표지판은 하나에 불과했다. 안내사항이 작은 글씨로 쓰인 탓에 표지판을 무심코 지나치는 노인들이 많았다. 길에서 만난 홍성철 씨(73)는 “락희거리를 한 번도 못 들어 봤다. 홍보를 안 해주니까 알 길이 없다”고 전했다.
락희거리 입구에 들어서자 악취도 진동했다. 서울시가 애당초 밝힌 ‘노인들을 위한 깨끗한 거리’의 취지가 무색한 순간이었다. 입구 오른편 탑골공원 담벼락 쪽엔 온갖 쓰레기봉투가 널려있었다. 노숙인들이 담벼락을 따라 삼삼오오 모여 술판을 벌이고 있었기 때문에 알코올 냄새도 코끝을 찔렀다.
상냥한 가게의 한 상인은 “서울시가 칼로 무 베듯이 간판들을 만들어 놨다. 간판만 번듯하면 뭐하나. 오히려 사람들이 부담스러워서 거리에 오지 못한다. 시에서 요란을 떨었지만 달라진 것은 아무것도 없다. 노숙인들 때문에 거리가 전에도 지저분했고 지금도 지저분하다”고 답답한 심경을 전했다. 다른 상인은 “거리를 조성하면서 정화 작업을 안 하다 보니 효과를 전혀 못 느끼고 있다”고 성토했다.
하지만 서울시는 “거리 조성 과정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다”는 입장이다. 서울시 관계자는 “물리적으로 깨끗한 환경을 만들어놓고 실제로 체감하는 정책을 추진하려면 예산을 한 번에 몇 십억을 투여해야 하는데 그런 상황이 아니다. 이번에 락희거리 조성을 하면서 탑골공원 뒤편의 부정적인 이미지를 긍정적인 이미지로 바꿀 수 있는 단초를 마련했다. 종로구가 노숙인들에 대한 계도를 위해 청결기동대를 운영하고 있다. 정기적으로 거리환경 개선을 하고 있기 때문에 좋아질 것”이라고 해명했다.
일부 상점(상냥한 가게 11곳)들은 60~70년대 옛 글자체를 살린 간판을 내걸고 있어 묘한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었다. 하지만 거리 안쪽의 고물상은 락희의 취지와 어울리지 않아 보였다. 일부 무허가 상점들이 곳곳에 쳐놓은 천막들은 상냥한 가게들과 뒤죽박죽 섞여 있었다. 서울시가 MC 송해의 이미지를 차용해 꾸린 작은 무대 앞에는 오토바이들이 즐비했다.
상인들 사이에선 “서울시가 무리한 전시행정 사업을 밀어붙인 탓에 세금이 낭비됐다”는 불만이 쏟아진다. 상냥한 가게의 또 다른 상인은 “페인트를 새로 칠하고 상점들의 간판을 바꾼 것 말고는 시의 지원은 일절 없었다. 특히 왼쪽 입구에 고물상이 있어 복잡하다. 크레인이 달린 차가 좁은 입구에 오가는데 하루에 몇 번씩 되풀이 된다. 할머니들이 리어카에 폐품을 실고 와서 입구를 막고 있다. 관광객도 노인도 올 수 없는 거리다. 효과가 없다”고 했다.
상인들의 불만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정육점을 운영 중인 상인은 “우리는 노인들과 상관이 없는데 상냥한 가게로 정해 놨다. 고기를 파는 곳이라 효과를 못 느끼고 있다”고 했다. 다른 상인은 “간판이 다 바뀌긴 했는데 락희거리를 알고 찾아왔다는 사람을 보지 못했다. 손님이 늘지도 않았다. 발전이 있는지 잘 모르겠다”고 전했다.
이에 대해 서울시 관계자는 “탑골공원 쪽은 어르신들이 활용할 만한 콘텐츠가 많다. 하지만 기존의 부정적인 모습들 때문에 어른들이나 젊은이가 찾지 않았다. 이번 사업이 상인들의 기대감을 충족하기 위한 것은 아니다. 어르신들이 더 안전하고 서비스를 받으면서 존중 받는 환경을 만들기 위함이다”고 밝혔다.
서울시는 락희거리의 실버영화관을 ‘추억을 파는 극장’으로 홍보해왔다. 락희거리 옆 실버영화관에서 55세 이상 성인의 관람료는 2000원이다. 일반 극장에 비해 관람료가 저렴하다. 서울시는 탑골공원을 찾은 노인들이 편리하게 영화를 볼 수 있도록 락희거리 안내판에 실버영화관의 위치를 표시했다.
하지만 정작 락희거리 안에선 실버영화관을 위한 표지나 홍보 문구를 찾아볼 수 없었다. 락희거리 끝에서 낙원상가 쪽으로 깊숙이 들어가야 실버영화관 입구를 겨우 발견할 수 있었다. 실버영화관을 찾지 못하고 헛걸음하는 노인들이 부지기수였다.
실버영화관의 노인들도 락희거리를 알지 못했다. 평소 실버영화관을 자주 찾는다는 홍성철 씨(73)는 “가끔 고등학교 시절을 회상하면서 오래된 영화 보러 가끔 온다. 락희거리는 못 들어봤다”고 전했다. 실버영화관 관계자는 “여기는 노인들을 위한 극장이지만 락희거리는 처음 듣는다”고 전했다.
서울시가 락희거리에 투입한 예산은 약 2억 6000만 원이다. 종로구청은 올해 말까지 보도환경정비사업(약 10억 원)을 락희거리 조성을 위해 진행할 예정이다. 하지만 종로구청 내부에서조차 락희거리를 성토하는 목소리도 새어나온다. 익명을 요구한 종로구청 관계자는 “서울시에서 사업을 너무 대충했다. 우리 구에서는 청장이 의지가 있어서 예산을 받아 했지만 처음에 시 예산은 1억 밖에 없었다. 시에서 대충 간판을 고치는 사업을 종로구가 가까스로 확장시켰다. 서울시에서는 간판이나 대충해놓고 사업이 완료됐다고 하는데 너무 무책임하다”고 비판했다.
최선재 기자 sun@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