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여 년 전 현대카드를 단숨에 신용카드 업계 상위권으로 도약시킨 정태영 현대카드·현대캐피탈 부회장에 대해 양재동(현대차그룹 본사) 고위 임원이 한 말이다. 정몽구 회장의 둘째 사위지만 정의선 부회장과 애초 다른 ‘신분(?)’임을 암시적으로 드러낸 셈이다.
사실 정 부회장은 입시학원의 명문인 종로학원 창업자의 장남으로 나름 ‘로열패밀리’다. 국내에서 보기 드물게 미국 MIT MBA(경영학석사) 과정을 마친 재목이기도 하다. 그래도, 삼성과 함께 대한민국 양대 재벌로 꼽히는 현대차그룹 정 씨 가문과 비교하면 다소 초라해지는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정 부회장은 결국 현대차그룹 내에서 스스로 일가(一家)를 이뤄냈다.
정태영 현대카드·현대캐피탈 부회장. 연합뉴스
최근 미국 제너럴일렉트릭(GE)은 보유 중인 현대카드 지분 43%의 매각처를 정했다. 해외펀드 두어 곳과 현대커머셜이다. 현대커머셜은 정 부회장과 부인인 정명이 씨가 지분 50%를 가진 회사다. 이 회사는 이번에 현대카드 지분 19.01%를 매입해 이미 보유 중인 지분 5.54%와 함께 지분율 24.55%로 단독 2대주주가 됐다. 1대 주주는 39.96%를 가진 현대차다.
현대커머셜이 비록 2대주주지만, 현재 지배구조에서는 캐스팅 보트를 행사할 수 있다. 현대차와 기아차 지분을 합하면 48.44%다. 해외펀드 여러 곳이 27% 지분을 보유 중이다. 어느 쪽이든 현대커머셜 지분이 있어야 과반을 이룰 수 있다. 게다가 정 부회장은 현대카드 이사회를 장악하고 있다. 10명의 등기임원 가운데 2명은 현대차그룹에서 임명하고 있지만 정 부회장은 사내이사 1명과 최소 2명 이상의 사외이사 선임권을 가질 수 있다. 이사회의 과반이다.
현대·기아차가 현대카드 지분을 계속 유지할 수 있을지도 미지수다. 현재 여론조사 대선후보 지지율 1위인 문재인 더불어민주당 전 대표는 재벌개혁 과제 가운데 금산분리 강화를 강조한다. 만약 차기 정권에서 금산분리가 강화된다면 현대·기아차의 현대카드 지배력이 크게 약화될 수밖에 없다.
2005년 현대차그룹이 금융 부문에서 GE와 손잡을 당시 정 부회장은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이번 GE의 지분 매각 과정에서도 정 부회장이 상당한 역할을 했을 가능성이 크다. GE는 지분 43%를 매각하면서 주당 9799원, 총 6761억 원을 받았다. 2008년 말 현대커머셜이 처음으로 현대카드 지분 5.5%를 인수할 때 치른 값은 주당 1만 2800원씩 모두 1138억 원이다. 8년여 전의 거래 가격이 지금보다 더 비쌌던 셈이다.
지난해 9월 재무제표 기준으로 현대카드의 순자산가치는 2조 6530억 원이다. 지분 43%면 순자산가치 1조 1408억 원에 해당한다. 결국 GE는 순자산가치의 59%의 값에 지분을 처분한 셈이다. 물론 싸게 팔았다고 GE가 밑지는 것만은 아니다. GE는 2005년 이래 배당을 통해 현대캐피탈과 현대카드 투자금을 거의 다 회수한 것으로 알려졌다.
아무리 글로벌 기업인 GE지만 비상장 상태에서 43%에 달하는 지분을 매각하기는 쉽지 않은 일이다. 현대커머셜이 지분 매입에 나선 것은 반길 만한 일이다. 이번에 지분 매입에 나선 해외펀드 입장에서는 현대커머셜을 믿고 투자를 결정했을 가능성이 크다. 현대카드는 이번 지분 거래 이후 상장을 추진하겠다는 방침을 정했다. 종합하면 이번에 새롭게 현대카드 주주가 된 해외펀드들도 정 부회장 덕을 꽤 본 셈이다. 이들이 사외이사를 선임한다면 그들 역시 이사회에서 정 부회장에게 힘을 실어줄 수 있다.
하지만 무엇보다 가장 결정적인 것은 정몽구 현대차그룹 회장의 뜻이다. 정 회장이 금융 부문을 정 부회장 부부에게 떼어주려는 듯한 정황 증거들이 여러 곳에서 포착된다. 그 핵심에 현대커머셜이 있다.
현대커머셜은 2007년 현대캐피탈에서 상용차와 건설장비를 대상으로 한 대출·할부판매금융, 리스영업 등의 사업부를 4601억 원에 매입해 설립된 회사다. 설립 당시 주주는 현대차(50%), 현대모비스(20%), 기아차(15%), 위아(15%) 등이며 대표이사는 정태영 사장이다.
자본금 1000억 원으로 설립된 현대커머셜은 첫해 매출 580억 원, 당기순이익 79억 원의 경영실적을 거둔다. 그리고 2008년 기아차와 위아가 보유지분을 정 부회장 부부에게 320억 원에 매각한다. 이해 말 현대커머셜은 현대카드 지분 5.5%를 1138억 원(주당 1만 2800원)에 매입한다. 당시(2008년 9월 말) 자기자본(812억 원)의 140%에 달하는 엄청난 투자다.
이후 현대커머셜은 급성장한다. 2008년 매출이 1357억 원으로 전년 대비 2.3배 불어나고 당기순이익은 136억 원으로 급증한다. 2009년 1월에는 현대·기아차 대형상용 할부금융 시장점유율(M/S) 100%를 달성한다. 설립 5년 만인 2011년 매출액 3243억 원, 당기순이익 733억 원에 달한다. 2015년 기준 현대커머셜은 매출액 3700억 원에 535억 원의 순이익을 내는 알짜회사로 성장했다.
2010년 6월 현대모비스가 보유 지분 20%를 정 부회장 부부에게 197억 원에 매각한 이후에는 배당에 나섰다. 배당액을 보면 2010년 100억 원, 2011년 300억 원, 2012년 310억 원, 2013년 173억 원, 2014년 124억 원, 2015년 370억 원, 6년간 1377억 원에 달한다. 정 부회장 부부 몫만 688억 원이 넘는다. 세금을 감안하면 지분 매입에 투자한 돈 520억 원을 7년여 만에 모두 회수한 셈이다.
서울 여의도 현대카드·현대캐피탈 본사 전경. 일요신문 DB
정 부회장 부부가 현대커머셜을 통해 현대라이프생명보험을 지배하고 있는 구조도 증거 중 하나다. 현대차그룹이 2012년 녹십자생명을 인수하면서 현대커머셜도 유상증자에 참여, 지분 284만 주를 369억 원에 매수했다. 이후 2014년 다시 유상증자에 참여해 448만 주를 1779억 원에 사들였다,
현재 현대커머셜은 현대라이프 지분 20.37%를 가진 3대주주다. 현대라이프 1대주주는 대만의 푸본생명(48%)이지만 2대주주가 현대모비스(지분율 30.28%)다. 현대커미셜이 현대라이프 과반 지분을 확보할 여지가 충분한 셈이다. 이들 세 회사만 묶어도 신용카드-할부금융-생명보험을 아우르는 금융그룹이다.
재계 관계자는 “정 부회장은 현대종합상사와 현대정공, 기아차 전무 등을 역임하다 2003년부터 금융을 맡았다. 현대정공 시절부터 ‘현대모비스’라는 브랜드 아이디어를 낼 정도로 일반경영과 브랜드 전략에 탁월한 능력을 보였다. 하지만 금융 부문에 대한 직접 경험은 적었다. 그래서 GE라는 글로벌 파트너를 통해 카드업을 배운 것으로 보인다. 같은 방식으로 푸본생명으로부터도 보험업을 배우는 게 아닌가 생각한다”고 말했다.
정 부회장은 지난 2014년 말 종로학원을 입시업체인 하늘교육에 매각했다. 매각금액은 총 1100억 원 규모인 것으로 알려졌다. ‘오너’가 될 수 있던 가업을 과감히 매각한 것은 새로운 가업을 일으키겠다는 강한 의지를 확인시켜줬다는 평가다.
한편 정몽구 회장의 큰 사위는 선두훈 대전선병원 이사장이다. 선 이사장은 3D프린팅 업체도 경영하고 있다. 자수성가한 인물이다. 정 회장의 큰딸인 정성이 씨는 현대차그룹 광고대행사인 이노션의 대주주이자 고문이다. 정 회장의 막내딸 정윤이 씨는 해비치호텔앤드리조트 전무다. 신성재 전 현대하이스코 사장과 2014년 이혼했다. 신 전 사장은 친가 쪽 기업인 삼우 부회장을 맡고 있지만 최근 현대제철로 복귀할 수 있다는 관측도 나온다.
정몽구 회장은 동생인 고(故) 정몽우 현대알루미늄 회장의 아들인 정일선 현대비앤지스틸 사장도 각별히 배려하고 있다. 정일선 사장은 금속 및 광물수출입과 운송업 등을 영위하는 자산 500억 원대의 현대머티리얼 지분 100%를 보유하고 있다. 2010년 설립된 이 회사의 최대 거래처는 현대차그룹 철강계열사들이다.
최열희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