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기문 전 유엔 사무총장이 2월 1일 오후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대선 불출마를 선언했다. 박은숙 기자 espark@ilyo.co.kr
반기문 캠프 내부에선 당혹해하는 기류가 역력하다. 일찌감치 캠프에 합류해 정무 업무를 담당했던 이상일 전 의원은 1월 24일 한 라디오에 출연해 “반 전 총장이 중도 포기할 가능성은 0%”라고 장담했다. 이 전 의원은 “지켜보셨으면 좋겠다. 내기라도 했으면 좋겠다. 지지율이 약간 떨어진 것 때문에 언론에서 그런 관측을 하고 또 특정 정당에서 그런 걸 계속 이야기하고 있다. 반 전 총장이 몇몇 의원들을 만난 자리에서 그럴 가능성이 전혀 없다고 했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그러나 반 전 총장은 백기를 들어 올렸다. 이 전 의원은 “절망했고 자책감에 빠졌다. 안타깝지만 총장의 결단이기 때문에 받아드린다”면서 “반 전 총장이 기자회견 후에 참모들에게 ‘상의하면 말릴 것 같아서 사전에 알리지 않았다. 정말 미안하다. 순수하고 소박한 뜻을 가지고 시작했는데 너무 순수했던 것 같다’고 말했다”고 전했다. 일주일 전 반 전 총장의 완주를 호언장담했던 이 전 의원으로선 머쓱해질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오세훈 바른정당 최고위원은 반 전 총장으로부터 러브콜을 받아 2월 2일 캠프에 합류할 계획이었지만 전날 불출마 선언으로 바른정당에 남게 됐다. 오 최고위원은 2월 2일 “오늘 최고위원 직을 내려놓고 반 전 총장의 대선 캠프에 합류할 예정이었다. 캠프에서 선거를 총괄 지휘하는 입장이 돼서 보수 정권 재창출을 위해 어떤 기여를 한다는 결정을 내렸고, 캠프 인선을 마치고 오늘 이 최고위 회의가 끝나면 입장을 발표할 계획이었다”라고 털어놨다.
새누리당 충청권 의원들의 탈당 계획도 물거품이 됐다. 충청권 의원들은 반 전 총장의 대선 행보를 돕기 위한 탈당을 거듭 논의했으나 불출마 선언으로 ‘멘붕(멘탈 붕괴)’에 빠졌다. 결국 정진석 성일종 이명수 박덕흠 이종배 경대수 등 충청권 의원들은 ‘탈당 유보’로 입장을 정리했다.
특히 탈당을 주도했던 정 전 원내대표는 ‘낙동강 오리알’ 신세가 됐다. 외곽에서 반 전 총장을 지원하던 정 전 원내대표는 반 전 총장의 불출마 선언 직후 통음을 한 것으로 전해졌다. 정 전 원내대표는 ‘반기문 대안론’으로 떠오른 황교안 대통령 권한대행 국무총리를 저격하기도 했다. 정 전 원내대표는 1월 30일 자신의 SNS에 “말도 안 되고 실현 가능성도 없는 미친 짓이다. 스스로 사임하고 이를 자기가 수리하고 대통령 권한대행을 또 다시 자기가 임명하고 대선에 출마한다. 지나가는 소가 웃을 일”이라며 황 권한대행의 대선 출마설을 맹비난한 바 있다.
이에 대해 신동욱 공화당 총재는 2월 2일 “반 전 총장 불출마로 정 전 원내대표 ‘미친 짓’ 발언이 이틀 만에 ‘헛발질’로 부메랑 맞았다. 황 권한대행 저격수를 자처했던 정 원내대표가 쏜 총알마다 빗나간다”고 꼬집었다.
김무성 바른정당 고문도 쓰린 속을 달래고 있다. 김 고문은 최순실 국정농단 사태가 터지자 11월 23일 대선 불출마를 선언했다. 김 고문은 당시 “오늘 제 정치 인생의 마지막 꿈이었던 대선 출마의 꿈을 접고자 한다”면서 “보수의 썩은 환부를 도려내고 합리적 보수가 재탄생하는데 밀알이 되고자 한다”면서 박근혜 대통령 탄핵을 주도하겠다고 밝혔다.
김 고문은 대선 출마를 포기하고 반 전 총장을 도와 보수 정권을 재창출하겠다는 큰 그림을 그렸다. 최근까지도 김 고문은 반 전 총장과 회동하며 영입에 공을 들여왔다. 김성태 바른정당 의원은 2월 2일 교통방송 <김어준의 뉴스공장>에서 “김 고문이 근래 술을 안 하는데, 불출마 선언 직후 상당히 술을 많이 드시는 모습을 봤을 때 안타깝게 생각한다“고 했다. 여권의 한 보좌진 또한 “반 전 총장이 김 고문에게 직접 전화해 진심으로 미안하다는 마음을 전했다고 알고 있다. 최근까지도 반 전 총장의 영입을 위해 애썼는데 상당히 충격적일 것”이라고 말했다.
정병국 바른정당 대표는 불교방송 라디오에서 “반 전 총장의 불출마 선언으로 가장 치명타를 입은 사람이 김 고문인 것은 분명하다. 자신의 불출마 선언, 보수 진영 전략 수립 등이 모두 헝클어졌기 때문이다”라고 했다. 나경원 새누리당 의원도 김 고문을 위로했다. 나 의원은 2월 1일 <TV조선>과의 인터뷰에서 “당까지 박차고 나간 김무성 대표가 제일 안 됐다”고 전했다.
하지만 나 의원 본인 역시 상처를 입었을 것이다. 나 의원은 지난해 12월 새누리당 비박계 의원들이 신당 창당을 위해 탈당 러시가 이어질 때 신당 행을 보류했다. 당시 나 의원은 “반 전 총장으로서는 사실상 신당이 ‘비박신당’으로 치장돼 있을 때 선뜻 오시기 힘들 것”이라며 탈당 대열에 동참하지 않았다.
새누리당에 잔류한 나 의원은 반 전 총장 귀국이 임박해오자 “중도 보수의 가치를 담을 수 있는 소중한 자산이다. 반 전 총장의 대선 행보를 돕겠다”고 했다. 이후 나 의원은 반 전 총장 자택 복귀 환영식과 1월 25일 반 전 총장 초청 간담회 등에도 모습을 보이며 반 전 총장 지지를 거듭 표명했다.
나 의원은 반 전 총장의 대선 불출마 후 “안타깝고 아쉬운 부분이 있지만 반 전 총장 개인이나 대한민국의 긴 역사를 볼 때에는 오히려 더 나은 결정인 것 같다”고 했다. 이에 정청래 전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2월 1일 SNS에 “나경원 의원, 이제 어쩌나? 지금 같은 시대에는 반 전 총장이 나라를 이끌 적임자라며 반 전 총장 귀국 때부터 찰싹 달라붙었던 나 의원. 반 전 총장 불출마 폭탄에 그의 정치 인생도 반쯤은 끝났다”며 직격탄을 날렸다.
김경민 기자 mercury@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