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금융권 취업을 준비하던 김 아무개 씨(27)는 미심쩍은 모집공고를 발견했다. 대기업 계열사에서 금융전문가를 양성한다는 3주짜리 아카데미의 교육과정에는 ‘생명보험의 이해’가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었다. 취업이 절실한 그는 여러 대외활동을 하고 교육과정을 이수해 왔으나 이번 교육과정에는 고민이 앞섰다. 3주라는 짧지 않은 기간 동안 합숙을 하게 되면 다른 취업준비를 하지 못하게 되는 데다, 해당 아카데미가 정확히 무엇을 교육하는지 파악하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이에 김 씨는 이 같은 고민을 취준생 커뮤니티에 털어놓았고, 뜻밖의 답변을 듣게 됐다. 해당 교육과정이 금융전문가가 아닌 보험설계사를 뽑기 위한 프로그램이라는 것. 한 커뮤니티 회원은 “청년들을 금융전문가 양성이라는 명목으로 불러서 결국 지인들 보험계약을 하게끔 만드는 프로그램이다. 저 프로그램 만든 분 아주 대단하다”고 알렸다. 다른 회원도 “보험 모집 맞다. 나도 보험회사에서 몇 개월 교육받고 잠시 영업했었는데, 적성에 맞지 않아 그만두려 했더니 나가지 말라고 설득만 몇 시간 동안 하더라”고 전했다.
지난해 진행된 ‘KB생명 동계 인턴 프로그램’의 실상은 계약직 설계사 채용공고로 드러났다.출처=온라인 커뮤니티
지난해 대학가에서는 김 씨와 같은 금융권 취준생 및 졸업예정자들의 피해사례가 속출했다. 삼성생명, KB생명 등의 보험사가 ‘보험설계사’를 명시하지 않은 채 ‘금융전문가’ ‘금융체험단’ ‘인턴십’ 등의 문구로 학생들을 모집해 교육과정과 인턴십을 진행했기 때문이다. 금융권의 ‘낚시성 채용공고’ 논란이 여전하다는 지적이다.
이에 삼성생명 측은 “교육 명칭을 ‘금융전문가 과정’으로 사용하고 있으나 일부러 취준생들이 헷갈리도록 의도를 두고 쓴 것은 아니다. 설계사 과정인 것을 명확하게 밝혔다. 다만 설계사 개인이 채용사이트라던가 카페 같은 곳에 홍보문을 게재하며 ‘인턴’ 등의 용어와 혼용해서 쓰는 사례가 있는 것 같다. 회사 차원에서 그런 부분들은 조치하고 있다”고 해명했다.
KB생명보험 또한 ‘낚시성 채용 공고’로 논란을 빚었다. 금융전문가에 도전하는 취업준비생들을 위한 체험·교육프로그램이라던 ‘KB생명 동계 인턴 프로그램’의 실상은 본사차원의 채용이 아니라 보험설계사들이 무단으로 진행한 계약직 설계사 채용공고로 드러났다. 이후 KB생명보험은 지원자들에게 사과문을 발송하고 재발방지대책을 내놓기로 한 것으로 알려졌다.
바늘구멍을 통과하기보다 힘들다던 취업에 성공한 ‘취뽀생’들의 상황도 어렵기는 마찬가지다. 이들 대부분이 은행 취업에 성공하면 곧바로 어플과 통장영업에 투입되기 때문이다. 신입사원들은 모교를 방문해 지인들을 총동원해 통장개설을 부탁하고, 인턴사원들은 어플을 다운로드 해달라고 부탁하는 실정이다. 특히 ‘어플’의 경우 은행들이 모바일 플랫폼을 강화하겠다며 앞다퉈 내놓으며 은행원뿐만 아니라 정식 직원이 아닌 인턴들까지 영업에 시달리는 셈이다.
대학 3학년생인 서 아무개 씨(24)는 지난해까지 취업에 성공한 선배들이 학교에 찾아와 통장을 만들어달라고 하는 것을 자주 목격했다“면서 “최근에는 인턴을 하는 선배들이 은행 어플을 깔아달라고 요구하는 경우가 많다. 어플은 많은 정보도 필요치 않고 돈도 들지 않아 부탁하면 들어줄 수밖에 없다. 추천인란에 사원번호를 꼭 적어달라고 하더라”고 전했다.
금융·경제 관련 학과에 재학 중인 최 아무개 씨(28) 또한 “대학 동기의 친구가 은행에 취업했다며 찾아와 부탁해 통장을 개설한 적 있다. 서로 친분이 없거나 건너건너 아는 사이에 개인정보를 유출하게 돼 찝찝한 기분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돈이 들지 않는 터라 부탁을 거절하기 어렵다. 특히 과가 금융이나 경제 쪽이면 은행에 취업하는 이들이 많아 동아리나 과를 돌면서 통장을 만들어달라는 동기나 선후배가 많다. 취업에 성공하면 찾아와 통장영업을 하는 것이 관행처럼 된 것 같다”고 설명했다.
한때 대학생들과 취준생을 끌어들여 인맥영업을 강요해 사회적 파장을 불러왔던 다단계 통신판매 등의 수법과 비슷해 주의가 요구된다. 가뜩이나 ‘헬조선’, ‘이포삼포세대’ 등 청년들이 힘든 상태에서 금융권들의 전횡이 도를 넘고 있다는 지적이 제기되고 있다.
여다정 기자 yrosadj@ilyo.co.kr
“자소서가 연구 보고서 수준”…‘신한문예’ ‘국민문예’는 무엇? 취준생들의 온라인 커뮤니티에서는 은행권 자소서가 악명 높기로 유명하다. 문항수와 문항별 분량이 많다는 점에서 ‘XX문예’ 등으로 불리기도 한다. 또한 은행 지점을 직접 방문한 뒤 개선해야 할 점을 평가하거나, ‘급변하는 금융환경에서 대응할 방안을 제시하라’ ‘어플을 사용한 뒤 개선방안을 제시하라’는 등의 다소 까다로운 질문도 있어 “자소서가 아니라 연구보고서 수준”이라는 취준생들의 토로가 이어진다. 신한은행의 자소서는 긴 분량으로 취준생들로부터 ‘신한문예’라고 불리기도 했다. 사진출처 = 온라인커뮤니티 게시물 캡처. 취준생들은 자소서 문항을 공유하며 “문예창작학과와 복수전공해야 작성할 수 있을 것 같다” “모 은행에서는 자기소개서를 자필로 써서 스캔해서 제출하라더라” “은행 자소서는 전문가나 전공자 도움 없이 쓰기 힘들어서 인터넷 강의나 도우미의 도움을 받는 경우가 많다”며 심경과 경험을 전한다. 특히 어플이나 지점에 대한 평가는 지원자들의 소개와 관련성이 떨어지는 문항인 만큼 “지원자들을 이용해 컨설팅 아이디어를 얻으려는 것 아니냐”는 지적도 제기됐다. 한 은행은 어플을 회원가입해 이용한 뒤 평가하라는 내용을 자조서 항목에 넣었다가, 지원자들을 ‘어플영업’에 이용했다는 비판을 받고 해당 항목을 수정하기도 했다. 한편, 취업포털에 따르면 지난해 기업들의 입사지원서 항목에는 큰 변화가 있었다. 스펙 관련 항목이 줄고, 직무능력이 구체화 되며 전체 분량(글자수)이 줄었다. 총 1만자 이내의 긴 분량으로 ‘신한문예’ ‘신한수필’ ‘신한에세이’로 불렸던 신한의 자기소개서 또한 3천자 이내로 간결해졌다. [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