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넷에서는 매크로 프로그램 판매 정보를 쉽게 찾을 수 있다.
“말 그대로 전쟁터였다. 좌석 선택창도 못 보고 끝났다.”
지난해 11월, 전 세계에서 8000만 장의 앨범을 판매한 영국 인기 록밴드 ‘콜드플레이(Coldplay)’의 내한공연 소식이 전해졌다. 데뷔 이후 처음 한국을 찾는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국내 팬들은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하지만 기쁨은 잠깐이었다. 4만 5000장에 달하는 티켓은 예매 시작과 동시에 1분도 지나지 않아 모두 동났다. 피가 튈 정도로 경쟁이 극심했다는 뜻의 ‘피케팅(피의 티케팅)’이라는 말까지 나왔다.
콜드플레이의 공연 예매가 빠르게 마감된 것은 인기 공연의 자연스러운 현상이라고 볼 수도 있었다. 그런데 인터넷 커뮤니티와 SNS 등에선 다른 이야기가 나왔다. 이들은 “주변에서 예매에 성공한 사람이 없다”거나 “취소 티켓이 거의 나오지 않는다”며 “‘매크로(자동명령프로그램)’을 쓰는 전문 암표상들의 대량 매집이 의심된다”고 주장했다.
실제로 예매 마감 직후 숨 돌릴 틈도 없이 대량의 암표가 쏟아져 나왔다. 적은 수의 티켓이 나온 게 아니었는데도 티켓 거래 사이트 등에선 정가 4만 4000원짜리 표가 40만~50만 원에 거래됐고, 정가가 15만 4000원인 위치가 가장 좋은 좌석은 무려 225만 원까지 치솟았다. 암표 논란은 크게 불거졌고 결국 공연을 주최한 현대카드 측이 공연을 하루 더 연장하기로 결정한 뒤에야 티켓 거래 가격이 안정됐다.
# 1초 만에 ‘예매 완료’
인기 공연 티켓 예매는 속도가 빠른 최신 장비를 구비해 시작 시간 전부터 대기하고, 새로고침 버튼 클릭, 예매 대기 시스템 등록 등의 절차를 수차례 반복해야 한다. 그래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예매 시작 화면조차 보지 못하고 실패한다. 하지만 ‘매크로(macro instruction) 프로그램’을 활용하면 성공 확률은 크게 높아진다. 최근 전문 암표상들은 이 프로그램으로 대량의 티켓을 선점하고 있다.
매크로 프로그램이란 단순 반복 작업을 자동으로 처리하는 소프트웨어의 일종이다. 이용자가 키보드 입력값과 마우스 클릭 횟수 등을 사전에 입력하고 저장하면 작업 시간을 단축시킬 수 있다. 편의성 차원에서 개발된 프로그램이지만 전문 암표상들은 이를 악용한다. 공연 티켓 예매의 경우, 이 프로그램을 이용하면 1초 안에 공연 날짜와 시간, 좌석 선택, 결제 정보를 지정한 횟수만큼 입력할 수 있다. 지난해 8월 아이돌그룹 샤이니 콘서트 티켓 예매에서 320장의 티켓을 선점한 뒤 암표 거래를 해 논란이 됐던 한 이용자도 이 방식을 활용했다.
문제는 앞서의 경우처럼 암표상 한 명이 대량매집을 한 뒤 수십 배의 폭리를 취하는 등 사실상 시장교란에 가깝게 활용하고 있는 데다, 기능이 향상된 프로그램이 속속 개발되면서 사용 범위도 점차 넓어지고 있다는 점이다.
특히 지난해 프로야구 한국시리즈 예매에도 매크로 프로그램이 활용 됐다. 한국시리즈 입장권은 1인당 최대 4매까지만 예매할 수 있어 일반적인 방법으로는 대량매집이 불가능하지만, 인터넷에서 판매되는 개인정보를 구입해 매크로 프로그램을 돌리면 가능해지는 것. 한국시리즈 당시 암표를 판매했던 A 씨는 “티켓 거래 사이트에서 구매하기도 했지만, 매크로 프로그램으로 예매한 사람들에게 웃돈을 주고 티켓을 구한 뒤 표를 팔기도 했다”고 귀띔했다. 지난해 한국시리즈 원가 5만 원이었던 블루지정석 암표는 5회가 끝난 뒤에도 25만 원에 팔렸다.
매크로는 대학 수강신청, 주식 매매뿐만 아니라 선착순으로 판매하는 의류, 신발 등 사이트에 접속해 물품을 선점한 뒤 되팔아 이익을 챙기는 데도 활용된다. 전국 유명 캠핑장과 휴양림 사이트의 황금시간대 예약을 싹쓸이한 뒤 중고 사이트 등에서 거래해 수백만 원의 차액을 남긴 이용자가 경찰에 붙잡힌 사례도 있다.
누구나 쉽게 매크로를 구할 수 있다는 점도 문제로 지적된다. 각종 포털 사이트에서 ‘매크로’를 검색하면 관련 정보가 줄지어 나온다. 간단한 대학 수강신청이나 펜션 예약 매크로 제작 방식을 알려주는 한편 ‘인터파크 예스24 티켓팅 매크로’ ‘주식시장 모니터링 매크로’ 등이 1만~10만 원 사이에 판매되기도 한다. 구체적인 사용법이나 프로그램 시연 화면을 올려놓고 광고하는 블로그도 쉽게 찾을 수 있다.
전문적으로 매크로를 제작·판매하는 곳도 있다. 주식 거래용이나 보안 수준이 높은 홈페이지에 침투하는 등 고급 기능이 적용된 프로그램은 30만~50만 원에 거래된다. 매크로 제작자 A 씨는 “프로그래밍 소프트웨어로 이용자가 원하는 맞춤형 매크로를 제작할 수 있다”며 “매달 5개 이상은 의뢰가 들어온다. 인기 아이돌의 콘서트가 열리면 학생들이 구입하기도 한다”고 말했다.
# 명확한 제재 규정 없어
매크로 활용 사례는 점점 늘고 있지만 현재로선 제재할 방법은 없다. 프로그램 사용이 ‘편법’일뿐, ‘불법’이 아니라 단속할 법적 근거가 없기 때문이다. 현행 정보통신망법은 타인의 컴퓨터에 악성코드를 설치하거나 전달하는 경우만 규정해 처벌한다. 자신의 컴퓨터에 설치하는 매크로는 정보통신망법의 제재도 받지 않는다. 현행 경범죄처벌법 역시 현장에서 사고파는 거래만 암표 매매에 해당하기 때문에, 온라인상에서 웃돈을 얹어 판매하는 암표는 해당되지 않는다.
실제로 지난해 8월 예스24가 매크로를 이용해 아이돌 콘서트 표를 대량으로 상습 구매한 6명을 업무방해 혐의로 고소했지만, 아직도 경찰 수사 단계에서 머물고 있다. 형법상 업무방해죄가 매크로 이용자에게 적용된 선례가 없기 때문이다. 예스24 관계자는 <일요신문>과의 전화통화에서 “매크로 이용에 대한 명확한 처벌 규정은 없지만, 업무방해에 해당된다고 보고 상습 이용자를 대상으로 법적 대응을 했다”면서도 “프로그램은 다양하게 개발되고 매크로 사용 건수나 의심 횟수는 늘어가고 있지만 경찰 판단이 길어지면서 답답한 측면도 있다”고 말했다.
결국 업체와 일반 예매자들은 자구책으로 매크로를 이용하는 암표상들에게 대응하고 있다. 예스24 측은 보안 프로그램을 주기적으로 교체‧개발하는 동시에, 보안 프로그램을 우회하는 매크로 프로그램도 있어 직원들이 직접 매크로 사용 또는 의심 사례를 확인하고 있다. 일반 예매자들의 경우엔 공연명, 좌석번호, 계좌번호 등을 명시해 온라인 암표상을 예매처에 신고한 뒤 강제 취소를 하고 있다. 이렇게 강제 취소된 티켓은 예약 대기자에게 돌아가거나 취소된 티켓을 모아 또 다시 선착순 판매가 이뤄지는데 이런 방식이 ‘취케팅(취소+티케팅)’이라 불린다. 매크로에 치여 티켓 구입의 기회를 놓친 일반 예매자들이 예매 전쟁에서 이길 수 있는 몇 안 되는 방법 중 하나지만 최근에는 ‘취케팅 매크로’도 속속 등장하고 있다.
한편, 지난 2월 8일 국회입법조사처는 ‘인터넷 매크로 프로그램의 문제점과 규제 개선 방안’이라는 보고서를 발표하면서 “처벌 조항은 있는데, 실질적인 적용이 어려운 상황”이라며 “법상 구체적으로 매크로 프로그램 등을 정의하고, 위반하는 경우 제재를 유도할 수 있는 조항 신설이 필요해 보인다”고 지적했다.
입법조사처는 ‘전자상거래 등에서의 소비자보호에 관한 법률’에 ‘통신판매업자는 매크로 프로그램을 활용해 특정 물품을 다량으로 구매하는 행위가 발생하고, 그 행위가 소비자의 정당한 이용 행위를 저해하는 경우 해당 물품 구매를 취소할 수 있다’는 식의 조항을 신설해 매크로족을 규제할 수 있다고 조언했다.
문상현 기자 moon@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