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데 이처럼 생활의 필수요소로 자리 잡을 만큼 인기를 끌고 있는 것과는 반대로 운영자나 이용자들은 여전히 익명의 페이지가 갖는 ‘양날의 검’을 이해하지 못한 것처럼 보인다. 분야별로 다양한 대나무 숲이 생겨난 지 약 5년. 무분별한 제보와 고발성 글까지 걸러지지 않고 그대로 제보되면서 대나무 숲은 숱한 형사 고발과 민사 소송에 휩싸였지만, 명확한 대책 마련 없이 여전히 여과 없는 제보가 현재 진행형으로 게시되고 있다.
페이스북 익명 제보 페이지 ‘숭실대학교 대나무숲’ 캡처.
지난 2월 10일 페이스북 페이지 ‘숭실대학교 대나무 숲’에는 한 고발 글이 올라왔다. 대학교 연합동아리를 통해 만난 남자친구에게 헌신했지만 남자친구가 자신을 이용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는 내용이었다. 제보자는 남자친구가 다른 친구들과의 단체 메신저 대화를 통해 자신을 물주 취급하고 성적으로 모욕감을 느낄 만한 이야기를 나눈 증거도 함께 제보했다. 현재 군인이라는 이 남자친구는 제보자를 “개 같은 X”이라고 부르거나 “상관이 내 여친하고 X쳐 줘야 내가 꼬투리 잡고 헤어질 수 있다”는 모욕적인 발언도 서슴지 않았다.
원글에서 밝힌 신상 정보는 학번 정도가 전부였지만 ‘매의 눈’을 가진 학생들이 이후 올라오는 자료와 제보자의 친구들의 증언을 종합해 이 남자친구의 정확한 신상을 밝혀냈다. 그는 숭실대의 또 다른 동아리에서 활동했던 학생으로, 페이스북 페이지에 얼굴과 실명이 나온 영상이 올라와 있다는 사실이 확인되면서 비난 댓글은 걷잡을 수 없이 늘어났다. 그의 행실에 대한 비난이나 비판성 댓글도 많았지만 외모나 성적인 요소 비하, 심각한 욕설들이 더 많은 비중을 차지하기 시작했다. ‘숭실대 군인 남친 사건’으로 외부에 알려지면서부터 글을 읽고 숭실대 대나무 숲으로 들어온 타 학교 학생들이나 일반인들의 비난 댓글도 셀 수 없을 정도였다.
지난 2월 12일 ‘숭실대 군인 남친 사건’의 당사자가 올린 해명글의 일부. 신상유포 관계자들에게 법적인 책임을 물을 것이라고 밝히고 있다. 숭실대 대나무숲 캡처.
단순 정보 공유나 불만 토로 등의 창구를 제외하면 ‘대나무 숲’은 특정 인물이나 단체, 업체 등에 대한 조리돌림의 장으로도 활용돼 왔다. 제보자는 익명이라고는 해도 댓글을 다는 이용자들은 대부분 자신의 계정을 이용하기 때문에 도가 지나친 비판 댓글의 경우 이들 역시 사이버 명예훼손이나 모욕죄로 수사기관을 드나드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심지어는 제보자의 글을 게시하고 방치했다는 이유로 대나무 숲 운영자 역시 고소되는 일도 있었다.
지난해까지 서울의 한 대학교 대나무 숲 페이지를 운영해 왔다는 한 남성은 “아무래도 개인적인 이야기나 특정인 또는 단체, 업체에 대한 비판 글도 여과 없이 올라가기 때문에 제보자는 물론 운영자들도 철저히 비공개로 부쳐지는 경우가 많다”면서도 “그렇지만 운영자나 그들의 지인 사이에서는 암암리에 누가 누구인지 알려져 있어서 대나무 숲 글 피해자가 작정하고 고소한다면 글 쓴 사람은 물론 운영자들까지 같은 죄로 걸려 들어가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실제로 서울의 모 대학교 대나무 숲 운영자 역시 제보 받은 허위 사실을 페이지에 게시했다가 피해자로부터 고소를 당하기도 했다.
도가 지나친 댓글을 단 이용자들이 제보 글로 인한 피해자로부터 사이버 상 명예훼손과 모욕 혐의로 고소되는 경우도 많았다. 앞선 대나무 숲 페이지 운영자는 “특히 사회적 또는 도의적으로 책임을 물을 수 있을 만한 누군가에 대한 글이 올라온다면 그들의 신상이 드러나더라도 앞뒤 생각 안 하고 비난하거나 심지어 욕설 댓글까지 쓰는 경우가 많다”라며 “자신들의 학교를 망신시킨 사람을 비난하는 것이므로 이 행위가 도의적으로 올바르다는 생각에서 기인한 것으로 보이지만 결국 법적인 책임에서는 자유로울 수 없다”고 지적했다. 이미 신상이 알려진 특정 인물이나 단체에 대한 명예를 공개적으로 훼손하거나 모욕하는 행위이므로 명예훼손의 성립 요건인 특정성과 공연성이 모두 성립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제보자는 상대방에 대한 명확한 신상을 밝히지 않았지만 이용자들이 유추를 통해 신상털이에 성공했을 경우, 과연 제보자에게도 법적 책임을 물을 수 있을까? 다수의 전문가들은 ‘그렇다’고 답했다. 일말의 유추 가능성을 통해 실제로 신상털이가 이뤄졌고 이로써 상당한 피해가 발생했다면 그 책임과 손해배상을 제보자에게도 물을 수 있다는 것.
법무법인 정세의 차현환 변호사는 “익명의 제보자가 누군가에 대한 비난·비판 글을 게시할 경우 글 자체에 신상정보가 정확히 명시되지 않았더라도 일부 정보만으로도 상대방을 특정할 수 있다면 사이버상 명예훼손이나 모욕의 혐의가 적용될 수 있다”고 지적했다. 제보자가 작성한 글을 토대로 속칭 ‘네티즌 수사대’들이 유추를 통해 상대방에 대한 정보를 알아낼 경우에도 제보자 역시 형사적 책임에서 자유롭지 못하다는 것.
이어 “사이버 명예훼손의 경우도 일반 명예훼손과 마찬가지로 특정성과 공연성 등의 요건이 갖춰져야 그 책임을 물을 수 있는데, 익명이라고는 하지만 공개된 장소에서 특정이 가능한 상대방에 대한 비난 글을 올린다면 글을 게시한 그 자체만으로도 혐의가 성립된다”고 설명했다.
법무법인 강호의 차재석 변호사도 “만일 제보 글에 상대방의 신상이 거의 드러나지 않았다고 할지라도 유추를 통해 밝혀질 수 있는 가능성을 배제하지 않았다면 원 글 작성자에게 신상털이와 그로 인한 명예훼손 및 모욕의 책임을 물을 수 있을 것“이라며 ”사실 적시 명예훼손의 경우 공익을 위한 목적이 있다면 위법성이 조각될 수 있는데, 일반적으로 아무런 공익적 사유 및 목적 없이 특정인물이나 업체 단체 등을 비난할 목적만을 가지고 작성한 글 또는 댓글은 위법성이 조각될 수 없어 명예훼손이나 모욕의 혐의가 충분히 인정된다“고 지적했다.
김태원 기자 deja@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