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표팀 주장은 소속팀 주장보다 더 어려운 자리다. 각 팀에서도 내로라하는 스타 선수들이 모여 대표팀을 이룬다. 서로 처음으로 함께 뛰게 된 사이도 많다. 이 선수들을 한데 묶어 소통을 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다행히 이번 WBC에는 소속팀에서 주장을 맡고 있는 선수들이 여럿 포함돼 있다. 롯데 이대호, NC 박석민, 두산 김재호, 넥센 서건창, 한화 이용규까지 주장 다섯 명이 WBC 28명 최종엔트리에 포함됐다. 김 감독은 이 가운데 김재호를 선택했다. 김재호는 두산에서 올해로 2년째 주장 완장을 차고 있다.
# 김재호가 WBC 대표팀 주장으로 뽑힌 이유
김재호는 1985년생이다. 김재호 위로는 1976년생인 임창용과 1982년생인 오승환, 김태균, 이대호 등이 있다. 박석민과 이용규, 장원준 등은 동갑내기다. 그러나 주장 완장은 김재호가 차게 됐다. 일단 두산 소속 선수들이 8명이나 대표팀에 포함된 게 큰 이유로 작용했다. 두산 다음으로 선수를 많이 보낸 팀은 3명이 차출된 NC와 KIA. 그 정도로 이번 대표팀에서 두산 선수들의 비중이 무척 크다. 또 투수들에게는 주장을 잘 맡기지 않는 전통, 김재호라는 선수 개인의 역량 등도 중요하게 고려됐다. 김 감독은 “타자들 가운데 이대호라는 고참 선수가 있지만, 그동안 대표팀을 위해 많은 일을 했으니 주장까지 맡기기에는 무리가 있다고 판단했다”며 “중간급인 김재호가 소통을 잘 해줄 것이라고 믿는다”고 했다.
2017 WBC 한국 대표팀 주장 완장을 차게 된 두산 김재호. 사진 출처 : 두산 베어스 홈페이지
김재호는 2015년 프리미어12에서 처음으로 태극마크를 달았다. 그는 “엄청난 무게감을 등에 지고 있는 것 같다. 버겁다는 생각이 들 때도 있지만, 감독님 믿음에 보답하기 위해 최선을 다해 대표팀을 잘 이끌어 가겠다”고 했다. 또 “아무래도 지난해까지 2년 연속 (두산이) 한국시리즈에서 우승한 점도 영향을 미치지 않았을까 싶다”는 포부를 밝혔다.
# 심재학과 김기태, 대표팀 주장의 출발
프로 최정예 멤버가 출전한 첫 국가대표팀은 1998년 방콕 아시안게임에서 닻을 올렸다. 당시 주장은 현재 넥센 수석코치를 맡고 있는 심재학이었다. LG에서 뛰고 있던 심재학은 리더십과 친화력 면에서 주위의 인정을 받는 선수였다. 당시 대회에 출전했던 선수들은 “팀워크가 최고였고, 정말 즐겁게 대회를 치렀다. 결과도 금메달로 끝나서 무척 기뻤다”고 회상했다.
2000년 시드니 올림픽에서는 김기태 현 KIA 감독이 주장을 맡아 한국 야구 사상 첫 올림픽 금메달을 수확하는 데 일조했다. 쌍방울 간판타자로 활약하며 홈런을 펑펑 때려내던 시절이었다. 지금도 고참 선수들이 ‘형님’이라 부를 만큼 카리스마 넘치는 포용력을 갖고 있는 김 감독이다. 굵직굵직한 스타 선수들이 즐비한 대표팀 주장에 적역이었다. 당시 쌍방울 사령탑은 바로 현재 WBC 지휘봉을 잡고 있는 김인식 감독이었다. 김 감독은 최근 KIA 선수단 휴식일에 WBC 대표팀 오키나와 캠프를 찾아 김인식 감독에게 인사하고 선수들을 격려하기도 했다.
# ‘주장 단골’ 이종범의 위엄
이종범 MBC 스포츠플러스 해설위원은 모범적인 주장의 좋은 예다. 소속팀에서도 그랬고, 대표팀에서도 그랬다. 이종범은 2002년 부산 아시안게임에서 대표팀 주장을 처음 맡았다. 당시 한국은 금메달로 영광을 이어갔다. 그리고 4년 뒤 열린 2006년 초대 WBC는 주장 이종범의 위용을 그라운드 안팎에서 널리 알린 대회였다.
대회 도중 선수들을 격려하고 있는 WBC 국가대표팀 주장 시절의 이종범.
은퇴 후 해설위원으로 변신한 이종범 역시 최근 대표팀의 오키나와 캠프를 방문했다. 그는 당시를 회상하면서 “나뿐만 아니라 모든 선수들이 국가를 위해 열심히 해야겠다는 다짐을 했다. 최고참으로 대회에 참가해 주장을 맡게 됐고, 후배들에게 유니폼 뒤의 이름보다 앞에 새겨진 ‘코리아(KOREA)’를 먼저 생각하자고 당부했다”고 회상했다. 또 “지금 생각해 보면 2006년 함께한 WBC 멤버들이 고맙다”며 “주장은 아무리 잘하고 싶어도 친구·동료의 신뢰가 없으면 안 된다. 나는 많이 부족했다. 그런데 동료들이 너무 잘해 줬다”고 다른 선수들에게 공을 돌렸다.
# 올림픽과 WBC, 명암이 교차한 진갑용
한국 야구의 업적을 논할 때 결코 빼놓을 수 없는 한 가지. 2008 베이징 올림픽 8전 전승 우승이다. 2000년 시드니 올림픽 동메달만으로도 충분히 환희를 느꼈던 한국에 남자 구기 종목 최초의 금메달을 안긴 일대 사건이었다. 당시 대표팀 주장이 바로 은퇴한 포수 진갑용이다. 포수 선배였던 김경문 당시 대표팀 감독은 주저 없이 진갑용에게 주장 완장을 맡겼고, 대회가 끝난 뒤 주장에게 남다른 고마움을 표현했다.
사실 진갑용은 이 대회에서 몸 상태가 정상이 아니었다. 쿠바와의 결승전에도 진갑용 대신 강민호가 선발 포수로 나서 8⅓이닝을 소화했다. 그러나 심판의 석연치 않은 판정으로 한국이 끝내기 역전패 위기에 몰렸던 9회말 1사 만루서 강민호가 퇴장 명령을 받았다. 모두가 울분에 차 있던 그 순간 진갑용이 무릎을 절룩거리며 다시 마스크를 썼다. 마운드에 올라온 투수 정대현과 힘을 합쳐 공 3개만으로 천금 같은 병살타를 솎아냈다. 주장이 보여줄 수 있는 투지였다. 베이징 하늘에 태극기가 올라가고 애국가가 흐르는 순간, 백전노장 진갑용도 끝내 눈물을 보였다.
다만 2013년 열린 제3회 WBC는 정반대였다. 당시 대표팀 사령탑은 진갑용의 소속팀이었던 삼성의 류중일 감독. 류 감독은 주장으로 다시 진갑용을 선택했다. 베이징 신화의 기운이 이어지길 바랐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대표팀 성적이 좋지 않았다. 예선 1라운드에서 2승 1패를 거두고도 점수 득실차에서 뒤져 3위로 탈락했다. 대표팀은 대만에서 쓸쓸하게 돌아왔다.
2010년 광저우 아시안게임에서 대표팀 주장으로 활약한 봉중근. 일요신문 DB
이종범과 진갑용 외에도 많은 선수들이 대표팀 주장을 거쳤다. 희비도 교차했다. 국가대표 명 외야수로 활약했던 박재홍은 마지막 태극마크였던 2006년 도하 아시안게임에서 주장을 맡았다가 동메달에 머무는 아쉬움을 남기고 대표팀을 떠났다. 한국이 준우승했던 2009년 WBC 대표팀 주장은 투수 손민한이지만, 대회 출장 기록이 없다. 2006년 WBC에서 ‘슈퍼 스타’ 알렉스 로드리게스를 3구 삼진으로 돌려세웠던 그는 대회를 앞둔 전지훈련에서 어깨 통증이 재발해 마운드에 오르지 못했다. 대신 더그아웃에서 선수들을 격려했다.
2010년 광저우 아시안게임과 2014년 인천 아시안게임에서는 투수 봉중근과 4번 타자 박병호가 각각 주장으로 활약했다. 봉중근은 2010년 대회 첫 경기인 대만전에서 엔트리 착오로 갑자기 등판할 수 없게 된 선발 투수 윤석민 대신 부랴부랴 첫 투수로 마운드에 올라 1⅓이닝을 무실점으로 막아냈다. 대만전은 늘 금메달로 가는 중요한 고비다. 봉중근이 첫 단추를 잘 꿴 덕분에 대표팀은 승승장구했다. 결과는 금메달이었다.
박병호는 국가대표 역사에서 처음 탄생한 20대 주장이었다. 그가 주장을 맡은 이유는 단 하나였다. “야구를 너무 잘해서”다. 박병호는 그 믿음에 보답했다. 김현수, 강정호와 함께 클린업 트리오를 이뤄 또 한 번의 금메달에 일조했다. 잡음 없이 무사히 대회를 마쳤다.
정근우도 ‘모범 주장’ 가운데 한 명이다. 국가대표 붙박이 2루수인 그는 2015년 프리미어12에서 처음으로 주장으로까지 뽑혔다. 한국이 오타니 쇼헤이의 공을 치지 못해 고전할 때는 근성과 활기로 선수들을 격려했고, 준결승에서 극적인 역전승을 거두고 결승에 진출했을 때는 노련미와 경험으로 선수들을 다독였다. 당시 사령탑이던 김인식 감독은 이번 WBC 대표팀에서도 정근우에게 주장 역할을 기대했다. 그러나 무릎 부상으로 출전하지 못하게 돼 아쉬움이 남았다.
배영은 일간스포츠 기자
캡틴 이치로 일본팀 1·2회 우승 견인차 스즈키 이치로(44·마이애미)는 2006년 1회 WBC와 2009년 2회 WBC에서 일본 대표팀 주장을 맡았다. 한국 야구의 국제대회 역사를 얘기할 때 꼭 한 번은 언급될 수밖에 없는 인물이다. 한국과 일본 야구의 남다른 라이벌 관계와도 밀접한 관련이 있다. 특히 WBC에서는 한국 선수들과 ‘말’로도 팽팽한 기 싸움을 벌였다. 이치로의 몸에 공을 맞춘 배영수(한화)와 이치로의 기를 꺾은 봉중근(LG)이 WBC를 통해 ‘열사’가 되고 ‘의사’가 됐을 정도다. 물론 그만큼 이치로가 한국에는 ‘일본 야구’를 상징하는 인물이었다는 의미도 된다. 이치로를 제압하는 것은 곧 일본을 꺾는다는 것과 다르지 않았다는 얘기다. 일본 대표팀에서 이치로의 존재감은 엄청났다. 일본은 주장 이치로를 앞세워 1회와 2회 WBC를 모두 우승했다. 1회 대회 대표팀 감독을 맡았던 오 사다하루(왕정치)가 2회 대회에서도 이치로를 주장으로 임명하면서 “이치로가 1회 대회 때 안팎에서 큰 역할을 해줬다. 이번 대회에서도 1회 때 이상으로 이치로의 역할과 존재가 필요하게 됐다”고 설명했을 정도다. WBC 1,2회 대회에서 일본 대표팀 주장으로 활약한 이치로. 연합뉴스 상대 국가를 특정하지는 않았지만, 한국과 대만 언론에는 자국을 지칭하는 말로 받아들여졌다. 그리고 이 코멘트가 한국어로 전달되는 과정에서 “한국이 일본을 30년 동안 이길 수 없도록 만들겠다”로 바뀌었다. 순식간에 ‘망언’으로 둔갑해 한국 인터넷이 들끓었다. 훌륭한 야구선수로 각광받던 그에게 ‘입치료(입을 치료 받아야겠다는 뜻)’라는 별명이 붙었다. 결과적으로 이 망언 논란은 한국 선수들의 투지를 일깨우는 계기가 됐다. 김인식 WBC 대표팀 감독이 “그 말을 들은 선수들이 꼭 일본을 이겨야겠다고 마음먹은 것 같다”고 말했을 정도다. 일본전 도중 투수 배영수가 선배 구대성의 지시를 받고 이치로의 엉덩이를 강속구로 맞혀 버리는 일도 벌어졌다. 이치로도 이 경기에선 보기 드문 악송구까지 범하면서 고전했다. 대신 한국과의 4강전에서 3안타를 쳤다. 쿠바와의 결승전에서도 우승을 만들어 내는 적시타를 때려냈다. 한국의 반감과는 별개로 일본을 우승으로 이끌었다. 2009년 WBC에서도 이치로는 한국 대표팀의 눈엣가시였다. 특히 이 대회에선 한국과 일본이 다섯 번 만났다. 아시아 지역예선인 조별리그 1라운드에서 예선과 결승전을 치렀고, 미국에서 열린 본선 2라운드에서도 같은 조에 묶여 예선과 결승전을 반복했다. 결국 결승전 상대까지 일본으로 정해지면서 9경기 중 절반이 넘는 5경기를 일본과 맞붙었다. 8강전에서 다시 만났을 때는 이치로가 “헤어진 여자친구를 다시 만나는 기분”이라고 했다. 자연스럽게 이치로는 한국 대표팀의 집중 공략 대상이었다. 1라운드 예선에서 일본에 충격적인 콜드게임 패를 당한 한국은 1라운드 결승전에서 일본의 기를 먼저 꺾을 ‘한 수’가 필요했다. 한국 선발 봉중근의 무기는 ‘영어’였다. 봉중근은 1회 첫 타자 이치로가 타석에 들어서자 갑자기 타임을 요청했다. 미국에서 야구한 경험을 살려 유창한 영어로 주심에게 뭔가 항의했다. 내용은 “이치로가 등장할 때 터지는 카메라 플래시 세례가 투구에 방해가 된다”는 것. 당연히 받아들여졌다. 어안이 벙벙한 이치로는 범타로 물러났다. 그 다음 경기에서도 이치로가 1루로 나가 리드폭을 넓힐 때마다 봉중근의 번개 같은 견제구가 날아들었다. 이치로가 2루 쪽으로 무게 중심을 옮기다 말고 황급히 1루로 슬라이딩하기를 몇 차례. 결국 이치로는 도루를 포기했다. 한국이 일본과의 중요한 일전에서 두 번이나 승리한 비결이다. 그러나 이치로의 실력은 더 중요한 순간에 나왔다. 한국과의 결승전에서 결정적인 한 방을 날렸다. 9회말 2사 후 극적인 동점을 이루면서 3-3으로 연장전에 돌입한 한국은 연장 10회초 2사 2·3루 위기를 맞았다. 이때 이치로가 타석에 들어와 한국의 마무리 투수 임창용을 상대로 2타점 결승타를 때려냈다. 이 경기에서 이치로가 때려낸 네 번째 안타였다. 한국의 숙적, 그러나 인정할 수밖에 없는 야구장인. 그게 바로 일본 대표팀의 정신적 지주 이치로다. 이치로는 뒤늦게 자신의 발언으로 한국인들이 분노했다는 얘기를 전해 듣고 무척 곤란해 했다는 후문이다. 2012년 오릭스에 입단한 이대호에게 인사하면서 “한국팬들은 나를 미워하지 않느냐”는 질문도 던졌다고 한다. [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