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남자는 범죄자다. 경찰과 검찰, 국정원이 작성한 수사‧조사기록에 그렇게 적혀있다. 앞이 보이지 않는 남자는 살인범, 옆에 선 남자는 간첩이었다. ‘국가기관이 규정한’ 내용만으로 두 사람을 보면, 불과 4년 전까지 북한에 살던 간첩이 서울 한복판에서 시각장애를 가진 살인범과 함께 생활하며 그를 돕고 있다.
한 남자가 걷는다. 시각장애 1급 판정을 받은 그는 앞이 잘 보이지 않는다. 대낮에도 혼자 외출하려면 단단히 ‘각오’를 해야 한다. 같은 길을 걷지만 몇 번이나 부딪치고 넘어진다. 목적지에 도착해도 어딘지 몰라 헤매고, 주변의 안내를 받은 뒤에도 알아보지 못한다.
그 옆에 한 남자가 선다. 이 남자는 앞이 보이지 않는 남자의 눈이다. 길을 걷다 차가 오거나 비켜 가야 할 장애물이 있으면 팔을 잡아주고, 길 한가운데 미끄러운 얼음이 있으면 말없이 옆으로 돌아 걷는다. 그가 동행하면서부터 앞이 보이지 않는 남자가 목적지까지 가는 일이 어렵지 않다.
두 남자는 범죄자다. 경찰과 검찰, 국정원이 작성한 수사‧조사기록에 그렇게 적혀있다. 앞이 보이지 않는 남자는 살인범, 옆에 선 남자는 간첩이었다. ‘국가기관이 규정한’ 내용만으로 두 사람을 보면, 불과 4년 전까지 북한에 살던 간첩이 서울 한복판에서 시각장애를 가진 살인범과 함께 생활하며 그를 돕고 있다.
# 간첩과 살인범
간첩이었던 남자: “행님(형님), 뭐 보여야 말이지.”
앞이 보이지 않는 남자: “그런 말 하지마라(웃음).”
두 남자가 처음 만난 날을 회상했다. 이들은 지난해 여름 처음 대면했지만, 앞이 보이지 않는 남자가 간첩이었던 남자를 보지 못했다고 말하면서 큰 웃음이 터졌다. 짓궂은 농담이었지만 앞이 보이지 않는 남자는 불쾌해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옆의 남자에게 “늘 미안하고 고맙다”고 말했다.
두 남자는 지난해 11월 말부터 가톨릭 신부들의 도움을 받아 서울 모처에서 함께 생활하고 있다. 그동안 부산에서만 살던 앞이 보이지 않는 남자가 서울로 올라올 수 있었던 것도 간첩이었던 남자의 도움 덕분이었다. 앞이 보이지 않는 남자가 앞서 21년간 복역하는 과정에서 일부 치아가 빠져 1년간 서울에서 치과 치료를 받아야 했는데, 부산에서 서울을 오가는 길이 쉽지 않았다. 사정을 들은 옆의 남자는 신부들에게 알렸고, 신부들은 흔쾌히 허락했다.
간첩이었던 남자는 앞이 보이지 않는 남자의 눈이자, 손이다. 화장실이나 방을 찾는 것은 이제 익숙해서 혼자서도 오갈 수 있지만, 식사를 할 땐 항상 간첩이었던 남자가 돕는다. 그는 식사를 하면서 앞이 보이지 않는 남자를 위해 뜨거운 국을 퍼왔고, 반찬으로 고등어조림이 나오자 뼈를 모두 발라 밥 위에 얹었다. 앞이 보이지 않는 남자는 “혼자서도 할 수 있다”며 “괜찮다”고 말했지만, 그가 볼 수 없는 미소를 지으며 옆의 남자는 묵묵히 밥을 먹었다.
치과 치료는 지하철로 40분 거리에 위치한 병원에서 받는다. 간첩이었던 남자는 앞이 보이지 않는 남자의 팔을 붙잡고 길을 안내한다. 둘은 별다른 대화도 없고, 그저 앞만 보고 걷지만, 걸음은 늦지 않는다. 그만큼 간첩이었던 남자가 그를 익숙하게 이끌었다. 차가 오거나 장애물이 있으면 피하고, 계단을 오르내릴 땐 발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그는 앞이 보이지 않는 남자를 돕는 데 별다른 말은 하지 않았다. 그는 “그저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할 뿐”이라고 짧게 말했다.
홍강철(왼쪽), 장성익(가명, 오른쪽) 씨. 두 남자는 가톨릭 신부들의 도움을 받아 서울 모처에서 함께 생활하고 있다.
# 두 남자가 걸어온 길
두 남자가 만나기 전까지, 이들은 비슷한 길을 걸어왔다. 앞이 보이지 않는 남자의 경찰 수사기록을 보면, 그는 어두운 새벽, 가로등도 없는 한 강변도로 공사장 인근에서 한 남성과 한 여성을 납치해 감금하고 감시했다고 자백했다. 남성과는 치열한 격투를 벌였고, 여성의 머리를 돌로 내리쳐 숨지게 했다고 말했다.
그는 1990년 1월, 세상을 놀라게 한 ‘부산 엄궁동 2인조’ 사건의 공범으로 구속 된 장성익 씨(가명)다. 장 씨는 당시 검찰조사에서부터 경찰의 고문‧위법 수사로 허위자백을 했다고 주장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결국 사건 발생 2년 뒤 대법원에서 무기징역이 확정됐고, 21년간 복역하다 가석방돼 지난 2013년 다시 세상에 나왔다.
장 씨 옆에 선 남자는 2014년 3월, 언론에 대서특필된 ‘북한 보위사 직파간첩’ 홍강철 씨다. 당시 국정원과 서울중앙지방검찰청 발표를 보면, 2013년 8월 남한에 들어온 홍 씨는 국가정보원 탈북자 합동신문센터(현 북한이탈주민보호센터)에서 조사 받다 간첩 혐의가 밝혀졌다.
하지만 불과 반년 만에 이 사실이 법원에서 뒤집어졌다. 홍 씨의 변호인단은 “국정원이 홍 씨의 허위자백을 이끌어내 간첩 혐의로 조작했다”고 주장했고, 1심과 2심 재판부 모두 이 주장을 받아들여 “홍 씨를 간첩으로 볼 수 없다”는 판단을 내렸다. 판결에 불복한 검찰이 상고해 현재 홍 씨 사건은 대법원의 판단을 기다리고 있다.
이들은 각각 경찰과 국정원에서 하지도 않은 일을 했다고 인정했다. 사실과 다른 것을 맞다고 말했다. 이 과정에서 강압과 위법 수사‧조사에 의한 허위자백으로 긴 시간 복역했다.이들의 동행을 그저 흔한 ‘미담’으로만 볼 수 없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앞이 잘 보이지 않는 장성익 씨는 텔레비전도 보지 않는다. 주로 머리맡에 놓인 라디오를 들으며 시간을 보낸다고 한다.
# 브레멘 음악대, 그리고 선한 연대
“버려졌거나 곧 죽을 운명에 놓인 당나귀와 수탉, 고양이와 개. 하지만 이들은 우연히 함께 만나 브레멘 음악대원이 되고자 한다. 동물들은 고난과 역경을 뚫고 새로운 삶을 살게 된다.” 1819년 그림 형제가 발간한 풍자 동화 <브레멘 음악대>의 줄거리다.
이 동화의 줄거리 흐름에서 주된 역할을 하는 건 네 마리의 동물들의 ‘합창’이다. 악당을 쫓아내기 위해 목말 타듯 차곡차곡 등에 올라탄 당나귀와 개, 고양이와 수탉은 한꺼번에 토해내듯 울음소리를 내질렀다. 악당들이 깜짝 놀라 도망간 것은 전혀 예상치 못한, 동물들의 ‘합창’이었다.
장 씨는 삼례3인조, 약촌 오거리 재심을 맡았던 박준영 변호사를 지난해 초 만났다. 당시 경찰의 강압‧위법 수사가 확인돼 현재 재심청구를 준비 중이다. 장 씨가 박 변호사를 만나면서 홍 씨가 장 씨 곁에 섰다. 홍 씨가 장경욱 변호사 등 민들레(국가폭력 피해자와 함께 하는 사람들)변호인단의 도움으로 재판을 받을 때, 박 변호사도 함께했다. 이후 홍 씨가 박 변호사의 재판 등에 종종 동행하면서, 재심청구를 준비 중인 장 씨와 자연스레 만나게 됐다. 서로의 이야기를 들은 장 씨와 홍 씨는 금방 깊은 사이가 됐다.
장 씨의 ‘발’이 되어 준 사람도 나타났다. 삼례 3인조 사건의 ‘진범’ 이 아무개 씨다. 이 씨는 삼례 3인조 사건 관계자 중 가장 먼저 진심 어린 사과를 하고 피해자들로부터 용서를 받았다. 그는 장 씨와 박 변호사 등이 재심청구 준비를 위해 사건 관계자들을 만나고, 복역했던 교도소를 찾는 등 이동하는 과정에서 이 씨는 이들의 운전기사를 자청했다. 이른 오전 기차역까지 마중 나와 서울로 올라갈 때까지 그는 장 씨와 함께했다.
약촌 오거리 사건의 진범을 체포했던 황상만 전 군산경찰서 형사반장도 장 씨와 함께한다. 그는 약촌 오거리 사건 재심에서 무죄 선고를 이끌어낸 또 다른 주역이다. 황 전 반장은 장 씨의 재심청구를 돕기 위해 수사기록을 꼼꼼히 검토하고 있다.
박준영 변호사는 이들의 이야기를 할 때면 늘 상기된 목소리로 말한다. 그는 “법과 제도가 외면한 진실 속에서 이런 연대가 피어났습니다. 세상에 이렇게 선한 연대가 또 있겠습니까”라고 말했다.
앞으로 장 씨가 재심청구를 위해서 걸어야할 길은, 그동안 그가 걸어왔던 길만큼 험난하다. 그는 부딪치거나 넘어지지 않고 걷기 힘든 긴 터널 속에서 ‘작은 빛’을 따라 걷고 있다. 하지만 장 씨는 이제 혼자가 아니다. 두 남자는 어느새 셋이 됐다. 길동무는 늘고 있다.
문상현 기자 moon@ilyo.co.kr
“재판부가 검찰 주장 조목조목 반박”…보위부 직파 간첩 홍강철 씨 사건 “북한 보위사령부(보위사) 소속 공작원이 탈북자를 가장해 국내에 잠입한 뒤 적발됐다.” 서울중앙지검은 지난 2014년 3월 홍강철 씨를 구속기소했다고 밝혔다. 국가정보원이 탈북자 합동신문센터(현 북한이탈주민보호센터)에서 그를 조사하던 중 간첩 혐의를 밝혀냈다고 덧붙였다. 당시 언론은 이를 대대적으로 보도했다. 일부 언론에서는 댓글 공작 의혹으로 궁지에 몰렸던 국정원의 필요성이 재확인된 것이라며 여론을 몰아갔다. 하지만 불과 반년 만에 검찰의 발표는 뒤집어졌다. 지난 2014년 9월 서울중앙지법은 홍 씨에게 ‘무죄’를 선고한 것. 검찰은 항소했지만 지난해 2월 서울고등법원은 이를 기각했다. 이 과정에서 2심 재판부는 이례적으로 검찰의 공소사실을 조목조목 반박하는 판결문을 쓰면서 눈길을 끌었다. ‘보위부 직파 간첩’이라던 홍 씨는 1심 판결 이후 석방돼 ‘자유의 몸’이 됐다. 법원은 홍 씨가 국정원 중앙합동신문센터(합신센터)에서 작성한 자필 진술서와 검찰 피의자신문조서에 대해 1심과 마찬가지로 증거능력을 인정하지 않았다. △수사의 성격도 갖고 있는 합신센터 조사가 변호인 조력 없이, 진술거부권을 고지하지 않은 채 진행됐고 △검찰 조사에서도 진술거부권 보장을 위해 고지해야 할 내용 중 일부가 빠졌다는 것이었다. 여기에 홍 씨는 합신센터 1인실에 135일간 ‘보호조치’ 됐다. 독방 수감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는 또 “왜 탈북했냐”는 단 한 가지 질문만으로 일주일 내내 조사를 받았다. 오전 9시부터 오후 5시 30분까지 조사를 받은 뒤 저녁엔 ‘숙제’라고 불리는 진술서를 썼다. 홍 씨가 볼펜으로 눌러쓴 숙제는 100여 건에 1250여 쪽이었다. 이 과정에서 홍 씨는 스스로 간첩이라고 인정하는 진술서를 썼다. 그런데 홍 씨는 자신의 진술서를 법정에서 부인한다. 그 이유는 검찰이 법원에 낸 기소 직후 검사와 홍 씨의 대화 녹취록에 나온다. 홍 씨는 북에 있는 어머니를 데려오겠는 걸 도와주겠다는 합신센터의 회유에 넘어가 작성한 진술서라고 주장하자 검찰은 그런 사실이 없다고 얘기한다. 검사 : 합신센터에서 어쨌든 뭐 수사와 관련돼서 뭐 그런 걸로 회유하거나 그런 거는 아닌데, 조사 다 끝나고 나서 그냥 뭐 이렇게 “어머님을 북쪽에서 데려 오겠다” 그런 약속을 해주신 것도 아니라고 하던데. 홍강철 : 데려오겠다고 하면 도와주시겠다. 검사 : 아니, 그러니까 홍강철씨가 나중에 어머니를 데려오면…. 여기에 국정원의 2회, 6회 피의자신문조서를 보면 문·답은 물론이고 단어 띄어쓰기, 어법에 맞지 않는 붙여 쓰기가 똑같이 나와있다. 복사를 한 뒤, 붙여넣기를 한 것이다. 당시 이 조서를 쓴 국정원 관계자는 대공수사 10년 베테랑이었다. 검찰의 수사 지휘 여부도 의문이었다. 1심 재판에서 변호인이 “자필 진술서 중 일부(350쪽가량)만 제출돼 진술의 변화 과정을 알 수 없다”며 전체 진술서 제출을 요구한다. 검찰엔 제출했느냐는 물음에 국정원 조사관은 “검찰에 그것을 저희가 왜 제출을 합니까”라고 대답했다. 적법 절차에 따라 조사가 이뤄져야 했고, 이 과정에 문제가 있었다면 검찰에선 제동이 걸렸어야 했다. 그런데 검찰 단계에서 검사가 “변호사 입회하에 조사받으시거나…”라고 하자 홍 씨는 “그냥 갑시다”라고 말한다. 판결문을 보면 홍 씨는 이 과정에서 “아, 이젠 뭐, (고개를 저으며) 지루합니다. 이제는, 아….”라고 말했다. ‘합신센터 입소 후 작성된 진술서 등을 피고인 측이 열람·등사하게 하라’는 법원 결정에도 검찰과 국정원은 응하지 않았다. 적어도 법원에서 드러난 홍 씨 사건에서의 국정원은 인권은 고려하지 않았고 절차도 지키지 않았으며, 증거 없이 자백에만 매달렸고, 법원 명령도 듣지 않아았다. 한편, 홍 씨 사건은 현재 검찰이 상고해 대법원의 판단을 기다리고 있다. [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