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7월 26일 능라인민유원지 준공식에서 북한 김정은-리설주 부부 옆에 자리한 김경희(오른쪽)의 모습. 연합뉴스
이병호 국가정보원장은 지난 2월 15일 국회 정보위에 출석한 자리에서 “북한은 이미 지난 2012년부터 김정남을 살해하고자 시도해 왔으며, 이는 스탠딩오더(명령권자가 취소할 때까지 유효한 명령)”라며 “김정남은 2012년 4월 ‘저와 제 가족을 살려달라’는 서신을 김정은에게 전달하기까지 했다”고 덧붙였다.
그렇다면 지난 5년 간 김정은은 정말 김정남을 제거할 기회가 없었던 것일까. 이병호 원장은 이번 피살 사건의 시점을 두고 말 그대로 ‘스탠딩오더’에 따른 것일 뿐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지 않았다. 하지만 김정남은 김씨 일가 중에서도 특히 나름의 영향력과 국제적 인지도를 갖고 있는 인물이다. 그런 김정남의 피살은 정교한 계획이 있지 않고서는 쉽사리 행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만약 ‘스탠딩오더’가 사실이라면 이렇게 되물을 수도 있다. 북한 당국과 김정은이 이복형 김정남을 제거하고자 하는 의지는 있었겠지만, 이를 방해하는 장애물도 있었던 것은 아닐까. 오더를 내린 지 5년이 지난 후에 김정남이 제거된 것은 바로 그 장애물의 문턱이 낮아졌기 때문은 아닐까.
물론 그 장애물은 김정남의 신변을 보호해 온 중국이 첫째겠지만, 내부 사정도 자세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 필자는 그 또 다른 장애물이 김정일 사후 한때 김정은의 후견인 역할을 해온 고모 김경희라 단언한다. 필자는 이를 자세히 뒷받침할 북한 내부정보 몇 가지를 입수했다. 이 정보를 입수한 것은 한참 전 일이지만, 이번 사건을 설명하는 데 큰 의미가 될 수 있는 부분이다.
북한 내부관계자에 따르면 김정남은 이미 지난 2012년 5월 말경 한 차례 북한에 입국했다. 국내외 몇몇 언론들은 김정일이 사망한 2011년 12월부터 2014년까지 각각 다양한 시점을 거론하며 김정남의 입북설을 거론해 왔다. 하지만 필자가 확인한 바에 의하면, 김정남의 정확한 입북 시점은 2012년 5월 말이었다.
이는 상당히 예민한 시점이었다. 앞서 이병호 원장 말이 사실이라면 이 시점은 김정은이 김정남을 제거하라는 스탠딩오더를 내린 후다. 그 오더의 직접적인 원인은 책 발매다. 김정남은 2012년 초 일본 언론인 고미 요지와의 인터뷰를 통해 <안녕하세요. 김정남입니다>라는 책을 세상에 공개했다. 그 주요 내용은 북한의 개혁개방 주문이었고, 민감한 내부 정보도 담겨 있었다. 김정은으로서는 이미 화가 치밀어 올랐던 시기였다.
그럼에도 김정남이 입북을 강행했던 것은 고모 김경희 때문이었다. 확인한 바에 따르면, 김정남은 당시 항공편이 아닌 육로로 입북했다. 김정남은 중국 단둥을 거쳐 신의주로 넘어갔다. 김경희는 이때 직접 신의주로 가서 김정남을 마중했다. 돌이켜 생각한다면 이미 김경희는 (김정남을 제거하고자 하는) 김정은을 의식했고, 김정남의 신변을 보호하고자 직접 먼 길을 나섰던 것으로 풀이된다.
이때만해도 김경희는 남편 장성택과 함께 김정은의 후견인으로서 실권을 쥐고 있었다. 특히 김경희는 당 조직지도부의 실권자였다. 더군다나 오빠 김정일은 생전에 남긴 유서를 통해 김경희의 유언 집행자로서의 역할을 강조했고, 그 중 하나는 ‘김정남을 보호하라’는 것이었다. 이미 김정일도 생전에 어렴풋이 김정남이 제거될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오빠 김정일의 유언을 받든 김경희는 가문의 큰 어른으로서 책임감이 강했고, 조카 김정남에 대한 애착도 특별했다.
김정남은 김경희라는 든든한 ‘우산’을 믿고 국경을 건넜을 것이다. 물론 가장 큰 목적은 아버지 김정일에 대한 예를 갖추기 위한 것이었다. 장례에 참석하지 못한 장남으로서 꼭 인사를 드리고 싶었던 것이 김정남의 마음이었고, 고모 김경희도 이를 안타깝게 여겼을 것이다.
물론 현실적인 목적도 있었다. 김경희와 장성택은 중국 정부, 특히 중국의 핵심 관계자와 가장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던 김정남을 통해 중국의 의중을 파악하고자 했다. 이 당시 북한과 중국은 핵실험 여부를 두고 일촉즉발의 상황이었다. 어쩌면 김정남은 이때 중국의 몇몇 메시지를 들고 북한에 입국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당연한 얘기지만, 이때 김정남은 김정은을 만나지 않았다. 김정남이 입북해 직접 접촉한 고위급 인사는 밀착해 있던 고모 김경희와 고모부 장성택 외에 한 사람 정도였다. 당시 내각 총리로 있었던 최영림이었다. 최영림은 김일성 때부터 김씨 가계 내부인물들과 아주 밀접한 관계를 가지면서 내부 일을 봐온 인사였다. 그만큼 신뢰가 두터운 인사였다.
지난 2월 13일 피살된 김정남의 생전 모습. 연합뉴스
확실한 것은 이때 김정남은 고모 김경희의 보호 아래 무사히 북한을 빠져나올 수 있었다는 것이다. 이어 김정남은 얼마 안가 또 한 차례 김경희와 접촉한다. 북한 내부관계자에 따르면, 김정남은 2012년 9월 김경희와 재회한다. 장소는 북한이 아닌 싱가포르였다. 싱가포르는 김정남이 자주 드나들며 활동하던 장소였고, 중화권의 영향력이 강하게 미치는 곳이기도 했다.
김경희가 싱가포르에 입국한 가장 큰 이유는 건강 문제 때문이었다. 알려졌다시피 김경희는 2013년 1월부터 신경성 방광염, 당뇨합병증, 우심실 동맥경화, 심전도 이상, 약간의 뇌졸중 증상 등 건강이 극도로 악화됐다. 2012년부터 이미 그 전조가 보임에 따라 싱가포르의 의료진을 만났던 것이다.
필자가 확인한 바에 따르면, 싱가포르를 방문한 김경희는 자기 것은 물론 또 다른 여성의 약을 한 첩 지어갔다. 그것이 김정은의 이복누이 김설송의 것인지 아니면 처 리설주의 것인지는 확인이 되지 않았다.
김경희의 싱가포르 입국 과정과 의료서비스 매칭을 기획한 당사자는 바로 김정남이었다. 그만큼 두 사람의 사이는 각별했던 것으로 보인다. 김경희는 싱가포르 의료진들의 진료 외에도 그곳에서 만난 김정남과 ‘중국식 경제개혁’ ‘싱가포르 식 정치권력 유지’ 등 다소 예민한 내용의 얘기를 나눴던 것으로 확인된다.
또한 장성택의 중국 방문 이후 중국 지도부의 의중을 전해 듣고 싶었을 것이다. 참고로 장성택은 2012년 8월 북한 당·군·정 고위 간부 50여 명과 함께 후진타오 당시 중국 주석, 시진핑 부주석을 접견했다. 북한 김정은의 특사 자격이었다. 김경희에게 김정남은 애착을 갖고 보호하는 조카이자 일종의 중요한 외교적 조력자였던 셈이다.
김경희는 실권을 쥐고 있을 당시 조카 김정남의 우산으로서 역할을 충실히 이행했다. 필자는 이번 김정남의 피살이 북한 내부 권력 구도와도 관계가 깊다고 본다. 김경희는 장성택이 숙청된 2013년 12월을 기점으로 점차 실권에서 멀어졌다. 아마도 김경희가 중앙 권력에 여전한 입김을 과시했더라면 김정남이 이 같은 변을 당하지 않았을지 모른다. 권력으로부터 멀어진 김경희는 더 이상 김정남의 우산으로서 역할을 하지 못했을 것으로 보인다.
현재 김경희는 중앙 권력에서 완전히 멀어졌고, 그저 김씨 일가 어른으로서 조언자 역할만 수행하고 있는 것으로 확인된다. 조카 김정남의 비보를 접한 김경희의 반응이 궁금할 뿐이다.
이윤걸 북한전략정보서비스센터 대표
정리=한병관 기자 wlimodu@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