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히 차기 대권을 꿈꾸고 있는 여야 잠룡들에게 이번 총선은 단순한 국회의원선거 그 이상의 정치적 의미를 지니고 있다. 총선에서 승리할 경우 당내 입지를 확고히 하는 동시에 향후 대권가도에 유리한 고지를 선점할 수 있지만 패할 경우 대망론은 물론 정치생명까지 위협받는 위기상황에 직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차기 대권주자들 간의 맞대결로 4·9 총선 최대 격전지로 부상한 서울 동작을과 은평을에선 그야말로 생사를 건 대권 전초전이 벌어지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또 여야를 망라한 잠룡들도 수도권과 자신의 지역구에서 대망론 불씨를 살리기 위한 ‘생존게임’에 돌입한 상태다. 잠룡들 입장에선 이번 총선이 차기 대선을 겨냥한 실험무대가 되고 있는 셈이다. 죽느냐 사느냐, ‘제2의 대선’ 전쟁을 치르고 있는 잠룡들의 ‘생사별곡’ 속으로 들어가 봤다.
4·9 총선 최고의 빅 매치가 벌어지는 격전지는 단연 서울 동작을이다. 지난해 대선 때 원내 1당 대선후보였던 정동영 전 통일부 장관과 집권 여당인 한나라당의 유력한 차기주자로 급부상한 정몽준 최고위원이 맞대결을 펼치고 있기 때문이다.
‘안정론’을 앞세워 과반 의석 확보를 목표로 하고 있는 한나라당이나 ‘거여 견제론’으로 맞서고 있는 통합민주당은 동작을 선거가 수도권 민심 풍향과 전체 총선 판세를 가늠할 수 있는 잣대가 될 수 있다는 점에서 당 차원의 지원을 아끼지 않고 있다. 두 사람 개인은 물론 총선 후 정국 주도권을 겨냥한 한나라당과 민주당의 치열한 대혈투를 예고하고 있는 상황이다.
정 전 장관은 서민의 아들이자 자수성가형인 자신의 이미지와 재벌가의 후예인 정 최고의 기득권·귀족 이미지를 최대한 부각시켜 차별화를 꾀한다는 전략이다. ‘동작을은 서울의 평균적인 선거구로 서민 중산층이 대부분인데 재벌인 정 최고는 결코 이들의 대표자가 될 수 없다’는 논리를 펼치고 있다. 정 전 장관은 지난 16년간 치러진 네 차례의 총선 결과 민주당(열린우리당 등 전신 포함)이 동작을에서 한나라당(신한국당 등 전신 포함)을 상대로 3승 1패의 우세를 보이는 등 호남세가 강했다는 점에 역점을 두고 ‘거여 견제론’이 탄력을 받으면 전세는 곧 역전될 것이라고 예상하고 있다.
이에 대해 정 최고는 “대한민국에서 제일 유명한 방송 앵커를 했고 노무현 정부에서는 여당 의장과 장관을 지낸 정 전 장관이 평범한 보통사람이라면 저도 당연히 거기에 집어 넣어줘야 한다”고 맞불을 놓고 있다.
정 최고는 자신의 재벌 이미지를 희석시키기 위해 지역 대중 사우나를 찾아 지지를 호소하는가 하면 재래시장과 경로당, 지하철역을 순회하며 주민들과의 접촉을 강화하고 있다. 정 최고는 특히 자신의 재력과 대기업을 경영한 경험을 장점으로 활용해 낙후된 동작을 발전에 기여하겠다는 차별화된 개발 공약으로 승부를 걸겠다는 전략이다.
이처럼 두 사람이 치열한 대결을 펼치고 있는 가운데 여론조사 결과 현재(22일 기준)까지는 정 최고의 지지율이 정 전 장관보다 10%포인트가량 앞서고 있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지난 17일 조선일보와 SBS, 한국갤럽이 발표한 여론조사에서 정 최고는 49.3%의 지지율로 37.4%에 그친 정 전 장관을 따돌렸고 같은 날 한겨레 여론조사에서도 정 최고(42.9%)는 정 전 장관(31%)에게 10%포인트 이상 격차를 보였다. 20일 발표된 MBC와 동아일보 여론조사에서는 정 최고(47%)와 정 전 장관(30.9%)의 지지율 격차는 16.1%포인트로 더욱 벌어졌다.
정 최고 측은 이미 초반 승기는 잡았고 이런 기세라면 충분히 ‘대어’를 낚을 수 있을 것이라는 자신감이 넘치고 있는 분위기다. 반면 정 전 장관 측은 지지율 격차가 좁혀지지 않자 초조해하면서도 아직 초반이고 공식 선거전에 돌입해 견제론과 인물론이 바람을 타면 곧바로 역전할 수 있다며 의지를 다지고 있다.
이명박 정부의 ‘실세 중의 실세’이자 한나라당 차기주자로 분류되고 있는 이재오 의원과 지난해 대선을 완주한 문국현 창조한국당 대표가 맞붙은 은평을도 이번 총선 최대 격전지로 꼽히고 있다.
총선 후 한나라당 당권과 차기 대권이라는 두 마리 토끼 사냥에 나설 것으로 보이는 이 의원이나 이번 총선을 통해 대망론 불씨를 되살리고자 하는 문 대표 모두 물러설 수 없는 대접전을 예고하고 있다. 이 의원은 이명박 정부의 국정운영을 뒷받침할 ‘든든한 후원자론’을 기치로 내세우고 있는 반면 문 대표는 ‘대운하 반대’로 승부수를 띄우고 있다.
▲ 그래픽=장영석 기자 zzang@ilyo.co.kr | ||
21일 발표된 한국일보와 미디어리서치 여론조사에서는 문 대표의 지지율이 42.7%로 이 의원(31.7%)과의 격차를 11%포인트나 벌렸다. 적극 투표 의사층에서도 문 대표(44%)는 이 의원(34%)과의 격차를 10%포인트가량 유지해 대이변을 예고하고 있다. 반면 이 조사에서 17대 총선 때 이 의원과 초접전을 벌였던 송미화 통합민주당 후보는 5.4%의 지지율을 얻는 데 그쳤다. 선거 전문가들은 시간이 흐를수록 문 대표와 이 의원의 지지율 격차가 벌어지고 있는 점으로 미뤄 ‘이명박 정부 2인자’를 타깃으로 정면 승부를 택한 문 대표의 총선 전략이 성과를 내고 있는 것으로 진단하고 있다.
민주당과 창조한국당 주변에서 제기되고 있는 문 대표와 송 후보의 후보단일화 추진 여부도 선거 승패를 가를 핵심 변수로 부상하고 있다. 이명박 정부의 상징적 인물이자 ‘대운하 전도사’를 자임하고 있는 이 후보를 낙마시키기 위해 전략적 공조를 취하자는 게 단일화론의 골자다. 단일화가 추진될 경우 지지율이 크게 앞서고 있는 문 대표 중심으로 이뤄질 가능성이 높다.
이 의원은 3선을 거치며 십수년간 밑바닥부터 지역구를 다져온 저력이 최대 강점. 갈수록 거세지고 있는 ‘문국현 바람’에 대해 이 의원은 “전혀 개의치 않는다”며 “은평을 지역주민들은 대선 패배자를 이 지역의 주인으로 선택하지는 않을 것”이라는 자신감을 피력하고 있다. 이 의원 측은 “자체 여론조사 결과 여전히 문 대표를 10%포인트가량 앞서고 있고 당선 가능성에서 30%포인트 정도의 격차를 보이고 있다”며 승리를 장담하지만 내심 문 대표의 선전에 초조함을 감추지 못하고 있는 분위기다.
정동영 전 장관과 함께 유력한 야권 차기 주자로 자리매김한 손학규 민주당 대표는 ‘정치 1번지’인 서울 종로에 출마해 중요한 대권 시험을 치르고 있다. 종로는 차세대 정치리더를 꿈꾸는 박진 한나라당 의원이 3선을 노리는 지역구이자 역대 총선에서 한나라당이 강세를 보였던 만큼 손 대표에게 힘든 싸움이 될 것이란 관측이 적지 않다. 실제로 지난 92년 총선 이후 두 차례의 재·보궐선거를 포함한 여섯 차례의 선거에서 한나라당은 민주당을 상대로 5승1패의 성적을 보이고 있다.
각종 여론조사에서도 손 대표는 박 의원에게 10%포인트 안팎의 지지율 열세를 보이고 있다. SBS-조선일보(17일) 여론조사에서 손 대표는 30.4%의 지지율을 얻은 반면 박 의원은 39.7%로 9.3%포인트의 격차를 보였다. 같은 날 한겨레 여론조사에서도 손 대표(29.4%)는 박 의원(38.7%)과의 격차를 좁히지 못했다. 한국일보(21일)와 MBC-동아일보(20일) 여론조사 역시 손 대표(각각 30.1%와 31.7%)와 박 의원(각각 39.9%와 42.9%)의 지지율에 별다른 변화가 없는 것으로 나타났다.
박 의원은 초반 승기를 바탕으로 지역 연고를 적극적으로 부각시켜 총선 압승에 견인차 역할을 하겠다는 각오를 다지고 있다. 박 의원은 줄곧 “종로는 정거장이 아니다. 종로의 자존심을 반드시 지키겠다”고 말하고 있다.
이에 반해 손 대표는 인사 파동과 경제위기론 등 이명박 정부의 국정 난맥상을 견제할 ‘건전 야당론’과 인물론으로 승부를 걸겠다는 전략이다. 손 대표가 “개인적으로 박 의원과 맞붙으러 나온 게 아니라 당 대표로서 당을 위해 종로에 출마했다”고 발언한 것은 자신의 대망론을 부각시켜 ‘정치 1번지’ 종로 유권자들의 자존심을 자극하겠다는 나름의 전략으로 풀이된다.
손 대표 측은 박근혜 한나라당 전 대표의 측근으로 보수 성향인 정인봉 전 의원이 자유선진당 후보로 종로 출마를 선언한(20일) 것이 호재로 작용할 것으로 판단하고 있다. 정 전 의원은 지난 16대 총선 때 종로 지역에 한나라당 후보로 나서 48.3%라는 높은 득표율로 당선된 전력을 갖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