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3월 1일 광화문사거리에 마련된 제15차 3.1절 탄핵기각 총궐기 국민대회에 참석한 노인이 보수단체에서 올린 동영상을 공유해 보고 있다. 이종현 기자 jhlee@ilyo.co.kr
주름진 손가락이 스마트폰 화면 위를 빠르게 움직인다. 몇 번이나 반복해본 듯 익숙한 손동작이 멈추자 화면에선 태극기가 가득 담긴 동영상이 재생됐다. 박근혜 대통령 탄핵을 반대하는 집회 생중계 영상이었다. 자신을 ‘애국 할아버지’라고 불러달라던 이 남성(65)은 자랑스럽게 말했다. “내가 우리 손자 전화번호는 못 외웠는데, 이거 보는 방법은 잘 알아.”
지난 3월 1일, 서울 시청 앞 서울광장에서 ‘15차 탄핵 반대 태극기 집회’가 열렸다. 집회를 주최한 ‘대통령 탄핵기각을 위한 국민 총궐기 운동본부(탄기국)’은 이날 500만 명이 모였다고 주장했다. 경찰 추산 발표도 없는 데다 지난해 12월 3일 탄핵소추안 국회 의결을 앞두고 역대 최대 규모로 열렸던 촛불집회(주최 측 추산 170만 명)와 괴리가 큰 수치였지만, 적지 않은 수의 인원이 모였던 건 사실이었다.
집회 현장은 대부분 머리가 희거나 주름이 가득한 참가자들이 채웠다. 주최 측이 준비한 무대에서 들려오는 ‘대한민국 만세’라는 구호에 따라 태극기를 흔드는 참가자들 가운데, 스마트폰을 꺼내들고 서 있는 노인들이 적지 않았다. 일부는 사진을 찍거나 누군가와 통화를 했지만, 한참을 제자리에 서서 스마트폰 화면을 들여다보던 참가자들도 쉽게 눈에 띄었다.
이들은 앞서의 ‘애국 할아버지’와 같이 집회 무대 생중계를 보거나, 카카오톡 메시지를 읽고 있었다. 돋보기를 쓰고 한참 동안 화면을 보다 손가락을 움직이는가 하면, 동영상 사이트 유튜브에 접속해 엄지손가락을 빠르게 움직이며 최신 영상을 검색하는 참가자도 있었다. 부산에서 왔다는 A 씨(72)는 “앞에 사람이 너무 많아서 무대가 안 보여. 소리가 울려서 잘 들리지도 않고. 이렇게라도 봐야지”라며 귀에 이어폰을 끼웠다.
스마트폰을 보는 노인들은 서울광장을 벗어나면 더 쉽게 찾을 수 있었다. 시청역과 가까운 덕수궁길‧정동길과 지방에서 태극기 집회 참가자들을 태우고 올라온 버스들이 주차돼 있던 서소문로 등엔 지친 기색이 역력한 노인들이 삼삼오오 모여 자리를 펴고 앉아 있었다. 이들은 미리 준비해온 군고구마와 사과 등을 먹으며 이야기를 나누면서도, 눈은 스마트폰 화면을 향했다. 스마트폰 보호 케이스에 태극기 스티커를 잔뜩 붙인 B 씨(여‧68)는 “무릎 아프고 허리 아파서 못 나온 사람들은 집에서 이걸로 보는 거지”라고 설명했다.
지난 1일 광화문사거리에 마련된 제15차 3.1절 탄핵기각 총궐기 국민대회에 참석한 노인이 SNS로 공유된 사진을 보고 있다. 이종현 기자 jhlee@ilyo.co.kr
# 유튜브 배우는 노인들
이날 집회 현장에서 대부분의 노인들이 스마트폰을 활용해 보던 것은 유튜브였다. 인터뷰에 응한 노인들은 생중계를 보려고 유튜브에 접속한다고 입을 모았다. 집회 주최 측인 탄기국이 운영하는 채널 ‘TMT’에선 이날 집회가 마무리될 때까지 생중계 방송을 내보냈다.
최근 유튜브 채널을 검색해보면, 박근혜 대통령 지지자나 보수단체가 운영하는 채널은 ‘신의 한 수’ ‘애국채널SNS TV’ ‘애국튜브코리아’ ‘한번 더 Watch Again(왓치 어게인)’ 등이 있다. 이 가운데 ‘신의 한 수’는 박사모 등 단체 회원들 사이에서 필독 채널로 통한다. 이 채널은 3월 3일 기준 약 7만 명의 구독자수와 700여 개 이상의 동영상을 보유하고 있다. 신혜식 전 <독립신문> 대표가 만든 이 채널은 그가 직접 팟캐스트 방송을 진행하거나 집회 현장을 찾아다니며 촬영한 영상과 인터뷰를 주요 콘텐츠로 삼고 있다.
집회에 참가하는 노인들은 카카오톡, 네이버 밴드, 카카오스토리 등 SNS에도 익숙하다. 유튜브에 올라온 영상이 이들 SNS에서 공유되고, 신문기사 링크나 장문의 ‘정보글’도 전송된다. 집회 현장에서 만난 일부 노인들은 SNS 메시지 등을 받고 글자 크기를 가장 크게 키워도 미간을 잔뜩 찌푸려야 보이는 화면을 꼼꼼히 읽어 내려갔다.
노인들은 스마트폰 활용법을 가족이나 지인들에게 배웠다고 했지만, 일부는 ‘박근혜를 사랑하는 모임’(박사모) 카페를 보고 알았다고 했다. 실제로 박사모 카페에는 스마트폰 사용이나 SNS 사용이 미숙한 회원들을 위해 ‘컴맹을 위한 강좌’라는 게시글이 있다. 스마트폰을 켜고 유튜브에 접속하는 방법부터 신문 기사 링크 복사‧공유 방법까지 구체적으로 설명된 내용이다. “어르신들을 위해 글자 크기를 키우고 쉬운 영상을 더 제작하자”라는 댓글도 종종 올라온다.
앞서의 보수 단체 유튜브 채널과 SNS는 ‘국정농단’ 사태 이전부터 활용돼 왔지만, 지난해 12월 초부터 구독자수 등 이용자가 급격히 늘어났다. ‘TMT’ 채널이나 ‘신의 한 수’ 채널은 탄핵에 찬성하는 촛불집회 참석자가 두 번째로 100만 명을 넘긴 지난해 12월 24일 이후부터 1월까지 한 달 사이에 구독자수가 두 배 이상 늘었다. 박 대통령 지지자들이 영상들을 공유하고 적극적으로 찾아보면서 구독자수와 조회수가 늘어난 것이다.
동시에 태극기 집회의 ‘세 확산’도 크게 이뤄졌다. 그동안 대학로나 여의도에 머물며 탄핵 반대를 외치는 태극기들은 지난해 12월 말 대한문에 ‘입성’했고, 지난 1월 21일엔 시청 앞 광장에 천막을 세워 농성에 돌입했다. 이 농성장엔 대부분 노인들이 모여든다.
지난 3월 1일 탄기국의 유튜브 채널 ‘TMT’에서 이날 열린 태극기 집회를 생중계했다.
# 가짜뉴스, 모금 사기 범죄도 ‘유통’
문제는 노인들이 유튜브나 SNS로 공유‧전송하는 콘텐츠 중에는 ‘가짜뉴스’가 다수 포함돼 있다는 점이다. 사실이 아니거나 아직 확인되지 않은 가짜뉴스가 ‘소스-기사-유포’의 세 단계를 거쳐 ‘그들만의 진실’이 된다.
이 과정에서 웃지 못 할 일도 발생한다. 최근 보수단체 회원들 사이에서 이정미 헌법재판관(헌법재판소장 권한대행)의 남편인 신혁승 숙명여대 교수가 통합진보당 당원이라는 내용의 가짜뉴스가 유통됐다. 이 글에는 이 재판관에 대한 ‘종북 재판관’ ‘마녀 재판관’ 등의 악의적 내용이 포함돼 있었다. 집회 현장에 참여한 노인들은 이 가짜뉴스를 근거로 이 재판관에 대해 거센 비판과 욕설을 던졌다.
그런데 지난 3월 2일, 신혁승 교수가 통진당원이 아니라는 사실과 함께 이 재판관이 통진당 해산 심판 당시 ‘인용’에 찬성했다는 내용의 언론 기사가 보도되면서, 새로운 내용의 글이 다시 유통됐다. 이 재판관의 이름 뒤엔 ‘님’이라는 호칭이 붙어 있었고, 글의 말미에는 “이정미 재판관님에 대한 잘못된 정보는 ‘좌빨그룹’에서 태극기 세력을 모함하기 위해 퍼뜨렸을 가능성이 높다”는 내용이 포함돼 있었다.
3·1절 98주년을 맞은 지난 3월 1일 오후 박근혜 대통령 탄핵 기각을 요구하는 태극기집회가 대한문 앞에서 열렸다. 임준선 기자 kjlim@ilyo.co.kr
노인들 사이에서 SNS의 파급력이 커지면서, 쌈짓돈을 노린 ‘범죄’도 발생한다. 탄기국, 박사모 등은 박사모 카페와 SNS, 현장 모금 등으로 회원들에게 공식 후원금을 받고 있는데, 이를 가장한 일부 단체와 개인이 자신들의 은행 계좌를 적어 후원을 받는 것이다. 신원이나 후원금의 사용처도 불분명하지만 노인들은 탄기국, 박사모, 태극기라는 글을 보고 이들에게 돈을 보낸다. 실제 기자가 집회에서 만난 노인들 가운데 일부는 이 ‘모금 사기’를 당한 경험이 었었다. 박사모 관계자 역시 “모금 사기에 대한 신고가 접수되긴 했다. 사법처리를 한 것으로 알고 있다”고 말했다. 기자가 사건 내용과 함께 신고를 접수한 경찰서에 대해 묻자 “자세한 내용은 이야기해줄 수 없다”며 자리를 떠났다.
문상현 기자 moon@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