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일 개봉한 영화 <해빙>은 얼었던 한강이 녹고 시체가 떠오르자 수면 아래 있었던 비밀과 마주한 한 남자를 둘러싼 심리스릴러 영화로 기대를 모으고 있다. 또 연기파 배우 조진웅, 김대명, 이청아와 연기경력 55년 만에 처음으로 악역에 도전하는 신구의 출연으로 화제를 모았다. 이미 해외에서 인정을 받아 제35회 브뤼셀국제판타스틱영화제 등 유수의 해외영화제에 초청을 받은 작품으로 알려져 있다.
영화 <해빙> 포스터. 사진=롯데엔터테인먼트 제공
영화는 승훈(조진웅 분)의 1인칭 시점으로 전개된다. 내과의사 승훈은 강남에 빚을 내서 개원한 병원이 도산한 후 아내와 이혼하고 경기도의 가상 신도시 화정의 한 병원에서 계약직 의사로 일하게 된다. 이 도시는 과거 미제연쇄살인사건으로 유명했던 곳. 승훈은 이곳에서 치매아버지 정노인(신구 분)을 모시고 사는 정육식당 주인 성근(김대명 분)의 건물 원룸에 세를 들여 살게 된다.
어느 날 승훈은 수면내시경을 받으러 온 정노인이 가수면 상태에서 흘린 살인 고백 같은 말을 듣고 이들 부자에게 의심을 품게 된다. 그러던 중 의문의 살인사건이 일어나고 승훈은 정육식당의 부자가 범인이라는 심증을 굳히고 증거를 찾아 나선다. 그날 이후 승훈은 단 한순간도 편하게 잠들 지 못하고 불면증에 시달린다. 불신은 갈수록 깊어지고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승훈을 찾아왔던 전처까지 실종돼 승훈은 점점 헤어나올 수 없는 악몽에 허우적댄다.
영화를 연출한 이수연 감독은 수면내시경 도중 가수면 상태에서 평소와는 다른 온갖 행태를 보이고 말을 내뱉는 사람들의 모습을 담은 유튜브 동영상과 벚꽃이 흩날리는 4월 한강에서 가장 많은 시체를 건져 올린다는 기사를 접한 후 이 영화를 기획했다. 이 감독은 특히 겨우내 얼어붙은 물속에 잠긴 시체들이 한강이 녹으면서 수면 위로 둥둥 떠오른다는 점에 주목했다.
심리스릴러를 표방하는 작품인 만큼 배우들의 섬세한 연기력은 단연 인상적이다. 주인공 승훈의 시선으로 이야기가 전개되는 만큼 배우 조진웅은 관객들이 자신의 시선과 심리에 대입할 수 있게끔 몰입도 높은 연기력을 보여준다. 영화가 정점으로 치닫을 수록 관객들로 하여금 의심을 품게 만드는 주변 인물 성근을 연기한 김대명과 간호조무사 미연 역을 연기한 이청아의 연기 또한 주목할 만하다.
영화 <해빙> 스틸컷.
배우들의 연기력만큼이나 영화에서 주목해야 할 또 한 가지는 바로 ‘공간’이다. 배경인 가상 신도시 화정을 비롯해 정노인과 성근이 평생 운영해온 정육식당 역시도 인상적인 공간으로 비춰진다. 화정은 미제연쇄살인을 해결하지 못한 채 새로운 욕망으로 뒤덮인 공간으로 정육식당은 부자의 인심 뒤로 미스터리한 분위기를 자아내는 공간으로 각각 그려진다. 특히 정육식당 부자의 비밀이 감춰진 정육점 내부의 냉장고와 금방이라도 피가 묻어날 것만 같은 식당 바닥은 공포감을 배가시킨다.
이 감독은 공간의 미장센을 위해 조명에 특별히 신경을 썼다. 영화 전후반을 나눠 전반은 채도가 높은 조명을, 후반부로 갈수록 낮은 채도의 조명을 써 대비를 극명하게 했다. 현실감 넘치는 공간 디테일과 조명은 영화의 몰입도를 더욱 높여 관객들을 미스터리 한 가운데로 끌어드리기에 충분하다.
혹시라도 과하게 끔찍하거나 선혈이 낭자 한 스릴러물을 기대한 관객이라면 실망할 수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음산한 분위기와 음향까지 관객이 공포감을 느낄 만한 요소가 군데군데 깔려있다. 이수연 감독은 “눈앞에서 잔인하거나 무엇이 벌어지는 것보다는 머릿속에서 그것들이 합해져서 다가오는 공포가 큰 것 같다”고 밝힌 바 있다. 심리적 의심과 공포감만으로도 소름끼치게 무서울 수 있다는 걸 바로 심리스릴러 <해빙>이 보여준다.
김상훈 기자 ksanghoon@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