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우이자 감독으로 유명하며 최근엔 <배트맨 VS 슈퍼맨>(2015)에서 배트맨으로 등장한 벤 애플렉에겐 동생이 하나 있다. 바로 케이시 애플렉이다. 그 역시 형을 따라 배우의 길에 접어들었고, 긴 무명 생활을 거쳐 <오션스 일레븐>(2001)으로 얼굴을 알리게 되지만 그다지 주목받진 못했다. 이때 만난 <비겁한 로버트 포드의 제시 제임스 암살>(2006)은 그의 출세작이었다. 브래드 피트와 공연한 그는 이 영화로 연기파 배우의 반열에 오를 수 있었고, 최근엔 <인터스텔라>(2014)의 톰 쿠퍼 역을 맡았다. <맨체스터 바이 더 씨>는 오스카를 비롯 그에게 스무 개 가까운 트로피를 안겨준 작품. 특유의 쓸쓸한 정서가 잘 드러나는 연기를 보여준다.
케이시 애플렉. 영화 ‘맨체스터 바이 더 씨’ 홍보 스틸컷.
케이시 애플렉은 배우에서 감독으로 조금씩 영역을 넓히고 있는데, 첫 작품이 <아임 스틸 히어>(2010)였다. 최근 별거하긴 했지만 애플렉은 썸머 피닉스와 결혼해 아이를 낳으며 10년 이상 살았고, 처남이자 배우인 호아킨 피닉스와도 절친이 되었다. <아임 스틸 히어>는 호아킨 피닉스가 배우에서 래퍼로 변신하는 과정을 담은, 일종의 가짜 다큐멘터리. 케이시 애플렉의 첫 연출작으로 베니스영화제에서 상영되기도 했다.
하지만 영화 촬영이 끝나자 이 영화의 프로듀서인 어맨다 화이트와 촬영감독이었던 막달레나 고르카가 케이시 애플렉을 상대로 소송을 건다. 성추행 및 성희롱을 당했다는 이유였다. 200만 달러의 배상금을 요구한 어맨다 화이트는 케이시 애플렉이 영화 현장에서 “원치 않았던 불쾌한 성적 접근”을 했다고 주장했다. <아임 스틸 히어>엔 록 밴드 ‘스페이스호그’의 기타리스트 앤토니 랭던이 출연하는데, 감독인 애플렉은 랭던을 화이트 앞에 데려와 신체 노출을 하게 했다는 것이다. 애플렉은 자신보다 열한 살 많은 화이트에게 그녀의 노화와 생식력에 대해 이야기했고, 자신의 섹스 편력을 늘어놓으며 여자를 ‘암소’라고 표현했다는 것이다.
촬영 현장의 유일한 여성이었던 막달레나 고르카 촬영감독은 더욱 힘든 일을 겪었다. 그녀의 주장에 의하면, 애플렉은 스태프들과 함께 수시로 외설적인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뉴욕 촬영은 특히 악몽이었다. 제작진은 호텔 대신 애플렉과 피닉스의 아파트에서 숙박했고, 피닉스는 침실 하나를 온전히 고르카를 위해 내주었다. 그러던 어느 날, 케이시 애플렉이 술에 취해 피닉스의 아파트를 찾아왔고, 고르카가 자고 있는 침실로 들어갔다. 고르카는 자던 중에 누군가가 자신을 끌어안고 애무하는 것을 느꼈다. 티셔츠와 언더웨어만 입은 애플렉이 그녀를 뒤에서 안고 있었던 것. 고르카는 애플렉에게 침대에서 내려가라고 소리쳤고, 술에 취한 애플렉은 “내가 왜?”라며 버티다가 결국엔 화를 내며 방을 떠났다.
다음 날 고르카는 비행기를 타고 LA로 갔고, 에이전트에게 자초지종을 이야기하며 더 이상 <아임 스틸 히어> 현장에 가지 않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도중하차한 것. 베테랑 촬영감독을 잃은 케이시 애플렉은 여성 프로듀서인 어맨다 화이트를 통해 일을 무마하려 했다. 화이트는 자신이 현장에 상주하겠다며 고르카를 설득했고, 고르카는 고민 끝에 다시 카메라를 잡았다. 이전까진 현장의 유일한 여성으로서 고립되어 있었다면, 그래도 같은 여성이자 프로듀서인 어맨다 화이트가 함께 있다면 성추행의 상황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는 막연한 믿음 때문이었다.
2010년 케이시 애플렉을 성추행으로 고소했던 ‘아임 스틸 히어’ 촬영감독 막달레나 고르카.
하지만 애플렉과 스태프들은 변함없었다. 그들은 촬영감독인 고르카와 프로듀서인 화이트, 모두에게 성적 모욕감을 주었다. 앞에서 언급한 화이트의 고소 내용은 이 시기에 발생한 것이었고, 애플렉은 그날 밤의 일에 대해 반성하기는커녕 오히려 자신에게 복종하지 않고 현장을 무단으로 떠났다며 고르카를 비난했다.
이후 애플렉은 고르카에게 약속된 보수를 제대로 지급하지 않았고, 고르카와 화이트의 이름을 크레디트에서 빼려고 했으며, 화이트는 결국 해고당했다. 성추행과 일상적인 성희롱에 부당 해고와 계약 불이행과 정신적 가해 등이 두 여인이 제출한 고소장의 내용이었다. 물론 애플렉은 모두 부정했다. 돈을 뜯어내기 위한 터무니없는 전략이며 모두 완벽한 픽션이라고 주장했다. 이후 사건은 법정까지 가진 않았고, 애플렉은 두 사람과 합의했다. 합의금은 알려지지 않았지만 애플렉은 “모두 만족할 만한 상황의 합의였다”고 마무리했다. 하지만 그는 “나는 상처 받았고 많이 화가 났다. 결국 이겨내긴 했지만 매우 불행한 상황이었다”고 소감(?)을 밝혔다.
김형석 영화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