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연히 승패는 의미가 없다. 시범경기 성적과 정규시즌 성적이 비례하지도 않는다. 시범경기 1위 팀이 실제로도 우승한 사례는 1983년부터 지난해까지 34년간 단 여섯 번에 불과했다. 그러니 기를 쓰고 이길 이유도 없다. 연장전과 더블헤더가 없고, 야간경기도 없다. 심지어 올해부터는 스프링캠프 기간 축소에 발맞춰 시범경기 기간도 3주에서 2주로 대폭 줄었다. 그동안 “시범경기 기간이 너무 길어 오히려 비효율적”이라고 불평하던 구단들은 두 손을 들고 환영했다.
그래도 전국의 야구팬들은 시범경기가 무척 반갑다. 또 한 번의 시즌이 눈앞으로 다가왔음을 알리는 신호탄이기 때문이다. 겨우내 그리워한 야구를 다시 만날 수 있는 시간, 그러나 승패에 웃고 울지 않아도 되는 유일한 시간. 정규시즌이 아닌 시범경기라서 가능했던 역대 해프닝들을 모아봤다.
2015년 3월 7일 넥센과 KT의 시범경기 모습. 3일 후인 10일에는 전국적으로 한파주의보가 떨어져 프로야구 출범 이후 처음으로 전 경기가 취소됐다. 임준선 기자
시범경기는 늘 3월에 열린다. 꽃샘추위가 기승을 부리는 시기다. 지난해 고척스카이돔이 문을 열면서 날씨의 영향을 받지 않는 야구장이 하나 생겼지만, 여전히 다른 구장에선 선수들이 추위나 바람과 싸우며 경기를 해야 한다. 더그아웃에서는 넥 워머와 보온장갑을 착용하고 두꺼운 점퍼를 입는다. 곳곳에는 전기난로를 켜 놓고 수시로 곁에 모여 열기를 쬔다. 1년 가운데 시범경기와 포스트시즌 기간에만 볼 수 있는 장면이다.
실제로 2015년 3월 10일에는 시범경기 전 경기가 추위로 취소되는 사태가 벌어졌다. 전국적으로 ‘한파주의보’가 떨어진 탓이다. 이날 오전 서울 기온이 영하 6.8도에 이르렀을 정도이니, 야구를 할 도리가 없었다. 일부 지방에선 강풍 특보까지 발효됐다. 목동에서 오전 10시, 대전에서 10시 20분, 포항에서 10시48분, 마산에서 10시 57분에 차례로 취소 결정이 내려졌다. 2011년 3월 25일 광주 KIA-두산전이 강풍과 추위로 취소된 적은 있었지만, 전 경기가 추위로 열리지 않은 것은 프로야구 출범 이후 처음 벌어진 일이었다.
이뿐만 아니다. 2010년 3월 10일에는 전국적으로 기습 폭설이 내려 목동, 인천, 대전, 대구에서 열릴 예정이던 4경기가 모두 날아갔다. 각 구장 더그아웃에 난로는 완비된 상태였지만, 그라운드에 쌓이는 눈까지 해결하기란 불가능했다. 2007년 4월 1일에는 극심한 황사로 시범경기가 모두 취소되는 해프닝도 벌어졌는데, 당시 선수들은 경기 취소 여부가 발표되기 전까지 모두 항균 마스크를 쓴 채 훈련을 했다.
# 야구보다 중요한 민방위 훈련
경기가 오후 1시에 시작되는 까닭에 때로는 날씨가 아닌 다른 외부 요인의 방해도 받는다. 그 가운데 대표적인 장애물이 바로 민방위 훈련이다. 2014년 3월 14일이 바로 그랬다. 전국 단위로 진행된 민방위 훈련의 시작 시간은 오후 2시. 프로야구 시범경기도 예외 없이 15분간 중단되는 게 원칙이었다. 베테랑 감독들도 “야구하면서 이런 광경은 처음 본다”며 웃을 정도로 색다른 광경이었다.
일단 심판이 전광판 시계를 수시로 체크하다가 오후 2시 직전이 되자 경기 중지 사인을 냈다. 동시에 민방위 훈련을 알리는 사이렌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선수들은 더그아웃으로 돌아갔고, 조용하게 앉아 훈련 종료를 기다렸다. 또 시간이 흘러 다시 민방위 훈련이 끝났다는 안내가 나오자 투수와 타자, 야수, 주자들이 모두 경기 중지 직전의 위치로 돌아가 플레이를 재개했다. 민방위 훈련 개시 직전에 타석에 서 있던 삼성 김상수는 LG 류제국이 던진 공 2개를 본 뒤 15분 후 교체된 투수 신승현과 다시 맞서는 경험을 하기도 했다. 심지어 대전에서는 이닝이 정확하게 오후 2시에 종료돼 자연스럽게 공수가 교대됐다. 한화 선수들은 “일부러 의도한 것도 아닌데, 최상의 타이밍이었다”고 조용히 자화자찬했다.
# 빵 먹고 체한 마야의 조기 강판
2015년 잠실 두산-NC전. 마운드에는 두산 외국인 투수였던 유니에스키 마야가 서 있었다. 마야는 이날 공 60개 안팎을 던지겠다는 계획으로 선발 등판했다. 그러나 3회 2사까지 2안타 무실점으로 호투하다가 갑자기 고통을 호소했다. 3루수가 얼른 마운드로 다가가 마야의 상태를 살폈다. 트레이너 역시 곧장 마운드로 달려 나왔다. 주변의 걱정 속에 잠시 몸을 추스른 마야는 NC 이종욱을 유격수 땅볼로 처리하고 이닝을 마쳤다.
이유는 곧 밝혀졌다. ‘빵’이 강판의 원인이었다. 마야는 경기를 앞두고 “배가 고프다”며 허겁지겁 빵을 입 속으로 밀어 넣었다. 그러나 너무 많이, 급하게 먹은 게 문제였다. 안 그래도 쌀쌀한 날씨에 힘껏 공을 던지다 그만 탈이 났다. 두산 관계자는 “아침에 빵을 급하게 먹고 급체 증상을 보였다. 소화가 안 되면서 명치 쪽이 꽉 막히는 바람에 순간적으로 마운드에서 어지럼증을 느낀 것 같다”고 설명했다.
마야는 일단 이닝을 마치고 더그아웃으로 돌아가 컨디션을 회복했지만, 코칭스태프는 “시범경기인데 굳이 무리할 필요는 없다”고 판단했다. 4회부터는 마야 대신 이현호가 마운드에 올랐다. 마야의 투구수가 44개밖에 되지 않은 시점. 두산이 2-0으로 앞서 있었다. 정규시즌이었다면 소화제라도 찾아서 먹고 어떻게든 다시 마운드에 올랐을 만한 상황이다.
# 2군 구장 시범경기가 빚은 부정위 타자 촌극
부정위 타자. 다른 선수의 타순에 타석에 잘못 들어선 타자를 이르는 말이다. 상대팀의 어필이 있어야 부정위 타자로 인정된다. 만약 부정위 타자가 타격을 끝낸 뒤 그 다음 타자를 상대로 한 플레이가 시작되기 전에 상대팀이 어필을 한다면, 구심은 정위 타자에게 아웃을 선언하고 부정위 타자의 행위로 인한 모든 진루나 득점을 무효화한다. 다만 부정위 타자의 타격 이후에도 상대팀의 어필이 없으면 경기는 그대로 진행된다.
2014년 3월 11일 상동구장에서 열린 롯데와 두산의 시범경기에서 바로 이런 상황이 두 번이나 벌어졌다. 프로야구 초창기 이후로는 보기 드물었던 촌극이었다. 사직구장 보수 공사가 늦어지면서 전광판 시설이 미비한 상동구장에서 시범경기를 열어야 했던 탓이다. 상동구장은 롯데의 2군 전용 야구장이다.
두산은 6회말 수비에서 1번 민병헌 자리에 오재일, 4번 호르헤 칸투 자리에 박건우를 각각 대체 투입하겠다고 알렸다. 자연스럽게 1번 타순에 오재일, 4번 타순에 박건우의 이름이 올라갔다. 그런데 8회 1사 1루 1번 타자 타순에서 오재일이 아닌 박건우가 등장했다. 선수 교체 과정에서 발생한 두산의 첫 번째 착오였다. 이때 1루 주자 장승현이 견제사를 당했고 박건우도 삼진으로 물러났다. 롯데는 박건우가 부정위 타자라는 사실을 문제 삼지 않고 넘어갔다.
상대의 어필이 없으면 다음 타자부터는 정위 타자가 된다. 4번 타자여야 할 박건우가 타격을 마쳤으니, 그 다음에는 5번 홍성흔이 나오는 게 규칙이다. 그러나 9회 공격에서 타석에 들어선 두산 다음 타자는 5번이 아닌 2번 타자 최주환. 이날의 두 번째 부정위 타자였다. 이번에도 롯데는 어필하지 않았다. 2번 최주환과 3번 김현수가 외야 플라이로 아웃되자 두산은 비로소 4번 타자 박건우를 다시 타석에 내보냈다. 그제야 경기장이 술렁거렸다. 경기는 ‘1번이자 4번’이 된 박건우의 삼진으로 끝났다.
이날 경기 기록을 맡은 베테랑 기록위원은 “20년 넘게 2500여 경기를 기록했지만, 이런 일은 처음 본다. 1980년대에나 한 번 본 것 같다”고 혀를 내둘렀다. 타자를 잘못 내보낸 두산 송일수 감독과 어필하지 않은 롯데 김시진 감독도 동시에 진땀을 흘려야 했다. 송 감독은 “다 내 잘못”이라고 사과했고, 김 감독은 “부정위 타자라는 것을 알았지만, 어차피 아웃된 상황이라 굳이 어필하지 않았다”고 해명했다.
# WBC 한일전이 열리던 날 시범경기 분위기는?
2009년 3월. 제2회 월드베이스볼클래식(WBC)이 한창인 시기였다. 2013년과 올해 대회는 한국이 1라운드에서 탈락해 시범경기에 큰 지장이 없었지만, 한국이 준우승 신화를 썼던 2회 대회 때는 아무래도 야구계의 모든 관심이 WBC 2라운드과 결선라운드 쪽으로 쏠렸다. WBC 4강 진출 여부가 걸린 한일전이 낮 경기로 진행됐던 3월 18일에는 특히 더 그랬다. “야구장 관중석이 너무 한산해서 관중을 직접 손으로 셀 수 있을 정도”라는 농담이 나올 정도였다.
따라서 각 구장에서는 공수 교대와 투수 교체로 경기가 잠시 중단될 때마다 전광판을 통해 WBC 한일전 경기 상황을 보여줬다. WBC 대신 시범경기를 선택한 팬들에게 서비스를 하기 위해서다. 동료들을 WBC로 보낸 선수들 역시 경기 결과가 궁금하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목동구장 한 곳만은 전광판 공사가 끝나지 않아 영상을 상영하는 게 불가능했다. 이 때문에 홈팀 넥센 선수들은 아예 라커룸과 더그아웃을 계속 왔다 갔다 하며 수시로 경기 상황을 체크했다. 보통은 경기 시작 30분 전에 더그아웃에 나와 몸을 풀지만, 이날은 개시 시간인 오후 1시까지도 모두 라커룸에 있는 TV 앞에 모여 앉아 일어날 줄 몰랐다. 경기 도중에도 마찬가지였다. 출전을 대기해야 하는 ‘경기조’에서 빠진 선수들은 수시로 라커룸을 들락거리며 경기 상황을 다른 선수들에게 전달했고, 5회가 끝난 뒤 클리닝 타임에는 벤치가 텅 비었다.
이뿐만 아니다. 롯데 배장호는 사직구장 마운드에 올라 무려 5분이 넘게 몸을 풀어야 했다. 9회 초 교체 투입돼 마운드에 올랐지만, 원래 2분이면 끝나는 연습 투구가 계속 길어졌다. 때마침 한국의 승리가 확정되는 장면이 전광판에 방송되고 있던 상황이라 롯데도 차마 중계를 중단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한국의 4강 진출이 결정되고 야구장에 있던 모두가 환호한 뒤에야 배장호는 첫 공을 던질 수 있었다.
배영은 일간스포츠 기자
한화 비야누에바 데뷔전 소동…경기 직전 부랴부랴 선수 등록 ‘휴~’ 시범경기는 정해진 엔트리가 없다. KBO 등록선수는 물론 육성선수도 누구나 자유롭게 출장할 수 있다. 그러나 그 안에 함정이 하나 숨어 있다. 외국인 선수는 예외다. 별도로 분리된 ‘외국인 선수 고용 규정’에 정규시즌과 시범경기를 따로 구분하지 않고 있어서다. 올해 시범경기 첫 날부터 이와 관련된 해프닝이 벌어졌다. KIA가 광주-기아 챔피언스필드에서 열린 두산과의 2017 시범경기 개막전에 외국인 선수 3명을 한 경기에 동시 출장시키려다 무산됐다. 김기태 KIA 감독은 경기 전 취재진과의 인터뷰에서 “선발 투수 팻 딘이 2이닝을 던지고, 헥터 노에시가 1이닝을 던진다”는 계획을 공개했다. 이어 외국인 타자 로저 버나디나가 1번 타자 중견수로 선발 라인업에 이름을 올렸다. 헥터는 지난해에도 KIA에서 뛰었지만, 팻 딘과 버나디나는 올해가 한국에서의 첫 시즌이다. 김 감독은 하루라도 빨리 이들의 기량을 동시에 점검해보고 싶었다. 결과적으로 불가능한 시도였다. KBO 야구 규약에는 “구단이 계약하는 외국인 선수의 수는 3명을 초과해서는 안 된다. 한 경기에 출장하는 외국인 선수의 수는 2명으로 제한된다”고 명시돼 있다. KIA도 물론 이 규정을 숙지하고 있다. 정규시즌에는 어김없이 지켜왔다. 그러나 시범경기 기간에는 출전 선수 엔트리가 따로 없다는 점을 염두에 뒀다. 외국인 선수 셋이 한꺼번에 출전해도 문제가 없다고 여겼다. KBO의 유권 해석은 달랐다. 시범경기도 공식 경기라 규정 안에 포함된다는 판단을 내렸다. 경기 전 취재진의 문의를 받은 KBO는 “외국인 선수 3명 동시 출장은 시범경기라 해도 규정상 불가하다”는 입장을 KIA에 통보했다. 결국 KIA는 두 번째 투수로 예정됐던 헥터의 등판을 취소했고, 팻 딘은 예정됐던 2이닝보다 1이닝을 더 소화했다. 이뿐만 아니다. 이 소식이 실시간 뉴스로 보도되면서 롯데도 사직구장에서 미리 정해뒀던 투수진 등판 스케줄을 수정해야 했다. 롯데 역시 이날 선발 브룩스 레일리에게 3이닝을 맡긴 뒤 새 외국인 투수 파커 마켈을 연이어 올려 한국에서의 첫 실전 점검을 시킬 예정이었다. 그러나 KIA의 소식을 접하고 부랴부랴 마켈의 등판 계획을 백지화했다. 사실 KIA와 롯데의 시도 이전에도 이미 외국인 선수 3인을 시범경기에 동시 출장시킨 케이스가 일부 나왔다. 지난해에는 한 차례도 없었지만, 2015년에는 총 3경기에서 한 팀 외국인 선수 세 명이 총출동하는 장면이 연출됐다. 3월 11일 NC(에릭 해커, 찰리 쉬렉, 에릭 테임즈)와 SK(메릴 켈리, 트래비스 밴와트, 앤드류 브라운), 3월 12일 두산(더스틴 니퍼트, 유니에스키 마야, 잭 루츠)이 그랬다. 그러나 당시에는 외국인 선수 고용 규정과 시범경기 규정이 충돌하는 부분을 구단과 KBO가 모두 인지하지 못했다. KIA가 공교롭게도 총대를 멘 셈이다. 사실 이날은 이보다 더한 해프닝도 벌어졌다. 한화는 아예 외국인 선수 등록 절차를 마무리하지 않은 채 시범경기를 시작하려다 경기에 차질을 빚을 뻔했다. 한화는 이날 LG와의 시범경기 개막전에 새 외국인 투수 카를로스 비야누에바를 선발 투수로 예고했다. 비야누에바는 메이저리그 경험이 많은 거물 외국인 투수다. 지난달 24일 몸값 150만 달러에 한화와 계약했다. 그러나 대망의 첫 실전 등판을 앞두고 기록원이 “비야누에바가 외국인 선수로 공시되지 않았다. 확인이 필요하다”고 문제를 제기했다. 육성선수도 뛸 수 있는 시범경기지만, 아예 등록조차 하지 않은 선수는 나올 수 없다. 한화도 계약 후 곧바로 KBO에 선수 등록 절차를 밟았다. 하지만 등록에 꼭 필요한 ‘외국인 선수 등록증 사본’을 제출하지 않아 공시가 늦어졌다. 한화 프런트가 바쁘게 움직였고, 경기 시작 직전 KBO에 사본을 보냈다. 곧바로 공시 절차도 마무리됐다. 비야누에바는 우여곡절 끝에 무사히 첫 실전 등판을 마쳤다. 한화도 가슴을 쓸어 내렸다. [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