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12월 도입된 답뱃갑 경고그림 10종 중 하나. 사진제공=보건복지부 제공
[일요신문] 평소 애연가를 자처하는 직장인 전영식 씨(30)는 최근 흡연 할 때마다 찜찜한 마음이 든다. 지난해 12월부터 담뱃갑에 부착된 경고그림 때문이다. 하루 한 갑 이상 담배를 태우는 그는 “처음 그림이 부착된다고 했을 때 크게 개의치 않았지만 매일같이 그림을 보고 있자니 신경이 쓰이기는 한다”며 “10여 년 전 처음 같이 담배를 피우기 시작한 친구가 잠시 가지고 다니던 담배 케이스 생각이 났다. 그땐 ‘쓸데없는 멋’ 정도로 생각했지만 지금은 나도 사볼까 하는 마음이 든다”고 말했다.
아직 그는 생각에만 그치고 있지만 실제 담배 케이스 판매량이 늘어나고 있는 상황이다. 위메프, 티몬, 옥션 등 소셜 커머스나 온라인 마켓 등에서는 경고그림 부착 의무화 이후 2개월간 담배 케이스 판매 신장률이 최소 200% 이상 상승한 것으로 전해졌다.
홍익대학교 인근 잡화점에서 판매되고 있는 담배 케이스.
지하철 역 내 상가나 거리의 잡화점 등에서도 담배 케이스를 판매에 열을 올리고 있다. 핸드폰 케이스, 문구류, 액세서리 등을 파는 잡화점이 밀집한 홍익대학교 인근 거리에서도 담배 케이스를 전면에 배치한 것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홍대 거리의 잡화점 점원은 “담배 케이스가 잘 팔린다는 말에 2개월 전부터 판매하기 시작했다”며 “이전까지 주로 여성 고객이 많았지만 가게 밖에 진열된 담배 케이스를 보고 들어오는 남성 고객도 늘어났다”고 말했다. 지하철 1호선 시청역에서 잡화를 판매하고 있는 업주도 “생각보다 잘 팔린다. 젊은 사람들한테만 인기가 있을 줄 알았는데 어르신들도 사간다”고 설명했다.
한 담배 제조업체에서는 지난해 기존 담뱃갑과 모양은 같지만 알루미늄 소재의 케이스로 포장된 담배를 ‘한정판’으로 판매하기도 했다. 일부 흡연자들은 이 한정판 케이스를 버리지 않고 재사용하고 있기도 하다.
지하철 역 내 잡화점에 진열된 담배 케이스.
담배 판매점에서는 흡연자의 ‘심기’를 건드리지 않기 위해 그림이 최대한 보이지 않게 진열하려고 한다. 일부 편의점에서는 담배 진열대의 조명을 어둡게 하거나 담배 위아래를 거꾸로 놓고 경고그림을 최대한 보이지 않게 하기도 한다. 이에 김승희 자유한국당 의원은 소매점 등에서 담배를 진열할 때 경고그림을 가리는 행위를 금지하고 이를 위반할 경우 과태료를 부과하는 내용의 국민건강증진법 개정안을 발의했다. 김 의원은 법안을 발의하며 “경고그림 제도의 효과를 높이려면 무엇보다 소매점 등 담배판매 장소에서 흡연의 폐해를 나타내는 경고그림도 함께 볼 수 있도록 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그런데 경고그림 담배가 출시되면 소매점 내에서 담배제품 진열시 가격표, 스티커 등을 부착해 경고그림을 가릴 것이라는 지적이 있다”며 “경고그림을 가리는 행위를 금지하고 이를 위반할 경우 과태료를 부과함으로써 흡연율 감소를 위한 경고그림 제도의 효과성을 높일 필요가 있다”고 밝혔다.
흡연자도 케이스 구매를 하지 않더라도 나름의 소극적 대응을 하기도 한다. 경고그림 중 그나마 덜 거부감이 드는 그림이 박힌 담배를 구매한다. 영업직에 종사하고 있는 김준형 씨(28)는 “특히 마음에 안 드는 그림이 그려져 있으면 판매하는 점원에게 다른 갑으로 바꿔달라고 한다”고 말했다. 이 같은 흡연자들의 요구에 편의점 종업원들이 겪는 고충이 종종 언론에 보도되기도 한다. 또한 김 씨는 최대한 담뱃갑을 보지 않으려 노력한다. 주머니 안에서 손을 움직여 담뱃갑을 열고 한 개비를 꺼내는 식이다.
경고그림 부분에 견출지가 붙여진 담뱃갑
담뱃갑에 견출지나 스티커 등을 붙여 경고그림이 보이지 않게 만드는 이들도 있다. 서울 중구에서 근무하는 직장인 2명은 “회사에 사무용품이 넉넉히 구비돼 있는 편인데 경고그림 부분에 남는 견출지를 항상 붙인다”고 설명했다. 이들이 버린 담뱃갑에는 ‘주요부위’가 견출지로 가려진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직장인 홍준호 씨(28)는 경고그림에 대한 다른 사람들의 시선이 유독 신경 쓰인다. 그는 “업무 시간에 책상위에 담뱃갑을 올려두는 편인데 비흡연자들이 지나가며 경고그림에 관심을 보인다. ‘이걸 보면서도 아직 피우냐’는 핀잔을 듣기도 한다”며 “비흡연자들의 관심이 부담스러워 요즘은 책상 서랍에 담뱃갑을 넣어둔다”고 말했다. 또 홍 씨는 “아이를 키우는 회사 유부남 선배들은 더 민감하게 반응한다. 혐오감을 줄 수 있는 사진을 아이들에게 보여주고 싶지 않은 마음인 것 같다. 집에서는 철저히 숨긴다고 하더라”고 했다.
제품에 따라 소진 시기가 달라 아직까지 그림이 없는 채로 포장된 담배가 있어 이를 찾아다니는 흡연자도 있다. 정부는 경고그림이 부착되지 않은 재고품의 소요기간을 오는 6월 21일까지로 정했다. 일부 흡연자들의 ‘재고 찾기’는 6월까지 계속될 전망이다.
해외에 오가는 지인에게 경고그림이 없는 면세 담배 구매를 부탁하는 ‘꼼수’도 앞으로는 통하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기획재정부는 지난 3월 22일 법제처와 함께 면세점에서 판매되는 담배에도 담배사업법과 건강증진법을 적용해 경고그림 부착을 의무화한다고 밝혔다. 그간 면세점은 경고그림의 사각지대였다. 정부에서는 외국에서 제조된 담배를 보세판매장으로 반입해 판매하는 경우도 담배사업법상 수입에 해당한다고 유권해석을 내렸다.
김상래 기자 scourge@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