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영권을 포함한 도시바 지분 가치는 약 1조 엔(한화 10조 800억 원)으로 추산된다. 창사 이래 최악의 경영난에 직면한 도시바로서는 이번 지분 매각으로 경영 정상화에 필요한 자금을 수혈해야 한다. 그간 도시바는 경영 악화에 따른 구조조정 과정에서 가전·의료사업 부문 등 알짜 사업부를 잇달아 매각했지만, 신용등급 하락으로 자금 조달이 여의치 않은 상황이다. <니혼게이자이신문> 등 일본 현지 언론에 따르면 도시바는 지분 매각 후 반도체 자회사를 일본 증시에 상장하겠다는 유인책으로 투자자들을 설득하고 있다.
도시바 반도체는 세계 낸드플래시 시장에서 ‘2인자’로 평가받는다. 글로벌 점유율은 18~19%로 업계 1위인 삼성전자(35~37%)에 한참 못 미친다. 그러나 업계 3위인 미국 웨스턴디지털(17%)이 도시바 반도체를 인수할 경우 합산 점유율은 삼성전자에 근접한다. 실제 웨스턴디지털은 이번 인수전에 참여했으며, 4위권 업체인 미국 마이크론(10%)도 호시탐탐 도시바 반도체 인수 기회를 엿보는 것으로 전해진다.
낸드플래시는 대용량 정보를 저장하는 메모리 반도체로 첨단 전자기기인 스마트폰, 태블릿 PC, 디지털카메라, 차량용 내비게이션 등 핵심 부품으로 사용된다. IT 리서치업체인 가트너에 따르면 세계 낸드플래시 시장은 모바일 기기의 유행에 힘입어 2014년 3.1%(298억 달러), 2015년 3.5%(308억 달러)의 꾸준한 성장세를 나타냈다. 앞으로 IoT(사물인터넷) 시대가 개막되면 낸드플래시 시장은 더 성장할 것으로 기대된다. 이번 인수전에 미국계 사모펀드 KKR 등 투자자본이 뛰어든 이유다.
국내 기업 가운데는 SK그룹이 도시바 반도체 인수에 발을 들였다. 금융감독원 전자공시에 따르면 SK하이닉스는 지난 2월 도시바 반도체 지분 인수에 대한 ‘Non-binding(비구속적) 제안서’를 제출했다. 이에 도시바는 SK하이닉스에 새로운 협상 조건을 제시했으며, 지금껏 협의를 이어가고 있는 것으로 전해진다. SK 관계자는 “결과는 알 수 없지만 일본 현지 SPC(특수목적법인) 설립, 펀드를 통한 자금 조달, 합작 투자 등 다양한 방법을 놓고 고민 중”이라고 말했다. SK하이닉스는 글로벌 낸드플래시 시장에서 마이크론과 비슷한 점유율을 유지하고 있다.
SK하이닉스가 도시바 인수에 나서자 주가가 떨어졌다. 연합뉴스
SK에 주어진 마감 시한은 오는 3월 29일이다. 이때까지 입찰의향서를 제출하지 않으면 인수 후보군에서 탈락한다. 당초 SK하이닉스는 도시바 지분 20%를 약 3조 원에 인수하고, 도시바의 낸드 기술력을 확보하려 했다. 그러나 도시바가 경영권을 포함해 지분 추가 매각에 나서자 예정 인수가가 당초 1조 엔에서 2조 엔(20조 1600억 원) 이상으로 치솟았다. SK하이닉스가 당장 가용할 수 있는 자금은 4조 원 규모로 예상 매각가에 턱없이 모자란다. 투자업계에선 도시바 반도체 인수를 위해 SK가 대만 훙하이(鴻海) 그룹 등 외국계 자본과 손을 잡을 것이란 전망이 잇따랐다.
그러나 일본 정부가 브레이크를 걸었다. 지난 23일 <아사히신문>은 “도시바메모리가 중국이나 대만계 기업에 팔리지 않도록 일본 정부가 권고를 내릴 것”이라고 보도했다. 국가 전략사업에 속하는 반도체 사업을 외국에 넘길 수 없다는 것이다. 또 일본 정부가 기술 유출을 막기 위해 직접 민관합작펀드를 설립하고, 도시바 지분을 인수할 수 있다는 관측이 조심스레 제기된다. 실제 쓰나카와 사토시(綱川智) 도시바 사장은 지난 14일 기자회견에서 “국가 안전을 의식해야 한다”며 일본계 자본으로 매각 가능성에 힘을 실었다.
업계에선 SK가 재무적 부담을 지고, 무리하게 도시바 반도체를 인수할 이유가 없다는 지적도 나온다. 업계 관계자는 “SK하이닉스가 필요한 것은 ‘3D 낸드’ 기술인데 도시바를 인수한다고 하더라도 설비 확장에 수년이 걸리고 그 사이 경쟁업체들과 격차는 좁혀지지 않을 것”이라며 “SK하이닉스가 개발 중인 72단 3D 낸드 기술에 차라리 더 많은 투자를 해야 한다”고 말했다. 재계 다른 관계자는 “주가를 보면 알 수 있다”며 “SK하이닉스가 도시바 인수에 나서자 주가가 떨어졌고, 오히려 삼성전자 주가는 올랐는데 이게 무엇을 의미하는 것이겠느냐”고 반문했다.
강현석 기자 angeli@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