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네모 안 사진은 다나카 게이코의 저서 <남편 역도산의 통곡> | ||
지금이야 그런 일본영웅 역도산이 함경남도 홍원군 용원면 신풍리에서 출생한 북한 출신이라는 사실이 널리 알려져 있지만, 그 당시 역도산의 관계를 둘러싸고 나돌던 많은 수수께끼들은 아직도 일본에서 풀리지 않은 채 남아있었다.
그런 가운데 역도산의 미망인 다나카 게이코씨가 지난 40년간의 긴 침묵을 깨고 처음으로 <남편 역도산의 통곡>이란 책을 출간해 역도산의 진실에 대해 드디어 입을 열었다.
“올해 12월이면 남편(역도산)이 죽은 지 40년이 됩니다. 남편이 죽은 후, 저는 남편에 대해서 거의 침묵으로 일관해 왔습니다. 그러나 요근래 일본과 북한 사이에서 벌어지고 있는 여러 가지 일들 때문에, 북한 출신의 제 남편에 대해서도 여러 가지 억측이 나돌고 있습니다. 저는 이미 환갑의 나이도 지났습니다. 제 인생의 하나의 단락을 짓는다는 의미로 남편에 관한 진정한 사실만을 여러분께 밝히고자 이렇게 책을 쓰게 되었습니다.”
역도산의 미망인 다나카 게이코씨(62)가 <남편 역도산의 통곡>(후타바샤, 7월15일 발매)을 출간했다. 역도산은 1963년 6월 다나카 게이코씨와 결혼했으나, 그들의 신혼생활은 겨우 1백93일밖에 지속되지 못했다.
역도산이 그해 12월8일 도쿄에 자리한 고급나이트클럽 ‘뉴 라틴쿼터’에서 술을 마시다 야쿠자 무라타 가츠시와 말다툼 끝에 그가 휘두른 칼에 옆구리를 찔리고 만 것이다.
▲ 63년 역도산과 다나카의 결혼은 당시 ‘5천만엔 결혼식’으로 불리며 화제가 됐을 만큼 거액을 들인 예식이었으며, 존 웨인, 프랭크 시내트라 등 내로라하는 하객들이 참석했다. | ||
“남편은 늘 말은 하지 않았지만 자신에게 두 개의 조국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마음 아파했습니다. 북한과 남한을 어떻게 해서든 하나가 되게 하고 싶다는 생각을 늘 가지고 있는 듯 보였어요.
당시 일본은 아직 한국과 국교가 회복되지 않은 상태였는데, 남편 역도산은 그 사실에 대해서도 아주 슬퍼하고 있었습니다. 정치가들이 한국과의 관계를 어떻게 해 보려고 여러 가지로 손을 쓰고 있을 때, 스포츠를 통해 한국과 교류할 수 있도록 협력해 주었으면 한다는 요청이 남편에게 들어온 적이 있습니다.”
역도산은 부인 다나카 게이코씨와의 결혼발표 후 바로 다음날부터 약 1주일 동안 한국을 비밀리에 방문해, 당시 한국정부 요인들과 만났다. 그것은 역도산과 게이코 부부를 중매해준 당시 자민당 부총재였던 오노 반보쿠씨로부터 받은 요청 때문이었다.
역도산은 그때 찍은 사진들을 절대 아무에게도 보여주지 말라고 아내 다나카씨에게 당부했고, 부인 게이코씨 또한 남편의 말을 듣고 그동안 일절 공개하고 있지 않았다가 이번 출간된 책에 비로소 방한 당시의 사진들을 소개해 놓고 있다.
역도산은 일개 레슬링 선수로 인생을 끝낼 수는 없다는 생각이 상당히 강했다. 프로레슬링은 그저 하나의 수단이었을 뿐, 자주 “사업가가 되고 싶다”는 말을 했다고 부인 다나카씨는 털어놓았다.
실제로 역도산은 단순한 스포츠맨을 넘어 프로레슬링을 일본에 정착시킨 프로모터이자, 돈이 되는 스포츠 및 여러 가지 일들을 성공적으로 벌였던 사업가이기도 했다. 한 번은 오노 반보쿠 부총재로부터 참의원선거 출마요청을 받은 적도 있었는데, 당시 역도산은 “아직은 때가 이르다”며 거절했다고 한다.
어느날 프로야구단 도에이에 입단한 지 얼마 안된 재일교포 강타자 장훈 선수가 역도산을 찾아와 “재일교포라는 이유만으로 차별받는 게 너무 괴롭다”며 심경을 털어놓았다. 그러자 역도산은 “우리 때는 지금보다 더 심했다.
약한 소리 하지 말라”며 격려와 질책을 해 돌려보냈다고 한다. 당시 일본에는 스포츠 선수를 포함, 연예계에 재일교포 출신들이 많았다. 그런 사람들에게 역도산은 존재 그 자체만으로도 위로가 되고 있었다고 부인 다나카씨는 기술하고 있다.
“북한 책에 남편이 일본에 납치되어 일본으로 끌려왔다고 씌어 있다고 하는데, 본인에게 그런 말을 들은 적은 없습니다. 이미 돌아가셨지만 양부 모모다씨 친척 중 북한에서 경찰관을 하고 있던 오카타 형사보가 북한 씨름선수 중 실력이 뛰어났던 역도산을 눈여겨봤다고 합니다.
오카타씨가 역도산에게 “일본에 와서 스모를 해보지 않겠느냐”는 제안을 했던 것이고 남편이 이를 수용해 일본으로 건너오게 됐다고 말했습니다. 또한 스모계에 입문하고, 모모다씨의 양자가 되었던 것입니다.”
역도산은 1924년 한반도가 일본의 식민지하에 있던 시절 북한 함경남도에서 ‘김신락’이란 이름으로 세상에 태어났다. 북한에서 씨름선수로 활동하고 있던 김신락은 한 일본인에게 스카우트 제의를 받고 1940년 이름난 스모선수가 관리하는 니쇼노제키베야에 입문했다.
이후 큰 선수가 되기 위해 모모다 미스노케라는 사람의 호적에 아들로 입적(1950년)하게 된다. 그러나 1950년 스모판의 2등급에 해당하는 오제키를 눈앞에 두고 스모계의 조선인에 대한 부당한 대우에 반발, 스모를 그만두고 프로레슬링 세계에 몸을 던졌다.
▲ 레슬링으로 세계를 제패한 역도산의 경기 장면. 오른쪽은는 그가 상대방에게 자신의 주특기였던 ‘가라테촙’을 먹이는 모습. | ||
그러면서 역도산은 “3년만 참아봐라. 3년의 시간이 지나면 나는 프로레슬링을 그만두고 사업에 전념할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팬들을 배신할 수 없다. 팬들이 있었기에 지금의 내가 있으니까. 아직 더 분발해서 싸우지 않으면 안된다. 그러나 3년이 지나면 여러 가지가 다 안정될 테니…” 하며 부인 다나카씨를 안심시키곤 했다고 한다.
역도산은 또한 날마다 “나는 공산주의가 너무 싫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자신을 낳아준 조국은 좋아하기는 하지만, 무슨 주의나 사상은 그의 애정과 별개였다. 역도산이 처음 일본으로 건너 온 후, 한반도는 남과 북으로 분단되고 말았다.
이때 역도산은 스포츠 친선을 목적으로 우호적인 분위기 조성하고자 김일성에게 벤츠를 선물한 적은 있지만, 북한에 돈을 보냈던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고 밝히고 있다.
“그렇지만 역시 조국에 대해서는 향수를 느끼고 있었나봐요. 남편은 고향에 가보고 싶다거나 가족과 만나고 싶다고 자주 말하곤 했습니다. 그것은 인간으로서 누구나 가지고 있는 보편적인 기분일 것입니다. 남편은 전쟁은 참으로 비참한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한 번은 남편이 한국에 위문을 갔던 적이 있었는데 그때 그곳에서 전쟁의 비참함을 목격했다고 합니다.”
역도산은 신혼여행지로 스위스에 가보고 싶다며 스위스에 대해 상당한 흥미를 가지고 있었다. 영원히 스위스에서 살고 싶다는 생각이 있었던 모양인지 “자식만은 스위스에서 가르치고 싶다”라고 말할 정도였다고 한다.
실제로 신혼여행으로 스위스를 찾았을 때, 역도산은 정말로 스위스를 맘에 들어 했다. 안내해주던 사람에게 땅을 좀 알아봐 달라고 하며 명함을 꺼내 진심으로 부탁할 정도였다고 한다.
역도산이 그렇게 스위스에 관심을 보였던 이유는 첫째 스위스의 온화한 기후와, 또 하나 바로 스위스가 영세중립국이라는 사실 때문이었다. “일본도 그렇고 아시아 전체가 스위스처럼 중립국이 된다면 좋으련만…” 하고 역도산은 말하곤 했다고 한다.
그것은 역도산이 분단된 자신의 조국이 하나로 통일되어 스위스같이 영원한 중립국가가 되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고 다나카씨는 이야기한다.
지난해 가을 부산에서 열렸던 아시안게임에서 북한 여자 역도팀 감독 박혜정씨가 역도산의 외손녀로 소개돼 화제가 된 바 있다. 박혜정씨의 어머니이자 역도산의 딸이라는 김영숙씨는 역도산과 박신봉이라는 여성 사이에서 태어났다고 한다.
박혜정씨는 평양체육대학에 진학해 스포츠 선수로 활약했으며, 북한 체육지도위원 남편과의 사이에 네 명의 자녀를 두고 있다. 그러나 다나카 게이코씨는 지난 가을 그 뉴스를 보고 강한 의구심을 나타내고 있다.
“북한에 있다고 하는 역도산의 딸 이야기는 남편이 죽고 난 뒤 훨씬 뒤에 듣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저는 그 딸이라는 사람의 나이만 따져봐도 뭔가 말이 안된다고 생각했습니다. 김영숙씨가 만약 역도산의 딸이라면 남편이 일본에 오기 전인 12, 3세 때 그 딸을 가졌다는 계산이 나옵니다. 하지만 그 나이에 과연 아이를 낳을 수 있을까요?”
1942년 스모 때문에 역도산은 북한을 잠시 방문했던 적이 있었다. 그 당시 역도산의 나이는 17, 8세 정도였다. 일설에는 역도산이 일본으로 돌아가기 전에 역도산의 어머니가 정한 결혼상대와 만났다는 이야기가 일부 전해지고 있으며, 그때 그 여성을 역도산의 첫번째 아내라고 기술해 놓고 있는 책도 있다.
역도산은 다나카씨에게 그녀와의 결혼이 자신의 첫번째 결혼이라고 강하게 주장했다고 한다. 다나카씨 또한 북한에 역도산의 형이 있다는 이야기는 확실히 들어 인정하지만, 역도산의 아이가 있다는 말은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다며 강한 의구심을 표명하고 있다.
그럼에도 다나카씨는 김영숙씨가 역도산의 딸일 가능성을 전면부정할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다나카씨는 정말 김영숙씨가 남편 역도산의 딸이라는 주장에 대해 신빙성이 있는지 없는지 DNA감정이라도 해보고 싶다는 생각도 갖고 있다고 한다.
“물론 남편이 자란 곳이기 때문에 저도 한 번은 북한에 가보고 싶습니다. 남편이 죽은 지 40년이 되는 올해 12월15일 전후를 고려하고 있습니다만, 그것은 국제정세를 봐서 일본과 북한 양국 사이의 여러 가지 문제가 모두 해결된 뒤라는 조건하에서입니다.
한국에는 이미 몇 번 가보았습니다. 북한에는 남편의 생가가 남아있다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따라서 북한을 방문하기 위해 최선의 노력을 아끼지 않을 것입니다. 단 저의 방문이 정치적으로 이용될 가능성이 있다면, 절대 그렇게는 하고 싶지 않다는 생각입니다.”
북한에다 평화의 상징으로 역도산의 동상을 세우자고 하는 이야기가 일본 프로레슬링 선수들 사이에서 제기되고 있는데, 그와 똑같은 이야기가 남한측에서도 나오고 있는 모양이다. 그러나 다나카씨는 “두 개의 동상은 필요치 않다. 하나면 족하다”는 생각을 갖고 있다고 한다.
“비록 긴 시간은 아니었지만 프로레슬링을 하고 있을 때를 제외하고는 우리 부부는 항상 함께 있었습니다. 마치 평생을 응축해서 살다 간 듯한 기분이 듭니다. 저에게 있어 신혼의 나날들은 매일 다른 역도산의 모습을 발견하는 나날들이었습니다. 지금도 어려운 상황에 처해 기운 없어 하고 있으면 ‘당신 왜 그렇게 침울해져 있소’ 하는 남편의 목소리가 들려오는 듯합니다.”
현재 역도산이란 인물에 대한 평가가 엇갈리는 실정이다. 철저하게 한국인임을 감추고 살았던 역도산. 그가 추구했던 소망과 이를 달성하기 위해 했던 노력들이 미망인 다나카씨의 저서를 통해 새롭게 드러남에 따라 그에 대한 평가가 또 한 번 달라질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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