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 15일 경기도 안양시 부림동 한국석유공사 본사를 압수수색한 검찰 수사관들이 압수물을 가지고 석유공사를 나서고 있다. 연합뉴스 | ||
실제로 검찰 주변에서는 몇몇 구 여권 실세들이 포함된 이른바 ‘사정 리스트’가 나돌고 있는 실정이다. 정치권 관계자들도 검찰의 사정 플랜 이면에는 이명박 대통령을 정점으로 한 여권 핵심부의 ‘위기돌파 플랜’과 맞물린 고도의 정치적 노림수가 투영돼 있을 것이란 의혹을 감추지 않고 있다. ‘쇠고기 파동’ 등으로 총체적 위기상황에 직면한 이 대통령과 여권 핵심부가 여론 환기용 내지는 국면 전환 카드로 고강도 사정 카드를 꺼내든 게 아니냐는 것이다. 초여름 날씨가 무색할 정도로 공기업 전체를 ‘한파 경보’ 속으로 몰아넣고 있는 검찰의 거침없는 사정 드라이브 속으로 들어가 봤다.
“공기업 사정작업은 시작에 불과하고 검찰의 칼끝은 결국 여의도 정치권을 향하게 될 것이다.”
최근 기자와 만난 사정기관의 한 관계자가 던진 말이다. 이 관계자는 또 “이명박 정부 출범 초부터 검찰과 경찰은 대대적인 공기업 비리 수사를 준비해온 것으로 안다”며 “청와대 민정팀을 정점으로 국정원과 감사원 등 모든 사정라인이 서로 경쟁하듯 사정 플랜에 동참하고 있는 분위기”라고 전했다.
실제로 현 정부 출범 이후 국정원을 비롯한 사정기관 정보팀 관계자들은 공기업 등 공공기관 비리와 관련된 첩보를 입수하느라 보이지 않은 경쟁을 펼쳐왔다. 이명박 정부가 추진하고 있는 공공기관 개혁 드라이브와 맞물려 사정기관들이 치열한 정보전쟁을 벌이고 있는 셈이다. 감사원도 지난 2월부터 50여 개 공기업을 대상으로 전 방위 감사를 실시해 방만경영 및 임직원 비리 등이 적발된 공기업에 대해서는 검찰에 수사를 의뢰하기도 했다.
이처럼 청와대 민정팀을 정점으로 한 사정라인의 고강도 사정작업은 검찰을 통해 가시화되고 있다. 검찰은 그동안 공기업 수사와 관련해 비자금 조성, 횡령 및 배임, 분식회계 및 탈세, 임직원들의 금품 수수 및 인사비리, 담합 입찰과 불법하도급, 업무알선 비리 등을 단속대상으로 정하고 감사원 감사자료와 내부자 고발 등을 바탕으로 각종 정보를 수집·분석해왔다. 검찰은 이러한 내사 자료를 근거로 석탄공사와 한국전력, 토지공사, 가스공사, 석유공사, 도로공사, 주택공사, 산업은행 등 8개 공공기관을 중심으로 전국 20여 개 공기업·공공기관을 대상으로 전 방위적인 수사를 실시하고 있다.
4월 24일 석탄공사에 대한 압수수색을 실시한 바 있는 검찰은 5월 13일 그랜드백화점, 5월 14일 한국증권선물거래소(거래소)와 한국자산관리공사(캠코), 5월 15일 석유공사에 대해 잇따라 압수수색을 단행하는 등 공기업 비리수사를 본격화하고 있다. 수사 주체도 검찰 사정의 중추인 대검 중수부를 비롯해 서울지검 특수부와 금융조사부 등 특별수사팀이 모두 투입된 상태다.
실제로 대검 중수부는 5월 12일 공기업 비리와 국가보조금 비리를 ‘2대 중점척결 대상범죄’로 규정하고 검찰력을 집중하겠다는 방침을 내놓기도 했다. 대대적인 공기업 사정을 예고하는 선전포고인 셈이다. 중수부 발표 이후 검찰은 3개 공공기관에 대한 압수수색을 동시다발적으로 단행했고 감사원 등에서 고발된 공기업 비리에 대해서도 화력을 집중하고 있는 분위기다.
본 궤도에 진입한 검찰의 공기업 사정작업은 외관상 부실·방만 경영 등 구조적 비리를 파헤치는 양상으로 전개되고 있으나 조만간 임직원들의 비리 사건에 수사력이 집중될 것으로 관측되고 있다. 검찰이 그 어느 때보다 서슬 퍼런 사정칼날을 꺼내든 만큼 정치권도 결코 자유로울 수 없을 것이란 관측이 우세하다.
검찰 주변에서는 대대적인 공기업 수사와 맞물려 구 여권 실세 등 상당수 정치인들이 사정 레이더망에 걸려들었다는 소문이 나돌고 있는 실정이다. 국정원(첩보)-감사원(감사)-검찰(수사)로 이어지는 사정 마스터플랜의 칼끝은 결국 여의도 정치권을 향하게 될 것이란 관측에 힘이 실리고 있는 형국이다.
거래소와 캠코 비리 의혹 사건에도 적잖은 정치인이 연루돼 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검찰은 거래소 이사장실과 재무담당 부서 등에 대한 압수수색을 통해 업무추진비 장부 등을 확보한 것으로 알려졌다. 거래소는 2006∼2007년 업무추진비와 정보수집비가 지나치게 많고 2006년 초부터 지난해 9월까지 골프접대비로만 10억 5000만 원을 지출한 사실이 적발되기도 했다. 검찰 주변에서는 거래소 임직원들의 골프 접대 대상에는 국회 정무위 소속 일부 의원들도 포함돼 있다는 소문이 떠돌고 있는가 하면 거래소의 업무추진비 중 일부는 유력 정치인들의 후원금 명목으로 사용됐을 것이란 관측도 꽤 설득력 있게 나돌고 있어 검찰의 수사 추이에 따라 적잖은 파문을 예고하고 있다.
검찰은 또 2005년 캠코가 보유한 무담보 채권의 감면·조정 과정에서 뒷돈을 챙긴 의혹을 받고 있는 K 부장을 체포해 조사하고 있다. 캠코는 지난 5월 6일부터 부실채권정리기금 운용 실태를 놓고 감사원의 특별감사를 받고 있는 상태다. 검찰은 거액의 리베이트 수수가 공사 차원의 관행이었는지 또 이 과정에서 정치권의 입김이 작용했는지 여부 등을 철저히 파헤친다는 방침이어서 적잖은 후폭풍을 예고하고 있다.
산업은행 특혜대출 사건에도 유력 정치인이 연루됐을 것이란 의혹이 일고 있다. 검찰은 그랜드백화점이 자금 조달을 위해 2002년부터 수차례에 걸쳐 사모사채를 발행하면서 이 채권을 인수한 산업은행 관계자에게 뇌물을 제공했다는 첩보를 입수하고 내사를 벌여왔다. 5월 13일 그랜드백화점에 대한 압수수색을 실시한 검찰은 이날 김 아무개 대표이사를 불러 사모사채 발행 경위 및 뇌물 제공 여부에 대해 강도 높은 조사를 한 것으로 알려졌다. 검찰은 사모사채가 발행 규모가 1800억 원대에 달하고 리베이트 비용으로 수십억 원이 건네진 정황이 포착된 만큼 일부 고위직 임원과 정치권 인사가 연루됐을 가능성도 배제하지 않고 있다. 검찰 주변에서는 참여정부 당시 산업은행 인사에 깊숙이 개입한 것으로 알려진 핵심 실세 B 씨가 특혜 대출사건에 연루됐을 것이란 소문이 나돌고 있는 실정이다.
해외유전개발사업 등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임직원들이 거액의 리베이트를 수수한 의혹을 받고 있는 석유공사에 대해서도 검찰은 15일 본사 압수수색과 함께 황두열 사장을 출국금지 조치했다. 황 사장은 노무현 전 대통령의 고교 선배로 범친노그룹 인사로 분류되고 있다는 점에서 검찰 수사 추이에 정가의 이목이 집중되고 있다. 감사원도 지난 3월 석유공사에 대한 감사를 통해 석유수입부과금 환급금 중 1380억 원을 부당하게 처리해 국고에 손실을 입힌 사실을 밝혀낸 바 있다. 따라서 검찰은 석유공사의 구조적인 병폐를 발본색원하는 동시에 정치권과의 연계 의혹 등에 대해서도 수사력을 집중한다는 방침이다.
이처럼 검찰이 대대적인 공기업 사정몰이에 나서고 있는 가운데 정가 일각에서는 정치적 배후 의혹도 불거지고 있다. 총체적 위기상황에 직면한 여권 핵심부가 공공기관 개혁을 명분으로 구 여권 인사들을 향해 강력한 사정 드라이브를 구사하고 있는 게 아니냐는 것이다. 야권 관계자들은 공공기관 인적쇄신을 명분으로 삼았을 뿐, 대선 공신들에 대한 ‘보은인사’를 단행하기 위한 사전 정지작업 성격이 짙다는 의구심을 감추지 못하고 있다.
공기업을 겨냥한 검찰의 고강도 사정 플랜이 장기화될 조짐이 일고 있는 ‘쇠고기 정국’에서 어떤 변수로 작용할지 정치권의 이목이 서초동 검찰청사로 향하고 있다.
홍성철 기자 anderia10@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