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여의도 전경련 회관. 고성준 기자 joonko1@ilyo.co.kr
또 전경련은 기존 7본부 체제를 1본부 2실 체제로 개편하고, 연간 예산을 40% 이상 감축하겠다고 공언했다. 비대해진 조직을 ‘슬림화’하고 회원사 간 소통과 민간경제 외교 역할에 충실하겠다는 것이다. 권태신 전경련 부회장은 “전경련 구성원 모두 창업을 한다는 각오로 혁신을 완수할 것”이라고 다짐했다.
그러나 전경련 안팎에선 여전히 ‘전경련 해체’에 대한 요구가 높다. 혁신안 공개 다음날인 3월 25일 더불어민주당은 임혜자 부대변인 명의의 논평을 내고 “근본적 쇄신책은 외면한 채 간판만 바꿔 달고 ‘피해자 코스프레’에 나서고 있다”고 비판했다. 경제개혁연대도 지난 3월 28일 성명에서 “전경련은 ‘사과한다’는 말만 반복할 뿐 무엇이 잘못된 행위였는지 밝히지 않고, (사건) 관련자에 대한 내부 징계조차 없었다”며 “정부가 전경련의 설립 허가를 취소하여 해산시키는 방안을 추진할 것을 촉구한다”고 밝혔다.
전경련은 국내 4대 그룹인 삼성, 현대자동차, SK, LG가 탈퇴하고, 10대 그룹인 포스코마저 탈퇴 대열에 합류하면서 전례 없는 위기에 봉착했다. 2016년 8월 기준 633개였던 회원사는 불과 반 년 만인 2017년 3월 531개로 줄었다. 매년 400억~500억 원 규모이던 회비 수입은 주요 회원사의 탈퇴로 많게는 70%가량 줄어들 예정이다. 더구나 전경련은 여의도 신사옥 건립 과정에서 3000억 원이 넘는 부채를 떠안았는데 주된 수익원인 회비가 줄면 그만큼 금융비용 부담이 커질 수밖에 없다.
다급해진 전경련은 최근 30여 개 기업과 경제단체를 신규 회원으로 모집하고 해외 민간네트워크 강화에 힘을 쏟고 있다. 이 과정에서 주한미국상공회의소, 주한유럽상공회의소 등 외국 경제단체들이 전경련에 가입한 것으로 전해진다. 이들은 각각 한·미 FTA, 한·EU FTA 체결 과정에서 국가 간 무역장벽 완화를 주장해 온 단체다. 전경련은 미국 트럼프 대통령 당선으로 세계 경제의 불확실성이 높아진 상황에서 이들 단체를 통해 국내 기업에 대한 영향력을 회복해 나갈 것으로 보인다.
실제 전경련에서 탈퇴한 현대자동차는 최근 9년 만에 주한미국상공회의소 회원으로 재가입했다. 현대자동차 외에 다른 10대 기업도 주한미국상공회의소 가입에 관심을 갖는 것으로 전해진다. 전경련에서 과거 핵심 역할을 담당한 한 대기업 인사는 “전경련이 갖고 있는 폭넓은 네트워크와 대정부 소통 창구 등 긍정적인 측면을 간과할 수는 없다”고 했다.
허창수 전경련 회장과 임원들이 3월 24일 전경련회관 오키드룸에서 혁신안 발표에 앞서 대국민 사과를 하고 있다. 사진 왼쪽부터 임상혁 전무, 권태신 부회장, 허창수 회장, 배상근 전무. 사진제공=전경련
그럼에도 재계 안팎에선 전경련이 과거와 같은 위상을 회복하기는 어려울 것이란 전망이 나온다. 앞의 대기업 인사는 “전경련이 그동안 기업 구조조정 국면 등 재계 입장을 대변해야 할 순간에 제 기능을 못한 측면이 크고, 이번 미르·K스포츠재단 사건에서 보듯 (정권과) 음성적인 거래를 해왔던 것도 사실”이라며 “부정적 여론이 너무 크기 때문에 한 번 무너진 신뢰를 회복하기는 쉽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또 다른 대기업 임원은 “전경련이 만들어졌을 때와 시대가 바뀐 데다 이젠 각 기업의 힘과 영향력이 커져 각자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역량을 갖고 있다”며 “대한상공회의소 등 전경련의 역할을 대신할 수 있는 단체도 얼마든지 있다”고 말했다.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까다로운 심사로 가입이 제한됐던 전경련은 각 기업에 공문을 넣어 회원사 가입을 요구하고 있다. 최근 전경련에 가입한 복수의 대기업 관계자는 “지난해 7월 전경련 쪽에서 회비를 안 받을 테니 가입을 해달라고 해서 별 뜻 없이 가입한 것”이라고 했다.
대기업보다 중소기업 회원 수가 압도적인 대한상공회의소와 달리 전경련은 대기업 등 재벌집단을 중심으로 운영됐다. 그러나 500~600개의 ‘소수기업’ 단체인 전경련의 대표성에 여러 의문이 제기되면서 점차 진입장벽이 낮아지고 있는 실정이다. 이에 대해 일부 회원사는 ‘격이 맞지 않는다’며 불만을 제기한 것으로도 알려졌다.
정치권에선 오는 5월 대선을 통해 새 정권이 들어서면 전경련을 재계 파트너로 인정하지 않을 것이란 관측이 나온다. 이미 유승민 바른정당 의원 등 대선 주자들은 전경련을 정부 각 위원회에서 배제해야 한다는 입장을 내놓은 바 있다. 그 대안으로는 대한상공회의소가 급부상한 모습이다. 지난 3월 23일 박용만 대한상공회의소 회장은 여야 5당 지도부를 찾아 ‘제19대 대선 후보께 드리는 경제계 제언문’을 전달하기도 했다.
이승철 전 전경련 부회장이 검찰에 출석해 기자들의 질문을 받고 있다. 박정훈 기자 onepark@ilyo.co.kr
뿐만 아니라 전경련은 이른바 ‘관제 데모’ 의혹으로 검찰 수사선상에 올라 있다. 관련 의혹의 중심에는 대외협력 업무를 총괄한 이승철 전 전경련 부회장이 있다. 이 전 부회장은 2014년부터 청와대의 지시를 받아 ‘관제 데모’를 후원한 의혹을 받고 있다. 이 가운데 이 전 부회장은 퇴직금으로만 20억 원을 챙긴 사실이 전해지면서 물의를 빚기도 했다. 앞서 <일요신문>은 2016년 10월 25일자 ‘사퇴 압박 이승철 전경련 부회장 퇴직금이 무려 20억?’이란 기사에서 관련 의혹을 최초 제기한 바 있다. 전경련에 대한 검찰 수사는 대선이 있는 오는 5월 전에 본격화될 것으로 전해진다.
전경련이 3월 23일 혁신안을 발표하면서 책임 경영진으로 내세운 임원 대부분 역시 대외협력 업무를 맡았던 것으로 확인된다. 엄치성 상무(국제협력실 실장)는 2011년 전경련 사회본부장을 역임했고, 당시 ‘전경련이 여야 유력 정치인들을 일대일 마크해야 한다’는 내용의 문건을 생성한 것으로 전해진다. 또 이상윤 상무(사업지원실 실장)는 2011년 대외협력본부 대외정책팀장을, 유환익 상무는 2009년에 대외협력팀장을 맡은 바 있다. 전경련에 진정한 쇄신 의지가 있는지 의문이 제기되는 대목이다.
전경련 안팎에선 오는 5월 이후 전경련이 강제 해산될 수 있다는 말도 나온다. 현행법상 재단이 불법적으로 운영되고, 공익을 침해했다면 민법 제38조에 따라 설립허가가 취소될 수 있다. 이미 3월 20일 문화체육관광부는 미르·K스포츠 재단의 설립허가를 취소한 바 있다.
변수는 허창수 전경련 회장이다. 허 회장은 유력 대선주자인 문재인 더불어민주당 전 대표와 경남고 동문이다. 문 전 대표는 2015년 야당 대표 가운데 최초로 전경련을 방문해 허 회장과 만나기도 했다. 최근 문 전 대표는 “전경련의 대표성을 인정할 수 없다고” 했지만 해체에 대해선 강경한 입장이 아닌 것으로 알려졌다. 앞의 대기업 인사는 “경제활성화를 위한 정부 정책에 재계가 빠질 수 없는데 무작정 해체시키기는 어렵지 않겠느냐”고 말했다.
강현석 angeli@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