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만복 전 국정원장.
송민순 전 외교부장관은 지난 해 10월 자신의 회고록 <빙하는 움직인다>를 통해 2007년 유엔 북한 인권결의안 표결을 앞두고 문재인 전 민주당 대표(당시 대통령 비서실장)가 북한의 견해를 물어보자는 김만복 전 국정원장의 제안을 수용했다는 사실을 폭로했다. 보수 진영에서는 “송 전 장관의 주장이 사실이라면 이는 주권 포기이자 심대한 국기문란 행위”라며 문 전 대표를 강하게 비판했다.
논란이 커지자 문 전 대표 측 김경수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기자회견을 열고 “(의견을 구한 것이 아니라) 기권하기로 결정한 사안을 북한에 ‘통보’만 한 것”이라고 일축했다. 양측의 주장이 평행선을 달리면서 진실은 밝혀지지 않았고 이슈는 수면 아래로 가라앉았다.
그런데 이와 관련해 새로운 증언이 나왔다. 김만복 전 국정원장은 <일요신문>과의 통화에서 “당시 송 전 장관이 유엔 채널을 통해서 북한과 만났는데 우리가 노력해서 인권결의안의 수위를 완화시킨 것에 대해 북한이 고맙게 생각한다고 했다”면서 “언론에는 송 전 장관이 우리가 인권결의안에 찬성해도 ‘반발’하지 않을 것이라고 주장했다는데 그 이상이다. 우리가 인권결의안에 찬성해도 북한이 ‘묵인’해주기로 했다고 말했다. 정말 우리가 찬성을 해도 괜찮다고 했는지 확인을 해보자고 해서 그렇게(북한과 접촉하게) 된 것”이라고 주장했다.
송 전 장관은 회고록에서 ‘인권이라는 인류의 보편적 가치를 존중하는 것은 어느 나라든 예외일 수 없다고 보았기 때문에 남북관계와는 분리해 결의안에 찬성하는 것이 맞다고 생각했다’고 밝혔다. 그러나 사실은 송 전 장관이 북한의 ‘묵인’을 약속받았기 때문에 결의안에 찬성하자고 주장했다는 것이다.
김 전 원장은 “송 전 장관이 (인권결의안을 찬성하자는 명분으로) 북한도 (찬성해도) 괜찮다고 그랬는데 당신들이 왜 (기권하자고) 그러느냐”고 말했다며 회고록에서 묘사된 것과는 차이가 있었다고 주장했다. 김 전 원장은 특히 “당시 북한에 (기권을 통보한 것이 아니라) 찬성을 암시하는 메시지를 보냈었다”고 증언해 논란이 예상된다.
김 전 원장은 “송 전 장관의 주장(북한의 묵인)을 확인해봐야 하는데 ‘당신네들이 정말 결의안을 찬성해도 좋다고 이야기 했습니까’ 이렇게 직접적으로 물어볼 수 없었다. 그래서 ‘이번 결의안에 우리가 어떤 태도를 취하든 남북 관계에는 변화가 없을 것’이라며 결의안 찬성을 암시하는 내용의 메시지를 보냈다”고 말했다.
김 전 원장은 “실제로 찬성하려고 했던 것은 아니고 이미 기권으로 결정한 후 북한의 반응을 떠보기 위해 그런 메시지를 보냈던 것”이라며 “당시 북한의 반응은 상상에 맡기겠다”고 말했다.
김 전 원장은 회고록이 공개된 직후 언론들과의 인터뷰에서 “(북한에 의견을 물어보는 일은)있을 수 없다. 빤한 걸 물어보는 그런 바보가 어딨느냐”고 주장했었다. 이번에 <일요신문>과의 인터뷰에서는 달라진 입장을 밝힌 것이다.
김 전 원장은 “북한에 전할 메시지도 국정원에서 만들었고 전달도 국정원이 했다. 정확한 메시지 내용은 송 전 장관도 알지 못한다. 그래서 송 전 장관은 우리가 북한에 의견을 물어본 것이라고 알고 있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 같은 주장에 대해 전직 자유한국당 의원은 “반응을 떠본 것뿐이라고 했지만 북한이 반발하지 않았다면 찬성하려던 생각도 있었던 것 아닌가”라면서 “당초에는 찬성을 암시하는 메시지를 보냈다가 북한의 반발 때문에 기권한 것이 사실이라면 외교 주권을 포기한 행위다. 북한에서는 원래 찬성하려고 했던 대한민국이 북한 말 한마디에 입장을 바꿨다고 생각했을 것 아닌가. 단순히 의견을 구한 것보다 더 굴욕적인 일”이라고 지적했다.
이 의원은 “회고록에선 마치 북한 인권을 위해 끝까지 고집을 꺾지 않았던 것처럼 묘사됐던 송 전 장관도 북한의 묵인을 약속받고서야 결의안 찬성을 주장했던 것이 사실이라면 충격적인 일이다. 노무현정부의 대북 외교가 대체로 굴욕적이었다는 비판을 피할 수 없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송 전 장관은 김 전 원장의 주장에 대해 “회고록에 적힌 내용이 진실이다. 그 외에 더 이상 할 말은 없다”는 입장을 전해왔다.
김명일 기자 mi737@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