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요신문] 여러분들은 미얀마 하면 뭐가 제일 먼저 떠오르세요. 요즘 주가시장에서도 곧잘 등장하는 천연가스? 자원개발? 아니면 인도차이나 반도의 아름다운 자연경관? 아마도 미얀마하면 많은 분들이 ‘버마(미얀마의 옛 국명) 민주화의 상징’ 아웅 산 수지 여사를 떠올리지 않을까요? 수지 여사는 지난 1991년 노벨 평화상 수상자이기도 합니다.
군부 독재에 맞섰던 수지 여사는 20년 넘는 기간 동안 가택연금과 해제를 반복하며 인내의 시간을 보내야만 했습니다. 그녀는 2010년 국제사회의 도움으로 겨우 가택연금에서 해제될 수 있었습니다.
이야기는 영웅의 해피엔딩으로 흘렀습니다. 수지 여사는 2015년 11월 총선에서 자신이 이끌던 민족민주연맹(NLD)의 압승(전체 의석의 88%)을 이끌었습니다.
결국 지난해 3월 단독 정부 수립에 성공했죠. 수지 여사는 자녀를 둔 여성이 대통령직에 오를 수 없는 미얀마 사정상 자신의 측근을 대통령에 앉히고 외무부 장관직과 대변인직을 수행하게 됐습니다. 물론 실권은 수지 여사가 쥐었죠.
그런데!!! 최근 집권 1년을 맞은 아웅 산 수지 여사에 대한 평가가 엇갈리고 있습니다. 아니 엇갈리는 정도가 아니라 비난이 쏟아지고 있죠. 일단 지난 1일 있었던 미얀마의 보궐선거에서 수지 여사의 NLD는 상·하원 통틀어 14곳 중 8석을 차지하며 승리를 거뒀습니다. 하지만 그 내용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심각합니다. 소수민족 비중이 높은 선거구에선 약세를 면치 못했던 것이죠. 특히 지난 총선 압승을 거뒀던 버몬 주의 선거구 한 석을 군부 정당에 빼앗기기까지 했습니다.
왜 그럴까요. 혹시 지난 1월 전 세계에 ‘로힝야의 쿠르디’라는 아이의 사진이 긴급 타전됐던 것을 기억하십니까. 미얀마 정권의 탄압으로 방글라데시로 피난하던 미얀마 내 이슬람계 소수민족 로힝야족의 16개월 된 아이가 싸늘한 시신으로 진흙 밭에 늘어져 있던 사진입니다. 그 아이의 이름은 ‘소하옛’. 2015년 유럽 땅을 밟기 위해 피난길에 오르다 해변가에서 시신으로 발견된 시리아 꼬마 쿠르디의 비극과 흡사했죠.
미얀마의 군부 정권은 이미 오래 전부터 주류 민족인 버마족(미얀마 국민의 67%)을 제외한 자국 내 소수민족들에 대해 분리정책을 펼쳤죠. 단순한 차별과 멸시가 아닙니다. 특히 주류 종교인 불교가 아닌 이슬람을 믿는 로힝야족에 대해선 고문과 성폭행, 학살 등 반인권적 범죄를 자행했습니다.
문제는 아웅 산 수지 여사가 집권해도 이러한 미얀마 정권의 소수민족에 대한 반인권적 학살이 여전히 자행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한 평생 조국의 민주화를 위해 온 몸을 받힌 수지여사가 정작 집권 이후엔 자국의 반인권적 행태에 대해 방조하고 주도했다는 것 자체가 충격으로 다가오고 있습니다. 민주화의 성녀에서 완벽한 죽음의 마녀로 변신했다는 지적입니다.
특히 지난해 10월 수지가 집권하는 미얀마 신정권은 일부 로힝야족의 무장세력이 자국 경찰을 살해했다는 명목으로 대대적인 토벌작전에 나섰습니다. 말이 토벌이지 사실상 로힝야족의 무차별적인 ‘인종청소’에 가까웠습니다. 앞서 ‘소하옛’의 충격적인 죽음도 여기서 비롯됐죠.
정작 아웅 산 수지 여사는 대수롭지 않다는 반응입니다. 이미 UN 인권이사회 측은 특별보고관을 현지에 급파해 로힝야족 200명과 인터뷰를 가졌고, ‘인종청소’ 가능성을 공식 제기한 상황입니다. 하지만 수지 여사는 외신과의 몇 차례 인터뷰에서 이 같은 국제사회의 지적에 대해 ‘날조’와 ‘과장’으로 변명했습니다. 4월 6일 공개된 영국 <BBC>와의 인터뷰에서도 “로힝야족에 대한 비판은 과하다”라며 단순한 분열 문제로 취급했습니다.
아웅 산 수지 여사와 같이 한 국가의 독재 혹은 외부 식민지에 맞서 투쟁을 이끌던 지도자가 혁명과 독립에 성공해 집권한 사례는 많습니다. 그런 지도자들이 집권 이후 또 다른 독재자가 되거나 변질된 경우도 많습니다. 사람은 변하기 마련이니까요. 현존하는 최악의 독재자로 꼽히는 짐바브웨의 무가베 대통령도 태생은 백인 지배에 저항하던 독립 투사였습니다. 일제에 맞서 무장 세력을 이끌던 북한의 김일성도 훗날 북한 인민들을 굶주리게 한 독재자로 전락했습니다.
국제사회에선 수지 여사의 변화에 대해 이런저런 말들이 나오고 있습니다. 일각에선 여전히 잔존하는 군부세력과의 어쩔 수 없는 타협으로 바라봅니다. 반면 수지 여사 개인적인 권력욕이 군부세력과의 타협을 야기했다는 분석도 나옵니다. 일각에선 신정권의 ‘인종청소’ 의혹을 두고 “수지도 어쩔 수 없는 주류 버마족이다”라는 비아냥도 나옵니다.
한편으론 수지 여사의 고집스런 성향이 현실 정치에는 맞지 않다는 지적도 나옵니다. 군부 세력에 맞섰던 민주화 운동가 수지의 고집은 ‘집념’과 ‘투쟁’으로 포장될 수 있지만, 협상과 소통이 중시되는 민주화 이후의 정치에선 ‘독선’과 ‘아집’으로 귀결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실제 2015년 11월 총선 이후 수지의 첫 말은 “이제 모든 것은 내가 결정한다” 였습니다.
그런데 그거 아십니까. 수지 여사의 부친은 ‘버마의 국부’라 여겨지는 아웅 산 장군입니다. 우리에겐 그의 묘지에서 벌어진 1983년 ‘아웅 산 묘지 테러 사건’으로 그를 기억하곤 합니다. 아웅 산 장군은 1940년 대 무장 세력을 이끌며 외세였던 영국과 일본에 맞서 투쟁했던 인물입니다. 그는 독립을 맛보기 불과 1년 전인 1947년 자국의 군부 세력에 의해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아웅 산 장군은 죽기 전까지 ‘통합’의 상징이었습니다. 주류 민족인 버마족 뿐 아니라 다른 소수민족들에게도 존경과 사랑을 받았습니다. 이 때문에 많은 미얀마 사람들이 만약 아웅 산 장군이 초대 대통령직에 올랐다면 미얀마의 유서 깊은 분리주의는 없었을 것이라고 단언합니다.
수지 여사는 그런 ‘통합’을 지향했던 아버지의 딸입니다. 더 늦기 전에 수지 여사는 국제사회의 경고를 뼛속 깊이 받아들이고 반성해야 하지 않을까요.
한병관 기자 wlimodu@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