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기 전에 꼭 가봐야 할 곳’으로 꼽히는 바간. 쉐산도 파야에서 바라보는 풍경이 아름답다.
[일요신문] 그리운 W형에게.
지금은 아침 6시30분입니다. 태양이 떠오르며 이라와디강이 붉게 물들기 시작합니다. 만달레이 선착장에는 우리가 탈 페리가 기다립니다. NMAI HKA 1호입니다. 작지만 아담한 유람선입니다. 편도로 43달러를 내고 배에 오릅니다. 모닝커피를 한잔 하며 유럽 여행객들과 인사를 나눕니다. 이제 고요한 강을 따라 8시간이 지나면 천년을 간직한 유적지 바간(Bagan)을 만날 것입니다. 오랜만에 길고 고요한 시간을 갖는 여행입니다. 예전에 양곤에 살 때는 국내선 항공으로 다녔습니다. 버스로는 너무 멀기 때문입니다. 이제 페리는 샤가잉 다리를 지나 깊은 강으로 들어섭니다. 다리 주변의 크고작은 마을들이 스쳐 지나갑니다. 그 옛날 영국과 싸우던 요새들도 보입니다. 가느다란 강의 지류들도 속살을 내보이며 반짝입니다. 강 한복판에서 보니 더 아름답습니다.
바간으로 가는 페리 위. 승객이 거의 유럽 젊은이들이다. 아침 6시30분 출발해 바간까지 8시간 걸린다.
도심 근교를 지나니 한갓진 풍경들이 이어집니다. 넓은 강변으론 끝없이 펼쳐진 초지와 대나무로 지은 집들이 강을 마주하고 앉아 있습니다. 가끔 석탄을 실은 배들이 지나기도 하고 대나무를 끌고 가는 뗏목들도 눈에 띕니다. 승객은 거의가 젊은 유럽인입니다. 뜨거운 여름 햇볕에 몸을 맡기는 이도 있고 소설책을 읽는 커플도 있습니다. 모두 강 위의 고요한 시간을 즐기는 중입니다. 점심은 미얀마식 볶음밥입니다. 식사 후 저는 아랫층 시원한 객실로 내려와 19세기 빅토리아 여왕이 쓴 일기를 읽고 있습니다. 웃음이 절로 나오는 대목이 많아 혼자 웃으며 시간을 보냅니다. 참 솔직한 일기입니다. 미얀마에 와서 긴 여행엔 익숙한지라 8시간은 짧게 지나갑니다. 버스여행은 보통 10시간 이상 걸리는 데가 많기 때문입니다. 더구나 고요한 강 위를 느리게 가는 페리인지라 얘기하거나 책을 읽기엔 딱 좋습니다.
페리를 타고 샤가잉 마을을 지나며. 가장 풍경이 좋은 구간이다.
저멀리 바간 언덕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바간은 드넓은 벌판을 감싸며 이라와디강이 흐릅니다. ‘죽기 전에 꼭 가야 할 세계문화유산’으로 선정된 곳입니다. 2300여 개의 파야들이 한자리에 모여 있는 ‘탑의 왕조’. 미얀마에선 일출과 일몰이 가장 아름다운 곳입니다. 미얀마에서 가볼 만한 관광지 한 곳만 꼽으라고 한다면 저도 바간을 꼽고 싶습니다. 배에서 내려 마차를 타고 숙소로 갑니다. 낭우지역의 로얄바간 호텔에 체크인을 합니다. 보통 30달러 하는 곳입니다. 수영장이 있는 현대식호텔입니다. 바간의 일몰을 보기 위해 마차를 재촉해 서둘러 쉐산도 파야로 향합니다. 일몰을 보기 위해 수많은 여행객들이 쉐산도 파야에 올라 기다리고 있습니다. 지난해 지진으로 인해 상층부는 복원을 하는 중입니다. 유적지 중 꼭대기 부분이 많이 무너졌습니다.
일몰이 아름다운 쉐산도 파야. 여행객들이 올라가 일몰을 기다리고 있다. 지진으로 꼭대기는 복원중이다.
여행객들이 천년 전 고도를 내려다 봅니다. 석양의 잔광이 수많은 탑과 나무들을 적십니다. 고대 도시 바간은 이렇게 700여 년간 유적지로 쓸쓸히 남아 순례자들의 발길만 이어졌습니다. 바간 역사는 기원전 2세기부터 시작됩니다. 고대 바간제국은 1044년 버마를 통일한 아노라타왕에서부터 240여 년간 가장 번영했습니다. 지금의 건축물들은 이 당시 만들어졌습니다. 당시에는 유적이 5000여 개나 되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바간제국은 1287년 징기스칸의 손자 쿠빌라이 칸에게 침략당하면서 멸망했습니다. 수차례의 지진이 있었고 습한 기후로 인해 많은 유적이 붕괴되었습니다. 바간의 유적들은 피라미드나 앙코르왓트처럼 사암을 쓰지 않고 황토를 구워 만든 적벽돌을 썼습니다. 진시타왕이 세운 쉐지곤 파야만은 사암으로 건축되었습니다.
쉐산도 파야에서 바라보는 일몰.
바간을 찾는 한국인이라면 한번쯤 가보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곳이 있습니다. 바로 구벼욱지(Gubyaukgyi) 사원입니다. 1113년 아버지 짠시타왕을 기리며 아들 야자쿠마가 세운 사원입니다. 아들은 아버지가 왕위를 물려주지 않았지만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자 3년간 이 사원을 건축하며 내부에 아름다운 그림과 프레스코화를 남겼습니다. 천년의 세월이 흘렀지만 벽화에 아버지에 대한 사랑이 묻어 있습니다. 너무 오래 되어 이 사원만은 내부 사진을 찍지 못합니다. 바로 옆에 아버지가 병중에 있을 때, 그 공적을 4가지 고대 언어로 비문을 세우기도 했습니다. 마제디 사원입니다. 이 비문은 미얀마 역사의 유일한 언어학 자료가 되고 있습니다.
낭우지역에 있는 로얄바간 호텔 전경.
그리운 W형.
이제 다시 집으로 돌아갈 시간입니다. 버스로 가기 위해 바간 버스터미널로 갑니다. 마부가 마차를 몹니다. 바간의 말들은 가다가 스스로 가끔 멈춥니다. 그때 뒤를 돌아보면 사진 찍기엔 아주 좋은 풍경이 있습니다. 마부에게 훈련된 거라서 마음이 아프긴 합니다. 바간은 드넓은 벌판을 시간도 속도도 없이 가는 말과 같은 곳입니다. 미얀마의 농촌 모습입니다. ‘풍요로운 농촌’. 제가 이 나라에 와서 늘 꿈꾸는 주제입니다. 늘 바쁘다는 형, 언젠가는 이곳으로 문득 올 날을 기다립니다. 방콕을 경유해 만달레이 국제공항에 내리면 됩니다. 아침 강변으로 가서 같이 페리를 타지요. 고요한 강 위의 한갓진 여덟 시간, 우리의 강물 같은 삶과 신앙과 꿈의 대화가 우리 앞에 있을 것입니다. 무한리필 커피와 함께.
정선교 Mecc 상임고문
필자 프로필 중앙대 문예창작과 졸업, 일요신문, 경향신문 근무, 현 국제언론인클럽 미얀마지회장, 현 미얀마 난민과 빈민아동 지원단체 Mecc 상임고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