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드라마에서 여성은 결코 중심이 될 수 없었다. <도깨비>와 <꽃보다 남자>의 타이틀롤이 각각 도깨비 역의 공유, 꽃보다 예쁜 남자인 구준표 역의 이민호였음을 고려하면 여자 캐릭터는 작품 속에서 ‘메인’보다는 ‘서브’, 주도권을 쥐고 있다기보다는 조력을 하는 위치에 그쳤다.
하지만 요즘은 사뭇 다른 풍속도가 펼쳐지고 있다. 다양한 드라마에서 여성들이 주도적인 인물로 등장해 강한 힘을 발휘하는 모양새다. 더 이상 남성에게 기대지 않고, 오히려 남성을 보호해주거나 판을 흔든다. 놀라운 전복이다.
‘힘쎈여자 도봉순’은 10%에 육박하는 시청률을 기록하며 역대 JTBC 드라마 최고 시청률을 갈아치웠다.
# 왜 여성들은 힘이 세졌을까?
일단 그들은 힘이 세다. 예를 들어 JTBC <힘쎈여자 도봉순>은 대대로 헐크 같은 힘을 갖고 태어나는 모계 혈통을 지닌 여성이 주인공이다. 그는 급기야 남자 주인공 안민혁(박형식 분)의 경호원으로 발탁된다. “A4 용지 10박스를 나르라”는 상사의 지시쯤은 우습게 해결한다. 여성에게 힘쓰는 일을 시키는 것이 꽤 곤혹스러울 것이라 생각했던 상사는 이런 도봉순의 모습을 보며 뒷목을 잡는다. 보복 운전을 하는 남성 운전자의 차량을 돌려버리는 장면에서는 박수가 터져 나온다.
게다가 도봉순 역은 ‘국민 여동생’이라 불리는 배우 박보영이 맡았다. 여리디 여려 보이는 박보영이 엄청난 괴력을 발휘해 불량배들을 일거에 물리칠 때 여성 시청자들은 환호하고, 남성 시청자들은 지지한다. 그 결과 <힘쎈여자 도봉순>은 10%에 육박하는 시청률을 기록하며 역대 JTBC 드라마 최고 시청률을 갈아치웠다.
박보영은 “힘이 센 캐릭터라 감정 이입을 했고, 여자로서 대리만족했다. 웬만한 남자보다 힘이 세니까 남자들 앞에서 기죽는 법 없이 항상 당당하다”며 이 작품의 매력을 전했다.
동시간대 시청률 1위를 달리고 있는 SBS 월화극 <귓속말>은 배우 이보영이 연기하는 전직 강력계 형사 신영주가 이끌어간다. 그는 누명을 쓴 아버지를 구하기 위해, 양심을 버린 판사 이동준(이상윤 분)과 위험한 동침을 한 후 그를 협박하는 과감한 행동도 마다않는다. 하지만 이동준이 칼에 찔려 살해당할 위기에 처하자 직접 찾아가 그를 구출하며 강도 높은 액션 연기까지 직접 소화한다.
한 드라마 외주 제작사 대표는 “<귓속말>과 맞대결을 펼치는 KBS 2TV <완벽한 아내>는 한 남자의 아내로서 상처를 입고 이를 극복해가는 한국 여성의 전형적인 모습을 담았다고 평가받고 있다”며 “이 드라마에 비해 <귓속말>이 3배 가까이 높은 시청률을 기록하는 이유는 주체적인 여성 캐릭터가 TV 리모컨 주도권을 쥐고 있는 여성 시청자들에게 어필했기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SBS ‘귓속말’의 여주인공을 연기하는 이보영은 강도 높은 액션 연기까지 직접 소화한다.
# 왜 강한 여성이 매력적일까?
여러 작품 속에서 강한 여성, 주체적 여성은 동경의 대상이자 일종의 혁명가였다. 남녀평등이 일반화된 현대와 달리 과거에는 남성 중심적 분위기가 더 강했기 때문이다. 소설 <제인 에어>가 독립적 여성을 다룬 대표작으로 손꼽히듯, 지난 10여 년간의 드라마 시장을 봐도 여성을 전면에 등장시킨 작품들이 끊임없이 인기를 얻었다.
배우 이영애가 주연을 맡았던 <대장금>을 비롯해 외모로 여성을 평가하는 사회적 세태에 묵직한 한방을 날린 <내 이름은 김삼순>, 출중한 능력을 가진 비정규직 여성을 내세운 배우 김혜수 주연의 <직장의 신>, 강한 여성의 대표주자인 배우 고현정이 출연했던 <선덕여왕>과 <대물>, <히트> 등을 들 수 있다.
한 방송사 PD는 “남성이 여성을 보호하는 틀은 이야기를 풀어가는 가장 쉬운 방법”이라며 “하지만 여성이 타이틀롤을 맡은 작품은 남녀 역할을 전복시키며 카타르시스와 새로운 재미를 안긴다”고 평했다.
최근 가요계에는 ‘걸 크러시’(girl crush) 열풍이 강하다. 일명 ‘센 언니’라 불리는 이들이 무대 위를 장악하며 여성 관객들의 환호를 이끌어낸다. 드라마 속에서는 일찌감치 이런 기류가 있었다. 과거에 비하면 완화됐지만, 여전히 현실 속에 존재하는 성차별과 일각에서 불거진 ‘여혐’에 반기를 들며 대중의 가려운 곳을 긁어주는 셈이다.
# 강한 여성 열풍, 얼마나 이어질까?
5월에는 배우 이시영이 출연하는 MBC 드라마 <파수꾼>이 방송된다. 그는 극중 사격선수 출신 전직 강력계 형사로 분한다. 그동안 복싱선수로도 활약하며 기존 여배우들이 가진 이미지를 멋지게 벗어던진 이시영의 도전이라 더욱 눈길을 끈다.
현재 방송 중인 OCN <터널>의 후속작인 <듀얼>의 여주인공 최조혜는 강력부 검사다. 어려운 가정 형편 속에서 자란 만큼 성공에 대한 욕구가 큰 인물이다. 이 작품을 통해 연기에 복귀하는 배우 김정은의 변신이 기대를 모으고 있다.
하지만 이런 움직임을 일종의 ‘쏠림 현상’으로 보는 시선도 있다. 여전히 남성 캐릭터가 중심이 되는 작품이 상대적으로 더 많고, 큰 팬덤을 확보해 흥행에 용이한 남자 배우들이 많은 만큼 이런 분위기가 지속되긴 쉽지 않다는 의견이다.
또 다른 드라마 외주제작사 관계자는 “여성 캐릭터가 순식간에 여러 남성을 제압하는 액션을 선보이는 등 다소 무리한 설정이 오히려 현실감이 떨어진다는 지적도 있다”며 “단순히 힘이 세거나 싸움을 잘하는 수준을 넘어 현실적인 힘을 갖춘 여성 캐릭터를 개발해야 이 같은 분위기가 이어질 것”이라고 충고했다.
김소리 대중문화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