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연금 기금운용본부 전주 사옥. 사진제공=국민연금
또 문 후보는 “국민연금이 국민의 재산”이라며 ‘스튜어드십 코드’를 도입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스튜어드십 코드는 기관투자자가 기업 경영 및 의결권 행사에 참여하도록 한 지침을 뜻한다. 즉 스튜어드십 코드 도입으로 국민연금이 소극적인 투자자 역할에서 벗어나 적극적인 감시자 역할을 해야 한다는 의사를 밝힌 것이다.
적립금 규모 기준 ‘세계 3대 연기금’으로 성장한 국민연금은 이번 대선을 앞두고 정치권의 뜨거운 관심을 받고 있다. 국민연금이 도입된 1999년 47조 원이었던 적립금은 지난해 10월 기준 546조 원으로 증가했다. 2043년에는 국민연금의 총 적립금이 2561조 원에 달할 것으로 전망된다. 이는 연간 국내총생산(GDP)의 50%가 넘는 금액이다.
국민연금 가입자 1800만 명이 낸 적립금은 국민연금기금운용본부(이하 기금운용본부)가 책임 운용한다. 무소속 김종훈 의원실이 작성한 ‘국민연금의 경제민주화 역할 강화법’ 참고자료에 따르면 국민연금은 전체 기금의 52.48%인 285조 7000억 원을 국내 채권에 투자하고 있다. 또 국내 주식에는 99조 4000억 원(18.26%), 외국 주식에는 77조 4000억 원(14.22%)을 투자한 것으로 나타났다.
올해 들어 국민연금의 국내 주식 투자액은 100조 원을 돌파했다. 코스피 시가총액이 1300조 원인 것을 감안하면 산술적으로 상장사 전체 지분 7.7%를 확보할 수 있다. 실제 국민연금은 시가총액 기준 상위 10대 기업 주식을 평균 7% 이상 보유하고 있으며, 점차 지분을 늘리고 있다.
기금운용본부에 따르면 2015년 말 기준 삼성전자 주식 8.9%를 보유하고 있던 국민연금은 2016년 말 보유 주식을 9.2%로 늘렸다. 같은 기간 현대자동차 보유 지분은 7.4%에서 8.1%로 뛰었고, SK하이닉스 지분도 2015년 말 8.2%에서 지난 3월 기준 10.2%까지 급등했다. 한국전력, 포스코 등 오너가 없는 회사는 물론, 신한지주, KB금융과 같은 금융사, 네이버 등 IT기업까지 국민연금의 투자를 받지 않은 대기업은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더구나 국민연금은 일반인에게 친숙한 대부분 회사에서 대주주 지위를 확보하고 있다.
문재인 더불어민주당 대통령후보가 지난 14일 서울 중구 프레스센터에서 열린 대한상의 초청 대선후보 초청 특별강연에 참석해 기업인들을 대상으로 경제관련 공약에 대해 강연을 하고 있다. 박은숙 기자
그간 국민연금은 수익성을 근거로 재벌 및 대기업 편중 투자 정책을 고수했다. 이 과정에서 경영권에 영향을 줄 정도로 주식을 보유한 기업이 빠르게 늘었다. 지난 7일 기금운용본부가 공시한 ‘2017년 1분기 주식대량 보유내역’을 보면 국민연금은 삼성 계열인 호텔신라(10.6%)와 삼성전기(10.3%)를 비롯해 GS(10.1%), SK케미칼(10.8%), 한화케미칼(10.2%), CJ오쇼핑(12.6%), LS(11.1%), 효성(10.3%), 농심(11.4%), 엔씨소프트(11.1%) 등의 지분을 10% 이상 갖고 있다. 또 최근 인적분할한 현대중공업 지분도 9.3%를 들고 있는데 대주주인 정몽준 아산나눔재단 이사장의 지분(10.15%)과 불과 0.85%밖에 차이가 나지 않는다.
국민연금의 자본시장에 대한 영향력이 커지면서 각 대기업은 국민연금의 투자를 유치하는 한편 경영권에 미치는 영향을 최소화하기 위한 여러 노력을 벌여왔다. 자사주 매입과 우호 지분 확보를 통해 대주주 지배력을 강화하는 것은 물론, 오너에게 불리한 의결권을 행사하지 않도록 물밑 협상을 전개했다.
삼성물산 합병 과정에서 보듯 국민연금은 대기업 의사 결정의 ‘캐스팅보트’를 쥐고 있다. 하지만 경영권 승계, 지배구조 강화 등 대기업 오너의 이익에 반하는 결정을 내린 사례는 찾기 어렵다. 대체로 오너의 이익이 기업의 이익과 합치된다고 판단하고 있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최근 황창규 KT 회장의 연임 지지, 권오준 포스코 회장의 연임 승인에서 보듯 국민연금은 그동안 현 경영진과 마찰을 피하는 방향으로 의결권을 행사해왔다.
‘국민연금기금 윤리강령’에 따르면 ‘기금운용본부는 선량한 관리자로서의 주의의무’를 지고 ‘기금이익 최우선 원칙’을 견지한다. 국민연금의 도입 취지가 ‘국민 생활안정과 복지증진에 이바지함’이기 때문에 국민연금은 오로지 국민을 위해 쓰여야 한다.
하지만 때로 연금의 이익과 기업의 이익이 충돌하는 상황이 발생했을 때 국민연금은 기업의 이익을 우선시하는 것 아니냐는 의심을 받아왔다. 이는 국민연금의 불투명한 기금운용 구조, 즉 ‘비밀주의’ 때문인데, 이에 대해 국민연금은 “전 세계 연기금 중 국민연금만큼 투자처를 투명하게 공개하는 곳은 없다”고 반박한다.
또 국민연금은 가습기 살균제 참사의 주범으로 지목된 옥시레킷벤키저와 같은 부도덕한 기업에 투자한 사실이 <일요신문> 취재 결과(제1251호 ‘가습기 살균제 원료-제조-판매기업 철저 해부’) 드러나면서 기금운용 원칙 가운데 하나인 ‘공공성’을 소홀히해온 것 아니냐는 비판을 받기도 한다. 국민연금은 해외 주식 투자 및 대체 투자 규모를 늘리면서 ‘수익성’에 집중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실제 국민연금은 최근 금융투자 전문지인 <아시아에셋매니지먼트>로부터 ‘올해 최우수 연기금상’을 수상하는 등 수익률 면에서는 호평을 받고 있다. 지난 3월 국민연금은 “브렉시트와 미국 트럼프 대통령 당선 등 세계 경제의 불확실성이 높아진 상황에서도 잠정수익률 4.75%를 달성했다”고 자평했다. 국민연금은 설립 이래 연평균 수익률 5.86%, 수익금 258조 7000억 원을 기록했다.
그러나 정치권은 국민연금의 수익성보다 공공성을 강화하는 방향의 정책을 논의하고 있다. 이미 전 세계 연기금은 기업의 ‘사회적 책임’(CSR)을 유도하기 위해 ‘사회 책임투자(SRI)’ 정책을 강화하고 있다. 일례로 독일과 프랑스는 연기금이 기업의 윤리·사회·환경적 측면을 고려해 투자하는지 공개하도록 의무화하고 있다. 일본도 연기금 투자 시 기업의 환경적 측면을 감안하도록 권고한다. 단기적인 수익 추구보다 장기적인 관점에서 책임 투자가 이뤄질 수 있도록 돕겠다는 것이다.
김종훈 의원이 지난 3월 발의한 ‘국민연금의 경제민주화 역할 강화법’에는 가장 강력한 형태의 의결권 행사 유도안이 담겨 있다. 국민연금이 국민연금법상 명시된 투자 기업의 환경·사회·지배구조 등의 요소를 검토하고, 이사회 미팅 제안 등 적극적인 의결권 행사에 나서야 한다는 것이다. 또 국민연금의 요구가 받아들여지지 않을 경우 보유 주식을 매각해야 한다는 내용도 담겨 있다.
국민의당 안철수 대선후보가 지난 14일 서울 여의도 국민의당 당사 대회의실에서 학부모들과 육아정책 간담회를 하고 있다. 박은숙 기자
이보다 덜 급진적이지만 국민연금의 ‘선량한’ 의결권 행사를 촉진시키기 위한 법안도 다수 계류 중이다. 세부적인 내용은 조금씩 차이를 보이지만 더불어민주당, 국민의당은 물론 자유한국당까지 국민연금의 기금운용체계를 개편하는 내용의 법안을 발의했다. 이들 법안의 방점은 연기금운용의 투명성과 전문성을 강화하고, 독립성을 확보하는 데 있다. 국민의당 안철수 캠프의 정책실장을 맡고 있는 채이배 의원은 “국민연금에 부당한 영향력을 행사하면 형사처벌과 손해배상을 묻도록 하겠다”고 공언했다.
그러나 최근 정치권의 국민연금을 활용한 경제민주화 논의를 바라보는 재계의 시각은 곱지 않다. 자칫 정치적 외풍에 휩싸여 기업 경영권이 침해받을 수 있다고 우려하는 것이다. 재계 한 관계자는 “지난 대선 때도 반(反)재벌 정서를 키우고 국민연금을 활용하겠다는 공약이 나왔는데 이번에도 마찬가지”라며 “삼성물산 합병도 국민연금은 주주가치 훼손이 아니라고 해명한 바 있지만 그런 말은 아무도 듣지 않는다. 정치 논리에서 과연 국민연금이 자유로울 수 있겠느냐”고 말했다.
재계가 우려하는 최악의 상황은 이른바 ‘경제민주화법’ 통과와 함께 국민연금의 의결권 행사가 확대되는 것이다. 더불어민주당은 기업의 자사주 의결권을 제한하는 내용의 법안을 발의했는데 만약 법안이 통과된다면 대주주의 지배력은 약화되지만 국민연금의 의결권은 강해진다. 다만 국민연금이 실제 각 기업의 대주주가 될 가능성은 매우 낮은 것으로 전해진다. 문재인 후보 캠프와 안철수 후보 캠프에 참여한 경제 참모들은 각각 정부가 기업을 직접 소유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는 입장을 여러 차례 밝혔다.
정치권의 강한 의지에도 불구하고 국민연금을 통한 경제민주화 실현에는 여러 과제가 남아 있다. 특히 국민연금과 이해관계가 얽힌 금융사·증권사·자산운용사는 대부분 친(親)대기업 성향으로 분류된다. 이들은 2016년 4분기 기준 국민연금이 투자한 국내 주식의 46.5%를 대체 운용하고 있다. 국민연금이 이들 금융증권사의 지분을 일부 소유하고, 다시 이들 회사에 일감을 주는 구조다.
또 각 금융·증권사는 국내 대기업을 주 고객으로 두고 있기 때문에 그 영향력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실제 삼성물산 합병 과정에서 7개 증권사 가운데 반대 의견을 낸 곳은 1곳밖에 없다. 당시 국민연금은 “외부 시장전문가가 삼성물산 합병에 대해 긍정적으로 판단했다”는 이유를 들어 찬성표를 던졌다. 투자업계 관계자는 “대기업은 우리가 관리해야 할 중요 고객”이라며 “(대체 투자 등은) 워낙 전문적인 영역이기 때문에 감시가 작동하기 어렵다”고 말했다.
강현석 기자 angeli@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