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대 대선, 이회창 병풍 vs 김대중 비자금
15대 대선이 있던 1997년 대한민국엔 IMF와 재벌의 부도 등 연이은 악재가 몰아닥쳤다. 이에 당시 김영삼 대통령과 여당인 신한국당은 몰락의 길을 걷고 있었다. 15대 대선은 신한국당 이회창 후보와 야당인 새정치국민회의 김대중 후보간의 양자 대결구도로 전개됐다.
이회창 후보는 신한국당 경선을 완승으로 이끌며 대세론을 구축해 나갔다. 하지만 본선에서 두 아들이 체중 미달로 병역 면제를 받았다는 이른바 ‘병풍(兵風)‘ 논란에 휘말리며 위기를 맞았다. 상대 진영은 이를 놓치지 않고 네거티브로 이용했다. 당시 김대중 후보 측은 “두 아들을 모두 체중미달이라는 수법으로 군에 보내지 않은 이회창 후보는 국군통수권자가 될 수 없는 ‘빵점짜리 무자격자’”라고 강도 높게 비판했다.
심지어 이회창 후보의 장남 정연 씨에 대해 “키 179㎝에 몸무게 45㎏의 인체구조는 의학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연구대상이며 부축 없이는 직립보행이 불가능한 ‘인간육포’ 상태”라며 인신공격도 서슴치 않았다. 또한 “정연 씨의 면제판정이 정당했다면 정연 씨는 뼈와 장기, 근육 세 가지 중 하나가 없는 셈”이라며 공세 수위를 높여갔다.
’병풍‘ 네거티브 전략은 적중했다. 군 복무 문제에 예민한 우리 국민들은 이를 민감하게 받아들였고, 이 후보의 지지율은 폭락하기 시작했다. 상대 진영의 강도높은 정치 공세에 당황한 신한국당 일각에서는 후보를 바꿔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됐고, 경선 2위였던 이인제 의원이 그 대안으로 거론되기도 했다.
병풍 논란으로 궁지에 내몰렸던 이회창 후보 측은 ‘비자금 네거티브’ 카드를 꺼내며 반전을 모색했다. 이회창 캠프의 강삼재 사무총장은 “김대중 후보가 처조카 이형택을 통해 670억 원을 관리했다”는 내용의 ‘김대중 비자금’을 폭로했다. 또한, 1991년 초에 노태우 전 대통령으로부터 20억 원+α를 받았다는 주장까지 더해졌다.
하지만 김영삼 정부는 수사를 선거 이후로 유보하겠다고 밝혔다. 공교롭게도 이 사건이 14대 대선 비자금 문제와 엮여 있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병풍 네거티브를 막기 위해 꺼낸 비자금 네거티브는 오히려 ‘공작정치’로 취급받으며 역풍을 맞게 됐다. 결국 40.3%의 득표율을 얻은 김대중 후보가 이회창 후보(38.7%)를 누르고 당선됐다.
병역 비리에 연류된 이회창 한나라당 후보의 아들 이수연 씨가 서울대 병원에서 키를 측정하고 있다. 1997년 12월 10일 ⓒ우태윤 기자
◇ 16대 대선, 이회창 ’병풍‘ 재연으로 대권 재수 실패
2002년에 치러진 16대 대선은 대권 재수생인 이회창 후보(한나라당)와 여당인 새천년민주당 노무현 후보간의 양자 대결구도로 전개됐다. 선거 초기에는 두 후보의 지지율에 큰 격차는 없었다.
하지만 15대 대선때 불거진 병역기피 논란이 재연되면서 또 다시 이회창 후보는 위기에 직면했다. 15대 때 이미 파장을 일으켰지만 한 번 붙은 꼬리표는 좀처럼 떨어질 줄 몰랐다. 김영삼 정부에서 국무총리를 지내며 청렴한 이미지로 국민적 인기를 얻어온 이회창 후보였지만 징병 국가에서 ’병풍‘이라는 오명은 그를 한낱 구태 정치인으로 몰락시키기에 충분했다.
결국 병역기피 의혹으로 더럽혀진 이회창 후보의 이미지는 대선 패배에 결정적인 요인으로 작용하면서 또 한번 고배를 마시게 된다. 이후 병풍 논란은 사실이 아닌 것으로 밝혀져 이회창 후보는 네거티브 전략에 희생된 대표적인 사례로 남게됐다.
2005년 대법원은 이회창 후보 아들의 병역 의혹을 최초로 제기한 모병 담당 부사관 출신 김대업 씨에 대해 유죄 확정판결을 내렸다. 의정 부사관 출신인 김대업이 병역문제 전문가로 행세하며 이 후보에게 타격을 가했다는 것이 법원의 판단이었다.
사실과 다른 네거티브 전략으로 두 번이나 대권 도전에 실패한 이회창 후보는 비운의 정치인으로 회자되고 있다. 훗날 이회창 후보는 TV 토론회에 나와 “(병풍, 세풍, 안풍 등) 바람 중에 병풍이 가장 힘들었다”라며 씁쓸하게 웃기도 했다.
◇ 17대 대선, 이명박 BBK사건 극복하고 압승
참여정부(노무현 정부) 심판론이 대세를 이뤘던 17대 대선은 본선보다 야당 경선이 화려했던 것으로 기록된다. 2007년에 치러진 한나라당 경선은 이명박 후보와 박근혜 후보간의 치열한 양자 대결로 진행됐다.
경선 과정에서 박근혜 후보 측은 이명박 후보를 흠집 내기 위해 결정적인 한 방을 준비했다. ‘BBK 주가조작 사건’이 대표적이다. 2000년대 초 BBK 투자자문 대표 김경준이 옵셔널벤처스를 인수한 뒤 주가를 조작하고, 소액주주 5200명에게 384억 원의 피해를 입히고 300억 원대를 횡령한 희대의 사기 사건이다. 그런데 BBK의 실소유주가 이명박 후보라는 주장이 나오면서 앞서가던 이명박 후보에 대한 여론이 악화되기 시작했다.
박근혜 후보는 한나라당 경선에서 이명박 후보를 떨어뜨리기 위해 BBK 사건을 폭로했다. 사진 속 박근혜 후보 오른쪽으로 이명박 후보의 그림자가 보인다. ⓒ연합뉴스
BBK 사건은 당시 여당이었던 대통합민주당 측이 아닌 이명박 후보의 경쟁자였던 같은 당 박근혜 후보 측이 폭로했다는 점에서 한나라당 경선이 얼마나 긴박했는지 방증하고 있다. 박 후보 측은 날 선 표현을 이어가며 여론전을 주도했고, 여기에 여권도 가세해 ‘이명박 때리기’에 열을 올렸다. 결국 검찰과 특검 수사로 확전됐지만 BBK 사건은 김경준의 단독 범행으로 결론나면서 이 후보는 기사회생했다.
당시 이명박 후보는 BBK 사건 외에도 운 좋게(?) 네거티브를 빗겨나간 후보로 기억된다. 이 후보는 이회창 후보가 ‘병풍’에 휩쓸려 낙선한 것을 교훈삼아 제기되는 갖은 논란을 신속하게 차단하는 모습을 보였다. 이 후보 측은 일부 네티즌들이 ‘이명박 전 서울시장과 아들이 고의로 병역을 기피했다’는 주장을 하자 곧바로 법적 대응을 이어갔다. 그리고 자신과 아들 시형 씨에 대한 병적 기록표 등 관련 자료를 적극적으로 공개하는 방법으로 의혹과 논란에 맞섰다.
본선에선 여당 후보인 정동영 대통합민주신당 후보 측이 네거티브 전략으로 이명박 후보를 공격했다. 하지만 지지율이 훨씬 앞선 이 후보 측에선 굳이 네거티브를 쓸 이유가 없었고, 필요도 없었기 때문에 포지티브 전략을 이용했다. 당시 두 후보의 광고에도 큰 차이점이 있었다. 이 후보는 욕쟁이 할머니에게 욕을 들으며 국밥을 먹는 모습을 연출하며 ‘경제대통령’ 이미지를 강조한 반면 정 후보는 BBK 사건을 부각시키는데 주력했다.
결과는 이명박 후보의 압승으로 막을 내렸다. 이명박 후보는 48.7%의 득표율로 26.1%에 그친 정동영 후보를 여유있게 누르고 17대 대통령으로 당선됐다.
◇18대 대선, 이정희 ’박근혜 때리기‘ 불발
2012년에 치러진 18대 대선은 여당인 새누리당 박근혜 후보와 야당인 민주통합당 문재인 후보의 대결로 압축됐다. 두 후보의 득표율은 무려 99.5%로 나타난 반면 다른 후보들의 득표울은 0.5%에 그쳤다. 그만큼 두 사람은 초박빙 승부를 연출했는데 정작 인상 깊은 네거티브를 남긴 후보는 박 후보도 문 후보도 아닌 이정희 통합진보당 후보였다.
“충성 혈서 써서 일본군 장교가 된 다카키 마사오, 누군지 아실 겁니다. 한국 이름 박정희. 해방되자 군사쿠데타로 집권하고는 사대 매국 한일협정 밀어붙인 장본인입니다. 뿌리는 속일 수 없습니다”
당시 이정희 후보는 TV 토론회에 나와서 자신이 얼마나 준비된 인물인지, 얼마나 대통령에 적합한 인물인지에 대해선 어필하지 않고 오로지 네거티브를 이용해 박근혜 후보만 공격하는데 주력했다.
특히 이 후보는 “박근혜 후보를 떨어뜨리러 나왔다” “친일과 독재의 후예인 박근혜 후보” 등 십자포화를 쏟아내며 박 후보를 곤경으로 몰아 넣었다. 진보 성향의 유권자들 사이에서는 환호가 쏟아져 나왔고, 네티즌들 사이에서도 “속시원하다”는 분위기가 형성됐다. 하지만 보수 언론들과 여론이 예민하게 반응했다. 이 후보의 맹공에 분노한 보수는 결집했고, 박 후보 지지자들은 “본때를 보여주자”며 의지를 다졌다.
결국 이 후보의 네거티브 전략에도 불구하고 박근혜 후보는 과반이 넘는 51.6%의 득표율로 문재인 후보(48%)를 누르고 대권을 거머쥐었다.
이수진 기자 sj109@ilyo.co.kr